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수도의 외곽, 리멤버 데이를 맞이하여 추념식이 진행되는 호국원.
“많이들 왔군.”
아빠는 코끝을 찡그리며 주변을 살폈다. 나도 덩달아 북적이는 인파를 눈에 담았다.
호국원에는 낯이 익은 귀족들뿐 아니라, 이름 모를 평민들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참관했다. 호국원에 잠든 이들의 유족들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평민들한테 어필하기 죠은 기회니까여.”
“저 역겨운 기회주의자들의 속내를 모르는 백성들이 불쌍할 따름이다.”
진심으로 콧방귀 끼는 아빠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가 진실을 알려 쥬자구요.”
순국선열의 대부분은 평민들이었기에 추념식은 비스의 중앙 귀족들에게 있어 정치적인 이유로라도 필참 해야 하는 행사였다.
‘평민들의 지지율.’
즉, 여론은 힘의 기반이나 다름없었다.
제아무리 돈이 많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대중들의 진정한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런 점에 있어 리아노 공작가의 작전은 제법 영리한 편에 속했다.
그들이 평민들에게 어필한 건 ‘마법의 힘’이 아니라,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었으니까.
‘실제로 성공적인 작전이기도 했지.’
특히 비스에 속한 평민들 대부분은 리아노 공작가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그들이 속고 있는 것이라고는 꿈에도 알지 못한 채로 말이야.’
몇 달 전에 있었던 전염병, 츄릅츄릅 병 때와 마찬가지로 리아노 공작은 대중들에게 교묘하게 술수를 써 왔다.
다만 들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걸 알고 나서도 평민들이 리아노 공작가를 지지할까?’
오랫동안 속였다는 사실이 들통나게 되면, 리아노 공작가의 지지율이 떨어질 뿐 아니라 대중들에게 외면받게 될 것이다.
‘특히 다른 가치 중 ‘명예’를 가장 중시하기에 리아노 공작가가 회복하기는 어렵겠지.’
나는 이제 막 호국원에 들어서는 리아노 공작가를 노려보며 머릿속으로 조용히 작전을 상기했다.
그 뒤로 따라 들어온 노아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안녕, 루나.’
입 모양으로 작게 알은척하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안녕, 노아.’
오늘도 역시나 셀리 리아노는 동행하지 않았다.
정작 제 자식은 챙기지 않는 리아노 공작을 보니 마음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셀리…… 답장이 언제 오려나.’
지난번, 노아와의 독대 이후로 곧장 리아노 공작가에 밀서를 보냈다.
수신인은 셀리 리아노 영애.
편지 안에 담긴 내용은 노아에게 권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네가 괜찮다면 ‘라이언하트’의 성을 쓰지 않을래?>
모든 내용을 솔직하고 가감 없이 썼다.
앞으로 썩어 빠진 정‧재계에 정의 구현을 할 것이란 예고.
리아노 공작가 역시 그 대상이며, 자칫하면 셀리 역시도 괜히 휩쓸릴 수 있다는 경고.
어쭙잖은 감언이설로 속이는 것보다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게 셀리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해서였다.
‘아직 답변은 오지 않았지만…….’
나는 믿는다. 그녀가 충분히 고민해 준 끝에 답장을 해 줄 것이라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과 함께 본격적으로 추념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단상에서 모리스 대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념식은 대신전에서 주도한다.
때문에 그간 자숙해야 했던 모리스 대신관이 간만에 공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단상에 올라온 모리스 대신관과 얼핏 시선이 마주쳤다.
사나운 눈빛이 나를 위협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이미 한 번 당한 전적이 있는 다페 남작이나 리아노 공작가는 알아서 눈을 피했다.
하지만 모리스 대신관은 달랐다.
이전보다 더 큰 분노와 복수심으로 차올라 있었다.
역시 최종빌런답다고 할까?
나 역시도 지고 싶지 않아 마주 노려보고 있는데, 시야가 가려졌다.
‘응?’
내 눈을 가린 커다란 손바닥에서는 익숙한 향이 났다. 아빠였다.
