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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125/142)

125화

작은 소동이 정리된 후.

황제는 우리에게 저녁 식사를 함께할 것을 권했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고, 얼떨결에 아빠와 할아버지는 나를 따라왔다.

나란히 식탁에 앉았다.

“임의대로 고른 식당인데 그대들의 입맛에 맞을까 걱정되는군.”

“괜챠나요. 뭐든지 잘 먹는 씩씩한 아가거든요!”

내 힘찬 대답에 황제가 메뉴판을 펼쳤다.

“혹, 벽화의 요정께서도 일반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먹지 않네만.】

“그럼 이걸 어쩐다.”

【난 신경 안 써도 되니. 내 손ㄴ……, 아니. 라이언하트 영애에게 맞춰서 시키면 되오.】

늘 정신없이 둥둥 떠다니시던 분이 오늘따라 차분히 의자에 앉아 계시니 정말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아이의 취향에 맞는 메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이 집의 대표 메뉴지.”

【그중에서 베이컨 크림소스를 제일 좋아할 걸세.】

황제가 눈을 끔뻑거렸다.

“베이컨 크림소스 아란치니는 메뉴판에 없는 특별 메뉴인데, 그걸 어찌 알았소?”

【…….】

“주방장이 황후와 내 옛 친우를 위해서 개발한 메뉴인 것을…….”

할아버지는 말실수를 깨닫고서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황제에게는 본 모습이 안 보이고 흐리멍덩한 구름 덩어리로만 보이기에 망정이지.

그가 할아버지의 이목구비를 볼 수 있었더라면 의심을 살 뻔했다.

‘애초에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보셨겠지만.’

당황한 할아버지를 대신해 아빠가 자연스레 대답을 가로챘다.

“저 역시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라이언하트 백작께서도 이 특별 메뉴를 알고 있소? 이런 의리 없는 주방장 같으니라고.”

다행히 황제는 더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마침 주방장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폐하, 오셨군요! 일행과 이리 함께 오신 건 정말 오랜만이십니다.”

“짐에게 할 말은 없는가?”

“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흐음.”

영문도 모르고서 황제에게 눈초리를 받게 된 주방장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아이고. 우리 집 두 남자 덕분에 주방장님이 욕보시네.

나는 왠지 모를 책임감을 가지고서 두 남정네가 벌여 놓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베이컨 크림소스 아란치니로 세 접시 쥬세요!”

“예. 금방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주방장은 냉큼 주방으로 줄행랑쳤다.

이내 적막이 찾아왔다.

“…….”

“…….”

【…….】

세 남자 중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이참. 이대로는 밥 먹기도 전에 체하게 생겼네.

까짓것 어려운 것도 아니니, 내가 나서서 침묵을 깨기로 마음먹었다.

“폐하. 아까 약속했던 얘기 안 해 쥬실 꼬에요?”

“약속?”

‘약속’이라는 단어에 순간 아빠와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두 남자를 오래 지켜봐 온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엄청나게 흥미를 느끼는 눈빛이었다.

“제 질문에 대답 아직 안 해 주셨는뎨.”

“아, 그 질문.”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뒤늦게 잊고 있던 대화를 떠올리신 모양이었다.

[상대방이 사과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쟈나요.]

나에게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폐하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폐하의 생각은 어떠세여? 미안한 상대에게 사과하고 싶으셔요?”

또다시 물었다. 끝맺어지지 않은 대화에 마침표가 필요했다.

그것은 폐하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모든 수인 가족들을 위해서였다.

“만약 짐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고민이 길어지는 듯 황제는 도중에 말을 끊었다. 이내 그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옮겼다.

순간 황제의 시선이 정확히 할아버지에게 향해 있는 것 같은 건, 그저 기분 탓일까?

“그 기회를 잡고 싶구나.”

【…….】

테이블 주변을 감싼 공기가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내 착각이 아니야.’

황제의 두 눈은 할아버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동안의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처음 할아버지를 ‘벽화의 요정’이라고 소개했을 때는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눈빛은…….

빛바랜 졸업사진을 꺼내 보는 것처럼 애틋한 추억에 잠겨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있쟈나요, 폐하. 비밀 하나 말해 드릴께여.”

“짐에게만 말인가?”

“녜. 폐하만 알고 계셔야 해여.”

나는 두 손을 모아 입 옆에 가져다 댔다. 내 옆에 앉은 아빠와 할아버지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우리 쪽으로 귀를 기울이는 게 보였다.

“우리 벽화의 요정님은 최고 멋쨍이라 마음이 바다처럼 넓으셔요. 그래서 제가 잘못이나 실수를 해도 용서해 쥬시거든요.”

“그거야 화가 나려다가도 영애의 귀여움 때문에 사그라드는 게 아닐까 싶다만.”

“아이참,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요. 제 말의 요점은 우리 할아범……이 아니라, 벽화의 요정님은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란 거예요.”

“그 점은 짐도 알고 있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으니.”

