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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124/142)

124화

지금으로부터 10분 전.

전망대에 오른 우리는 멀리서 황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황후 폐하를 생각하는 거겠지.’

누군가를 향한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 얼마나 애틋한지 아는 아빠는 황제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 할애비는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

반면 할아버지는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그는 바람에 쓸려가는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할부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군.”

우리는 조용히 황제가 황후를 추모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별안간.

“그것만큼은 안 된다! 거기 서!”

드물게 언성을 높인 황제가 달리기 시작했다.

아빠가 재빨리 나를 안고 황제의 뒤를 쫓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위험하다.”

누가 위험에 빠졌기에 그러는 것이냐고 묻지 못했다. 호박색 눈동자가 맹렬한 포식자의 그것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를 피해서 달아나는 작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토리?”

순간 놀랐다. 얼핏 보기에 비슷해 보여서 아주 찰나지만 토리가 쫓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토리는 아니다.”

하지만 아빠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사냥감을 뒤쫓는 맹수 같았다.

‘황제 폐하께서 저 다람쥐를 해치시려는 걸까?’

……아닐 거야.

그런 일만큼은 벌어지면 안 된다.

아빠라면 그 상황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부디 그런 일은 없기를.’

황제는 커다란 고목나무 앞에 멈춰 섰다. 그곳이 다람쥐의 안식처인 것 같았다.

‘설마, 진짜?’

기어코 커다란 바위를 밟고 올라선 뒷모습이 보였다.

아빠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으르렁, 목울대를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리챠드가 다페 남작과 시비가 붙었을 때처럼 검은 아우라가 피어올랐다.

“아빠, 안 돼요.”

“죄 없는 동물을 해치는 꼴은 그냥 못 넘긴다.”

핏대가 선 주먹 위에 손을 얹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아빠의 팔을 부여잡고서 조금이나마 시간을 늦추는 것뿐이었다.

‘폐하. 제발 다람쥐를 해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내가 살수에게 쫓겨서 목숨이 위험했을 때처럼 절실했던 것 같다.

그 염원이 하늘에 닿은 걸까.

“……여기 더 있으니 눈치 보지 않고 새끼한테 먹어도 된다.”

다람쥐랑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닌데.

황제는 무어라 말을 건네듯 중얼거리며 작은 보따리를 다람쥐의 은신처에 넣어 주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어미 다람쥐가 보따리 속 싱싱한 블루베리를 허겁지겁 새끼에게 가져다줬다.

“!”

그 찰나, 나는 아빠의 눈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 * *

이든은 몸의 열기가 급격히 식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공격할 줄로만 알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이기에.

에덴 제국의 황실은 수인족을 배신했을뿐더러, 귀족들이 수인을 포함한 동물들을 핍박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황제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워서 질문했다. 그러자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떠올라서 그랬소.”

“…….”

돌이킬 수 없는 후회.

분명 완벽한 문장은 아니었다.

그런데 발아래로 차츰 생겨나던 검은 아우라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거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늙은 눈동자 속에는 조금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다는 걸 어느 누구보다 이든이 잘 알았다.

‘정말 아버지와 어머니를 배신한 것을 후회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도로 평정심을 되찾은 이든은 황제를 말없이 응시했다. 빤한 시선이 민망했던 황제는 멋쩍게 웃었다.

“라이언하트 부녀야말로 이곳에는 어쩐 일인가?”

“……저희는…….”

이든은 중간에 말을 멈추고서 제 품 안의 딸을 내려다보았다.

겨울 요정 같은 아이.

늘 사랑스러운 파란 눈으로 올려다보는 제 딸이 언젠가 해 줬던 말이 떠올랐다.

[백쟉밈께 기적이 되어 드릴께여.]

그 말이 가슴에 울려 퍼졌다.

돌이켜 보면 딸을 만난 이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영원히 시달릴 것 같았던 악몽이 끝이 났고 불면증이 사라졌다.

예전과 달리, 제법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인간 동료도 생겼다.

무엇보다 웃음을 되찾았다. 삶의 온기를 배웠고 사랑을 배웠다.

정말 루나가 기적이 된 것 같다.

‘그래. 네 말대로 어쩌면.’

지금 이 모든 것이 네가 만들어 낸 기적일지도 모른다.

이든은 미미하게 미소 지으며 황제의 질문에 이어서 답했다.

“……황후 폐하를 추모하기 위해 왔습니다.”

더운 바람이 불어와 부드럽게 뺨 언저리를 맴돌았다.

* * *

거울을 보지 못했지만, 아마 지금 내 표정은 가관이었을 것이다.

‘황후 폐하를 추모하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아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서 놀랐다. 그것도 내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의견이기에 더더욱.

‘이거 그린 라이트로 해석해도 되는 거죠?’

왠지 모를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늘 라이언하트 가문에게는 고마운 일뿐인 것 같군.”

