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황제 루덴스 카일 에덴은 스스로 되뇌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밀려오는 그리움에 삼켜질 것만 같았다.
이럴 때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이로웠다.
이를테면,
“아빠!”
……라이언하트 영애?
황제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통통 튀는 맑은 음색은 분명히 루나, 그 아이였다.
그러나 빼곡한 풀숲과 울창한 나무들만 있을 뿐, 낯익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잘못 들은 건가?’
황제는 헛웃음을 뱉어 냈다.
‘이제 하다 하다 라이언하트 영애의 환청까지 듣다니.’
추념식이 끝나면 따로 전망대를 찾는 것은 황제의 공식적인 일정이 아니었다.
일국의 황제가 아니라, 지아비로서 제 아내를 찾고 싶었기에 늘 최소한의 인원과 함께 잠행으로 이곳을 찾았다.
‘그래, 이곳에 있을 리 없다.’
찰나 들렸던 목소리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괴롭힌 환청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근래 들어 환청에 자주 시달렸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라이언하트 영애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군.”
추념식 때 여러 번 시선이 얽혔었다.
그때마다 알은체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만간 황실에 초대해야겠어.’
아빠 미소를 절로 짓게 하는 흰 토끼 같은 아기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가 생각났다.
‘이든 라이언하트 백작. ……변방에서 공로를 쌓았다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흑발의 남자는 첫 만남 때부터 뇌리에 강렬히 남았다.
‘솔직히 말해 많이 놀랐다.’
제 기억 속의 ‘그’와 무척이나 닮았기에.
“처음 봤을 땐, 정말로 엘베른 경이 살아 돌아온 줄로만 알았으니까…….”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잠시 머물렀다가 금세 자취를 감췄다.
‘성격은 엘베른 경과 많이 다르다만, 생긴 것은 빼다 박아 놓은 것 같았지.’
눈가의 커다란 흉터만 빼면 그의 기억 속 엘베른과 똑같았다.
아니, 엘베른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딱 라이언하트 백작과 같은 모습이었으려나?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살아 있을 리 없을 테니까.
‘분명 그날. 라이언하트 부부는 모두 죽었다고 보고 받았다. 그 아들은…… 행방불명이었지.’
다시금 귓가에 그날의 환청이 들려왔다.
* * *
[……폐하. 황후 폐하와 아기님께서 그만…….]
갑작스럽게 끔찍한 선고를 받은 뒤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간신들이 미리 짜고 준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수인족들의 뒤를 치지 않으신다면 언젠가 그들의 발톱이 칼날이 되어 제국의 등에 꽂힐 겁니다!]
[아직 황후와 황손의 국상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소. 한데, 어찌 경들은…….]
괴로움에 젖은 황제는 모리스 대신관을 필두로 한 세도가들이 몰아붙이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황후와 아이를 한날한시에 잃은 슬픔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심장이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황실에 황제의 편은 없었다. 먹잇감의 냄새를 맡고 몰려든 더러운 하이에나들뿐이었다.
[부디 다페 남작가를 필두로 수인 박멸을 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어서 결정 내리셔야 합니다!]
[……경들의 뜻대로 하시오.]
일대 다수로 밀어붙인 주장에 황제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는 국상이 끝날 때까지만 모든 결정권을 모리스 대신관에게 잠시 위임하기로 결정 내렸다.
잠시간의 현실도피가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로.
* * *
환청이 걷히자 깊이 잠들어 있던 죄책감이 불쑥 깨어났다.
‘그때 결정권을 위임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냐고 하겠지만, 최근 그런 생각이 부쩍 자주 찾아와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모든 것은 지난 가정의 달 축제 이후로부터였다.
‘벽화의 요정이 하필…… 엘베른 경과 묘하게 비슷해서.’
사실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했다.
엘코어 목걸이 속에서 처음 모습을 나타냈을 때는 단지 그 거대한 크기에 압도되었다.
그러나 후일, 황궁인들의 입에 거론될 때마다 이유 모를 기시감이 뒤따랐다.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그저 기체 덩어리인 미지의 존재일 뿐인데.
왜 자꾸 오랜 기억 속의 ‘엘베른 경’이 떠오르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디에도 제 옛 친우의 모습은 없었는데 말이다.
“목소리가 닮은 것 같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자꾸만 엘베른이 겹쳐 보였음에도 직접 확인해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해서 라이언하트 영애에게도, 벽화의 요정이라 주장하는 그 의문의 존재에게도 굳이 추궁해서 따져 묻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가 정말 엘베른의 영혼이기를 바랐으니까.’
모르는 척이나마 곁에 두고 싶었다.
그게 속죄의 길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과거 리아노 공작가의 엘코어 연구를 묵인했을 때부터 이어진 꽤 오랜 염원이었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이었다.
황제가 ‘엘코어 연구의 성공을 기원했던 이유’ 말이다.
‘세간에는 부국강병을 위해서라고 떠들어 댔지만 실은…….’