황제가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길, 멧돼지에게 미끼용 마도구가 통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도 그런 적은 처음이라 미처 반응을 못 했다. 큰일을 치를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때 요정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식당이 아니라 병원에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크흠……! 뭐, 딱히 도와주려 한 건 아니고 그냥 멧돼지와 놀아 줬을 뿐이오.】

헛기침하며 딴청 부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빠와 닮아 있었다.

‘확실히 많이 유해지셨네.’

마음의 문이 완전히 닫힌 게 아니었다.

희망이 보이니 의욕이 생겼다.

나는 최대한 은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엇보다 친구끼리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고, 토닥토닥해 쥬는 거랬어요. 그쵸, 요정님?”

얼핏 황제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할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는 분명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가족끼리는 서로 토닥토닥해 쥬는 거랬어요. 그쵸, 할부지?]

아빠와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은 계기가 되었던 그 대화를 어찌 잊으실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 주세요.’

간절함을 담아 그를 바라봤다. 잔잔히 흐르는 바람 속에서 할아버지는 찬찬히 입술을 열었다.

【……그럼. 당연한 소리를.】

“들었쬬? 폐하! 들으셨쬬?”

잔뜩 신난 나는 두 손 두 발을 팔랑팔랑 흔들며 우렁차게 외쳤다.

“그래, 짐도 분명히 들었다. 영애의 조언대로…… 그 기회를 반드시 놓치지 않겠다.”

황제의 만면 위로 퍼지는 미소를 보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래요. 상처는 사랑으로 치료하는 거랬어요.’

잘못된 건 돌이키면 된다.

오해는 풀면 되는 것이고 서로의 허물은 덮어 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친구 아닐까?

서툴러도 괜찮고, 다소 시간이 오래 걸려도 괜찮다.

상처뿐인 삶을 돌이킬 수 있는 건 언제나 사랑이라 믿으니까.

“주문하신 아란치니 나왔습니다.”

주방장이 갓 만든 음식을 들고나왔다. 동글동글 뭉친 놓은 주먹밥처럼 생긴 튀김이었다.

“와아아!”

생토마토를 갈아 넣은 소스에 모짜렐라 치즈가 어우러진 향은 환상적이었다.

꼬르륵, 우렁차게 울려 퍼진 배꼽시계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내게 집중됐다.

앗, 눈치 없는 위장 같으니라고.

화끈거리는 뺨을 부여잡고 모르는 척하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영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마음에 든 것 같구려. 백작은 어떻소?”

“괜찮습니다. 예전에 와 본 기억이 있어서.”

“이곳을 말인가?”

황제의 안면에 반가운 기색이 퍼졌다. 아는 이가 드물 것 같은 변두리의 음식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워 보였다.

“아버지와 함께 온 적 있습니다.”

“참 좋은 아버지를 뒀구려.”

【……】

황제의 칭찬에 할아버지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할아버지, 바보.

지금 이곳에서 표정 관리를 못 하는 건 할아버지뿐이었다.

‘황제 폐하에게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천만다행이네요.’

할아버지가 자꾸만 온몸으로 ‘내가 엘베른이요!’ 하고 티 내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 식기 전에 어서 들도록 하지.”

황제가 웃음을 참으며 포크를 먼저 들었다.

* * *

식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온 황제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초승달이 걸린 하늘은 반딧불이가 몰려들어 운치 있게 느껴졌다.

‘……날이 좋군.’

언젠가 오늘처럼 초승달이 뜨는 하늘 아래서 엘베른과 의형제의 결의를 맺었던 때가 떠올랐다.

[저 달이 지지 않는 한, 우리 수인들은 제국의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맹세하지.]

[엘베른 경, 달은 영원히 지지 않네만.]

[……거참, 대충 좀 알아들으시게. 다 큰 사내끼리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는 징그럽지 않은가?]

[하하하, 짐이 눈치가 부족했구려.] 

수인과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달이 오늘은 그에게 용기를 안겨 줬다.

“라이언하트 백작, 그리고 라이언하트 영애.”

황제가 정중히 부녀를 불렀다.

“예, 폐하.”

“녜, 폐하.”

“두 부녀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벽화의 요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만.”

【……나랑 말인가?】

별안간 지목된 엘베른이 깜짝 놀랐다.

“내 오랜 친우가 참 좋아하던 장소가 있는데 거기를 데려가고 싶어서 말이지.”

【그곳에 나를 왜,】

“얼마든지여! 아빠랑은 근처에서 산책하고 있을게여!”

당사자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해 보이는데, 루나와 이든은 냉큼 자리를 피해 주었다.

【하고 싶은 얘기라는 게 무엇이오?】

황제는 잠시 속으로 고민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꼬.’

그대가 나를 멧돼지의 위험으로부터 구했을 때, 그대의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노라고.

고민 끝에 황제는 마음을 정했다.

“달이 뜬 밤이지 않은가.”

【…….】

새하얀 뭉게구름 같은 엘베른이 굳어 버렸다. 다행히 지난날 함께 나눴던 결의를 혼자만 기억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너무 늦어서 염치 없게 보일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네.”

【그 무슨…….】

“미안하오, 엘베른 경.”

이 못나고 부족한 벗을 용서해 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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