“저런 거 상대할 필요 없다.”
아빠는 말을 아꼈지만, 이미 눈으로는 쌍욕을 하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 보니 웃음이 났다.
‘든든하네, 우리 아빠.’
모리스 대신관 따위 두렵지 않았다.
“다음은 황제 폐하의 추념사가 있겠습니다.”
단상 위로 황제가 올라섰다.
밤잠을 설치신 걸까?
오늘따라 혈색이 좋아 보이지 못했다.
‘왠지…… 불길한데?’
원인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고, 나는 행사 내내 초조한 마음으로 황제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쫓았다.
다행히 큰일 없이 순국선열을 한 이들을 기리는 추념사가 끝났고 행사는 막바지로 흘러갔다.
“이상으로 추념식을 마치겠습니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얼굴 비추기 위해 온 귀족들은 마차로 사라지기 바빴다.
내가 봤을 때 진정으로 평민들을 위해 온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아빠 말대로 다들 너무하네.’
대충 볼일 다 봤으니 서둘러 자리를 뜨는 모습이 –이런 표현하기 뭣하지만- 바퀴벌레 떼들 같았다.
그나저나…….
‘황제 폐하는 어디 계시지?’
추념식 내내 낯빛이 좋지 않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제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아빠, 우리도 자리를 옮길까여?”
“사람 많으니까 이리 와.”
아빠는 내가 인파에 치이지 않도록 나를 품에 안아 들었다.
“어디를 그렇게 바삐들 가시나.”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우리의 앞길을 막아선 이는 다름 아닌 모리스 대신관이었다.
달갑지 않은 인사와 마주치자 표정이 저절로 구겨지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다.
“귀족적이지 못하군.”
곧장 모리스 대신관이 찡그린 표정을 지적했다.
“할 말이 없는 상대를 붙잡고 있는 거야말로 실례인 거져.”
“건방진 코흘리개 같으니라고.”
모리스 대신관은 우리에게 적의를 표하면서도 주변을 의식해서인지 목소리는 잔뜩 낮추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우스워 보인다는 걸 모르는 거겠지?
“네놈들의 더러운 속내를 모를 줄 아느냐?”
“누가 할 말인지 모르겠군.”
아빠가 지지 않고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잠시 그 기세에 눌린 모리스가 주춤하는가 싶더니, 안색을 바꿨다.
이내 그는 승기를 잡기라도 한 것처럼 한껏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네놈이 수인이고 말하면 어찌 될까?”
“뭐라고여?”
저게 진짜 미쳤나?
최대한 모리스의 도발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지만 이 발언만큼은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든이 수인족인 걸 밝힌다고?’
다른 날, 다른 곳도 아니고 수인족과의 전쟁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의 가족이 모인 추념식에서?
몰매 맞아 죽으라는 소리였다.
모리스 대신관은 내 반응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잘 생각하고 언행을 똑바로 하라는 뜻이다.”
“할 수 있으면 해 봐요. 적어도 가만히 당하고 있는 멍춍이는 아니니까.”
“뭘 믿고 까부는지 모르겠구나. 지금은 네 아비의 껍데기를 연기하고 있는 저 짐승이 널 끝까지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하느냐?”
나를 품에 안은 아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 모리스 대신관의 입을 힘으로 틀어막아 버리고 싶지만 참으시는 것 같았다.
‘잘 참았어요, 아빠.’
나는 아빠의 팔을 꼭 잡으며 속으로 마음을 전했다.
지금 여기서 괜히 섣불리 반응했다가는 도발에 휘둘리는 꼴이었다.
‘그건 모리스 대신관이 원하는 바일 테고.’
공식 행사에서, 특히 ‘추념식’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것만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모리스 놈아.
나는 곧이곧대로 당해 주는 순진한 아기가 아니거든?
“입에서 때 나오는 소리 하지 말고, 말 가려서 하시는 게 좋을 꼬에요.”
다른 건 몰라도 우리 가족 욕은 못 참는다.
“겁먹은 표정이 꽤 볼만하구나.”
“이게 겁먹은 걸로 보여요? 노안이 오셨나 보녜.”
