121화
“뭐?”
노아의 언성이 저렇게까지 높아지는 건 처음 봤다.
“안 돼! 싫어! 절대 안 돼!”
어지간한 일에는 내 의견에 순순히 따라주는 노아였다. 내가 위험한 일만 아니라면 늘 나에게 맞춰 주던 노아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거절하다니.
‘그동안 리아노 공작가에 정이 많이 든 걸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빌런들의 뚝배기를 깨면서 노아는 최대한 보호할 생각이다.
문제 되는 건 엄연히 리아노 공작만의 업보일 뿐이며, 노아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문이라는 건 무서운 법이잖아?’
노아가 ‘리아노’의 성을 쓰고 있는 이상, 아무리 내가 노아를 보호하려 해도 뒷말이 나오는 것을 완벽히 막기는 어려울 테다.
그로 인해서 노아가 평생 꼬리표를 달고 사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노아가 다치는 건 싫단 마랴.”
“루나, 울 것 같은 표정 안 지어도 돼. 나도 네 뜻에 동의해.”
그제야 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당장에라도 뚝뚝뚝 떨어트릴 것처럼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금방 마음이 풀어졌다.
적어도 보육원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말에 노아가 상처받지 않았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가 그랬듯, 나도 그의 표정만 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아빠한테 부탁해 놓을,”
“그, 그건 안 돼!”
“읍!”
다급히 손바닥을 뻗어 내 입술을 틀어막은 노아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저건 필시, 묘수를 떠올릴 때의 습관이었다.
“세…… 셀리!”
셀리가 갑자기 왜 나와?
입이 막힌 나는 두 눈을 깜빡이는 걸로 질문을 대신했다.
움찔하며 손을 거둔 노아가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덧붙였다.
“그래, 셀리 그 녀석을 거기에 두고 혼자 나올 수는 없지!”
……이유가 그쪽이었어?
그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이름이라서 그런가.
어쩐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나라고 셀리를 아예 배제해 놓았던 건 아니다. 따로 셀리에게도 연락을 취해 볼 생각이었다.
굳이 노아에게 언급하지 않은 건, 그동안 둘 사이가 딱히 서로를 신경 쓸 만큼 가까워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내 제안에 격하게 반대를 외친 이유가 셀리 때문이었다니.’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나의 노아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고 싶은 질문이 마음 한구석에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셀리랑은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지?’
왜 그런 유치한 물음이 떠올랐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노아의 표정을 봤을 때, 서먹서먹한 내 속마음을 들켰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그리고 너랑 가족이 되면, 너랑 결혼 못 하잖아!”
“……어?”
“난 루나 너랑 결혼할 거라서 지금은 절대 가족이 될 수 없어!”
노아는 방금 자기가 나한테 프러포즈를 한 사실을 알까?
사람을 당황시켜 놓고서 정작 당사자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그러니까 절대 라이언하트 가문에 입양은 안 돼. 알았지? 나랑 약속해, 루나.”
“어? 어. ……응, 약속.”
그가 쭉 뻗은 새끼손가락에 홀린 듯이 마주 걸었다.
“좋아, 약속한 거야.”
무언가를 다짐하며 의지를 불태우는 노아를 보고 있다 보니 괜스레 두 뺨이 뜨거워졌다.
‘……벌써 덥네.’
쥐도 새도 모르게 여름이 찾아온 모양이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사방에서 초여름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작열하는 태양을 가득 품은 잎사귀들이 푸릇푸릇함을 온 천하에 뽐냈다.
‘스트리트 3가의 일이 있은 지도 벌써 2주가 지났네.’
다행히 이후로 그날의 일은 라이언하트 가문에도 스트리트 3가에도 벌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작전이 먹혀든 것이다.
스트리트 3가 사람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체적으로 결성한 자경단도 그렇고, 다페 남작에게 보내 둔 협박 편지도 아주 효과적이었다.
‘하여튼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한테는 강한 치사한 놈이라니까.’
일전에 ‘기르신 남작’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전례가 있어서 그런지, 다페 남작은 약점이 잡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2주 만에 다시 그 얼굴을 볼 일이 생겼다.
제국 공식 행사, <리멤버 데이>
몇십 년 전, 수인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바쳐 제국을 수호한 이들을 기리는 행사였다.
동시에 그날은 이든에게는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를 추모하는 날이었으며, 에덴 제국의 황제에게는 마음속에 묻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날이었다.
여러모로 긴 하루가 예상됐다.
“아가님, 오늘은 예복이라서 옷이 조금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복잡하게 디자인 된 아기용 검은 드레스를 내게 입혀 준 리챠드가 영 신경 쓰였는지 거듭 물었다.
“혹여라도 땀띠가 날 것 같거나, 간지러우시면 언제든 꼭 제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괜챠나요.”
슬슬 더워지는 날씨에 예복은 덥고 답답했지만, 나는 떠난 이들에게 최대한 예를 갖추고 싶었다.
“아빠는요?”
“각하께서는…… 온실에 가 계십니다.”
평소였으면 진즉 나를 에스코트하러 왔을 아빠였다. 오늘은 어째 모습을 보이지 않아 물었는데.