황제가 온화하게 감사를 표했다.

동시에 나는 엘코어 목걸이가 공명하는 것을 느끼고 주변을 살폈다.

‘할아버지?’

근처에서 모습을 찾을 수 없었지만, 반응을 봤을 때 어디에선가 지켜보고 계시는 것 같았다.

‘보고 계셔요, 할아버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엘코어를 손에 꼭 쥐고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듣고 계신 거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는 대화도 잘 들어 주셔야 해요.’

나는 엘코어를 쥔 채로 황제에게 말을 붙였다. 겁쟁이 할아버지가 용기를 낼 수 있게끔 확신을 드리고 싶어서였다.

“폐하. 후회하는 게 있으시면 지금이라도 돌이키시면 되쟈나요.”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구나.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골이 쌓였을 게다.”

“상대방이 사과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쟈나요.”

“……그럴 리가.”

황제의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이것 보세요. 황제 폐하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계셔요.’

어쩌면 정말 예전의 사이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수인과 인간이 공생하던 때로.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고, 든든한 벗이 되어 주던 때로.

그리하여 소중한 이들이 다치지 않을까, 잃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던 그때로.

이유 모를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이번이 졍말 기회일지도 몰라요. 오늘이 더 큰 후회로 남기 전에 기회를 잡으셔요. 폐하께서는 과거가 그리우신 것 아니에여?”

“하지만 너무 세월이 많이 지났다. 또한 사과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전해질 수 없는 곳에 있어.”

“그런 것들은 일단 젖혀 두고, 폐하의 생각은 어떠신뎨요?”

“짐은…….”

엘코어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심장을 쥐고 있기라도 한 걸까?

목걸이를 쥔 손을 타고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곧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나무 뒤에 숨어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들으셨죠?’

【…….】

여전히 묵묵부답이셨다.

그러나 수풀 사이로 전해지는 부드러운 바람의 흔들림이 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인지를 전해 주었다.

‘이번에야말로 감정의 골이 메워질지도 모르겠어.’

이제 황제의 진심이 담긴 고백이 나온다면!

나는 달싹이며 서서히 벌어지는 황제의 입술에 집중했다.

“만약 짐의 말이 전해질 수만 있다면,”

……있다면?

다음 이어질 말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수풀이 흔들렸다.

“!”

대화는 중도에 끊겼고 우리의 시선이 한곳으로 응집됐다.

‘뭐지?’

수풀 너머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떨어진 나뭇가지가 우지끈 짓밟혀 부서졌다. 소리로 추측했을 때 무게가 꽤 나가는 생물체 같았다.

“꾸이이익!”

“멧돼지?”

동물의 울음소리로 정체를 알아차린 황제가 표정을 굳혔다.

“이런. 라이언하트 백작, 아이가 있으니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게 나을 것 같소.”

“폐하. 잠깐만요. 하시려던 말씀은 끝까지 해 주셔야져.”

“라이언하트 영애. 일단 위험하니 이곳을 벗어나는 게 먼저다. 내게 유인용 미끼가 있으니 백작은 영애를 데리고 먼저 나가시게.”

“녜?”

얼떨결에 황제에게 등 떠밀린 아빠는 나를 안고 빠르게 황제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아빠, 폐하는 두고 가시게여?”

“걱정할 건 없다.”

“하지만 저렇게 뒀다가 위험해지시면 어떡해여!”

못해도 족히 100kg는 나가 보이던데!

황제가 말한 유인용 미끼인지 뭔지의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다만, 잘못 들이받았다간 뼈가 작살날 것 같았다.

“딴 건 몰라도 아빠가 동물의 왕이쟈나요!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대도.”

우려하는 나와 달리 아빠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으신 걸까?

아니면 실은 이런 식으로 복수를 꿈꾸시는 거 아니야?

내가 자꾸만 초조하게 뒤를 힐끔거리자, 아빠는 볼을 콕, 손가락으로 찍으며 덧붙였다.

“걱정할 필요 없다. 아버지께서 계시니까.”

“할부지가여?”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황제가 있는 방향에서 더운 바람이 훅 불어왔다.

‘이건!’

자연의 바람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만들어 낸 바람이었다. 몇 차례 경험해 본 바가 있어서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꾸익!

멧돼지의 울음소리가 숲속을 메아리쳤다.

돌아보니, 커다란 멧돼지가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그 바로 아래로는 황제가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고, 할아버지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

“거봐. 걱정할 것 없대도.”

정말 할아버지가 도와주신 거야?

놀란 나와는 달리 아빠는 태연했다. 마치 이러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빠는 할아버지가 도와쥬실 줄 알았어요?”

“예전부터 정이 하도 많아 어머니께 잔소리를 들으셨던 분이니까.”

추억에 젖은 아빠의 얼굴 위로 미소가 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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