“뭐?”
평온을 유지하던 모리스 대신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번만 말할 테니까 똑똑히 들어여.”
표정을 싹 굳히고서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말을 쏟아부었다.
“우리 아빠 건드리기만 해봐. 당신이 대신전 벽화를 조작해서 거짓 예언으로 사람들을 속였다는 게 들통나면 어또케 될 거 같아?”
“…….”
서서히 굳어 가는 표정을 보니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사람도 봐 가면서 건드렸어야죠. 주옥같은 말도 가려 가면서 좀 하고.
“가는귀는 먹지 않으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여.”
마지막으로 엿 먹으라는 의미로 화사하게 미소 지어 줬다.
어디까지나 그를 향한 존중의 의미라기보다는 주변인을 의식해서였다.
‘늬들이 잘하는 이미지 메이킹, 그거 우리도 자신 있거든.’
받은 대로 돌려줄 생각이다.
“그럼 얌전히 지내고 계셔여. 곧 뚝배기 깨 드릴 테니까, 정수리 빡빡 잘 씻고 계시고.”
“저…… 저 빌어먹을…….”
“가요, 아빠.”
우리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악담을 상큼하게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갔다.
* * *
한편, 호국원에 인접한 전망대.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는 마도구인 망원경이 설치된 곳이기도 한 이곳에 새카만 예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드넓은 제국의 황제, 루덴스 카일 에덴이었다.
“……1년만인가.”
그는 호위 기사 둘만 대동하여 전망대에 찾았다.
공식적인 일정은 아니었다.
이곳은 매년 추념식이 있는 날에는 개인적으로 찾는 곳이었다.
“혼자 시간을 보낼 터이니, 물러가 있거라.”
“하지만 폐하. 이 근방은 프리마 숲과 이어져 있어 산짐승이나 수인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호위 기사가 우려의 목소리를 표했다. 걱정하는 이의 마음을 모르는바 아니나, 황실에서는 늘 사방이 그를 감시하는 눈들이었다.
지금만큼은 혼자 보내고 싶었다.
“되었다. 호신술 정도는 몸에 배어 있으니, 위험한 일이 생기면 호출하겠다.”
결국 호위 기사를 물리는 데 성공한 황제는 혼자 남게 되었다.
남쪽으로 향해 설치된 망원경.
마법 장치가 되어 있기에 황후가 묻힌 곳을 눈으로나마 담을 수 있었다.
‘보고 싶소. ……황후.’
가슴에 먹먹한 감정이 차올랐다.
직책상 오랜 기간 황궁을 비워 둘 수 없는 그였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추억에 잠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곳은 평안하시오?’
살아생전 황후의 햇살 같은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폐하. 엘베른 경과 라리엘 부인이 아들을 순산했다 합니다.]
귓가에서는 상냥한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언젠가 행복했던 때가 떠올랐다.
[폐하. 오셨습니까?]
[황후. 이리 추운데 밖에서 기다린 것이오? 안에서 기다려도 된다니까.]
[폐하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었던 제 욕심입니다.]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 황후는 추위에 약하면서도 늘 마중 나와 기다렸다.
빨개진 두 뺨과 코끝마저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접견실에서 엘베른 경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말이오?]
[오늘은 아드님과 함께 오셨습니다. 어찌나 사랑스럽고 건강한 아기이던지.]
황후는 난임이었지만, 벗의 회임과 출산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 따뜻한 마음이 참으로 예뻤다.
[엘베른 경이 그리 들뜬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부럽소?]
[저도 언젠간 폐하의 아이를 가질 수 있겠지요?]
[물론이오. 우리 아이는 예쁜 딸아이로 태어나 줄 것이니, 엘베른 경이 부러워할 얼굴을 구경할 준비 하시오.]
두 사람은 웃으며 언약했다.
반드시 언젠가 우리의 예쁜 딸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예쁜 이름을 주고 좋은 벗을 만들어 주자고요.
과거의 아름다웠던 한순간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손 틈새로 희뿌연 아지랑이처럼 스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