‘역시 그곳에 가 계셨구나.’
그는 매해 리멤버 데이 때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뒤뜰 온실을 찾았다. 그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는 부모님의 기일만 되면 고요한 새벽부터 해가 완전히 종적을 감출 때까지 하염없이 시간을 죽인다’라는 지문은 늘 내 마음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이번만큼은 외로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항상 이맘쯤에는 힘들어하셨지만, 올해는 다르지 않습니까?”
“리챠드의 말이 마쟈요.”
올해는 이든 혼자서 견뎌 내지 않아도 된다.
“엘베른 님도 계실뿐더러, 무엇보다 아가님께서 계시니까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여.”
“저는 의외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답니다.”
리챠드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러 익살스럽게 미소 짓는 것을 보고 힘을 얻었다.
“아빠 모시고 오께요.”
“마차를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넘어지지 않게 치맛단을 살포시 잡고서 뒤뜰 온실로 향했다.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 온실과 가까워질수록 두런두런 말소리도 커졌다.
【오늘 호국원의 추념식에 참여한다고?】
“표면적으로는 비스의 귀족들은 가급적 참여하는 게 원칙이라 합니다. 하나, 아버지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불참하도록 하겠습니다.”
【황궁에 갔을 때 대신관 쪽에서 의심을 했다고 들었다. 이번 추념식에 참여 안 했다가는 괜히 그 의심만 더 불거질 뿐이야.】
두 남자의 대화 주제는 역시나 <리멤버 데이>였다. 아빠는 내심 원수나 다름없는 인간들의 추념식에 참여하는 게 마음에 쓰이신 모양이었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할아버지가 라이언하트 저택에서 함께한 이래로 두 남자가 이렇게까지 차분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끼어들 타이밍을 놓친 나는 나무 뒤에 숨어서 둘을 지켜봤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아빠와 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은 공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과거를 회상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두 분 다 여전히 인간들에게 화가 나 계실까?
“한때는 가까운 사이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
“아직도 기억납니다. 어머님께서 화나신 날이면 늘 황실로 도망가 계시던 모습이요.”
【별걸 다 기억하는군.】
추억에 젖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중간중간 아주 미미했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보았다.
‘……웃으셨어!’
그것은 아주 큰 의미다.
적어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두 남자는 인간들에 관한 얘기만 꺼내도 낯을 굳히고 봤으니까.
어쩌면 조금씩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을지 몰랐다.
인간을 혐오했던 이든 라이언하트에게 내가 소중한 존재가 되었듯이, 엘베른에게도 변화가 온 건 아닐까?
부푼 기대감을 안고서 이어지는 두 남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왜 매번 금방 들킬 걸 알면서도 똑같은 곳으로 숨으러 가시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야 내 부인께서 나를 찾아올 수 있으니까. 원래 부부란 그런 거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머무는 것. 서로에게 쉬이 잡혀 주고 자존심 부리지 않고 져 주는 것. 가장 쉽지만 아무나 못 하는 것이기도 하지.】
“그래서 어머니께서도 아버지에게 서운한 일이 있으실 때마다 황후를 찾아갔던 거군요.”
두 남자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아마 같은 이를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남자에게는 어머니였고, 다른 남자에게는 목숨까지 기꺼이 바칠 수 있는 반려였던 여자를.
‘정말 어쩌다가 이 지경으로 서로를 원망하게 된 걸까.’
안타까운 마음이 자라났다.
서로를 향한 ‘오해’가 없었더라면 수인족과 황실은 지금쯤 행복하게 지냈을지도 몰랐을 텐데.
‘망할 흑막 빌런 같으니라고.’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그 자식을 생각하니 속에서 천불이 들끓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릴리앙이나 웨인투르처럼 상처받는 이들도 없었을 것이다.
에덴 제국과 수인은 서로 공생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고.
등 뒤에서 불어온 미적지근한 바람이 내 마음을 부추겼다.
‘이들의 관계가 아주 오래전 그때처럼 돌아갈 수 있게끔 만드는 건 어떨까?’
철옹성 같던 이든 라이언하트의 마음을 돌이키기까지 했는데.
손녀 바보인 엘베른과 내 열렬한 팬이 되어 버린 루덴스 카일 에덴 황제라고 어려울까?
왠지 모르게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 해 보는 거야.’
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만 있다면 못 해낼 건 없잖아?
“아빠! 할부지!”
나는 숨어 있던 나무 뒤에서 나와 두 남자 사이로 포르르 달려갔다.
“마차 준비가 다 됐뎨요. 출발해요, 얼른.”
“동행하실 겁니까?”
아빠가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혹, 거절하시진 않겠지?
솔직히 조금 마음 졸이긴 했다.
뭐든지 첫걸음이 어려운 법이니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엘코어를 두 손으로 살짝 쥐었다.
내 마음이 통한 건지, 할아버지의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하나뿐인 손녀님께서 원하시는데, 당연히 응해야지.】
좋아, 첫걸음을 뗐으니 이제 더는 어려울 것도 없었다.
호국원에서 황제의 마음을 조련해 버리고 말 거야!
나는 여느 때보다 시커먼(?) 계략과 흑심을 품고서 마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