엘베른 경을 그렇게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지난 잘못된 선택에 대해 사과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결국 또 과거의 후회로 돌아온 생각을 이만 접기로 했다.
“모두 부질없는 희망인 것을.”
황제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따로 챙겨 온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싱싱한 블루베리가 들어 있었다.
남왕국의 특산물이라 구하기 힘들어서 한 주먹 챙겨 온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망원경 옆에 귀한 블루베리를 내려놓았다.
“황후, 그대가 좋아하는 과일이오.”
그녀가 묻히길 바랐던 곳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약식으로나마 그녀의 넋을 기리곤 했다.
“올해는 자주 올 수 있도록 하겠소.”
닿지 않는 혼잣말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리움에 잠겨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데, 수풀 쪽에서 소리가 났다.
……야생 동물?
“!”
긴장한 황제는 몸을 일으켜 경계 태세를 취했다.
프리마 숲에서 종종 야생 동물이 출현하는 사례가 있기에 대비책은 이미 준비해 두었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으니 조그마한 마도구가 만져졌다.
‘육식 동물 전용 교란 미끼’다. 굶주린 육식 동물의 표적이 되었을 때, 미끼를 던지면 주의가 미끼로 쏠리기 때문에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
멀지 않은 곳에 호위 기사도 둘씩이나 대기하고 있으니 큰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멧돼지일까? 곰? 아니면 늑대?’
어느 쪽이든 교란 미끼 마도구는 효과적으로 발동할 것이다.
황제는 퇴로 쪽을 곁눈질하며 조금씩 발을 옮겼다.
풀숲이 더 격하게 흔들렸다. 바로 코앞까지 야생 동물이 온 모양이다.
‘온다!’
그가 교란 미끼를 꺼내 던지려는 순간, 풀숲 사이에서 웬 작은 생물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꾸잇!”
“어, 어어……!”
낯선 울음소리에 순간적으로 놀란 황제가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내 그는 자신을 긴장 속으로 밀어 넣은 동물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했다.
‘야생 다람쥐?’
고작 황제의 주먹만 한 작은 다람쥐였다.
“허허. 이거 원. 황후, 아마 그대가 지금 내 꼴을 봤으면 웃음을 터트렸겠구려.”
황제는 넋두리하듯이 혼잣말을 하며 교란용 미끼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허탈한 웃음과 함께 다람쥐를 쳐다보니, 다람쥐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황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나타났을꼬.
작은 몸집에 황제의 경계심이 풀렸을 무렵.
다람쥐가 갑자기 파바박 달려들었다.
목표는 망원경 옆의 블루베리!
황제가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람쥐는 허겁지겁 볼 안으로 블루베리를 집어넣었다.
“그건 안 된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다른 것이었다면 다람쥐에게 얼마든지 먹이로 양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후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것만큼은 안 됐다.
“이리 내놓아라!”
말한다고 들을 다람쥐는 아니었다.
황제가 언성을 높이며 다람쥐를 잡기 위해 덤벼들자, 화들짝 놀란 다람쥐는 더 빠른 속도로 도망쳐 버렸다.
“거기 서!”
황제는 부지불식간에 볼이 볼록해진 채로 달아나는 다람쥐를 쫓았다.
날랜 다람쥐는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고목 나무 위로 호다닥 올라가 자취를 감췄다. 나무 중간 즈음 다람쥐 집처럼 움푹 팬 공간이 보였다.
다행히 높지 않은 위치였고 근처에 발돋움으로 쓸 만한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이 녀석아, 차라리 다른 걸 줄 테니 그것만큼은 돌려 다오.”
바위를 딛고 올라간 황제가 다람쥐 집 안을 들여다봤다.
“……찍!”
“…….”
이내 그는 곧 할 말을 잃었다.
그 안 속에는 블루베리를 훔쳐 간 다람쥐보다 더 작디작은 새끼 다람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끼 다람쥐들은 어미가 가져온 블루베리를 허겁지겁 먹기 바빴다. 그마저도 기운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새끼들도 보였다.
‘대체 이 다람쥐 가족은 얼마나 굶은 것인가.’
하나 같이 털에 윤기가 없었고 야위었다.
개중에는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새끼도 있었다.
“찍! 찍!”
황제에게 위협을 받을까 두려운 어미 다람쥐는 제일 앞으로 나서서 소리쳤다.
압도적인 덩치 차이와 힘 차이가 있음에도 어미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조용히 바위에서 내려왔다.
“황후, 미안하게 됐소.”
제 아내를 위해 준비한 블루베리를 뺏어간 도둑을 벌하지도 않았고, 도로 뺏어오지도 않았다.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던 일이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음에 더 많이 구해 올 터이니, 용서해 주시구려.’
마음속으로 먼저 떠난 연인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돌아서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그곳에 서 있었다.
“어찌 그냥 내버려 두신 겁니까.”
“……라이언하트 백작? 이곳에는 어찌…….”
“질문에 대한 답이 듣고 싶습니다, 폐하.”
어딘가 깊어 보이는 호박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떠난 벗을 떠올리게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