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42)

126화

리멤버 데이 이후, 수도 비스를 중심으로 소문이 퍼졌다. 황실과 라이언하트 가문에 관련된 얘기였다.

“아가님 황실에서 수박을 마차 가득 보내왔습니다.”

“녜? 아직 지난번에 보내쥬신 연어도 다 못 먹었는뎨.”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폐하 때문에 식량 창고를 증설해야 할 지경입니다.”

대부분의 소문은 20퍼센트의 진실에 80퍼센트 과장이 보태진다지만, 이번 소문은 반대였다.

“아가님, 황실로부터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녜? 아직 어제 온 편지에 답장 보내지도 않았는뎨.”

“안 그래도 토리 씨가 올해의 격려금으로 도토리를 세 배는 인상해야 할 것 같다 했습니다.”

황제가 라이언하트 가문을 총애한다는 소문의 80퍼센트는 진실이었다.

다음 날, 또 다음 날, 또 그다음 날에도 황실의 마차를 라이언하트 대저택 근처에서 봤다는 목격담이 끊이질 않았다.

벌써 2주째였다.

“아가님, 황실로부터 정찬 초대장이 왔습니다.”

“……또요?”

“엘베른 님께서는 이미 먼저 출발하셨습니다.”

“정찬 시간이 언제인뎨요?”

“방금 점심 식사를 마치셨으니까, 지금으로부터 5시간 뒤죠.”

아니, 이렇게 죽고도 못 사실 거면 그동안 정말 어떻게 참으셨대?

할아버지는 2주 동안 꾸준히 황제와 독대했다.

몇십 년만의 재회였으니 이해는 한다. 그간 소통의 부재 때문에 쌓였던 원망과 오해를 충분히 풀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시간은 아직 여유로우니까 외출 준비는 조금 미뤄 두고, 우리는 환영 준비를 시작해 볼까요?”

“누가 또 와여?”

“오늘이 피헨느 씨가 퇴원하는 날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츄르 상점과 릴까스 가게에 폭발이 있었던 날로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달리 말해, 리챠드의 야근도 한 달째란 소리였다.

“드디어 야근의 늪도 끝이군요.”

그가 짙어진 눈 밑을 꾹꾹 누르며 내게 물었다.

“퇴원 축하 선물은 어떤 걸로 준비하는 게 좋을까요?”

* * *

분주히 피헨느 퇴원 축하 준비를 했다. 아빠에게 허락을 받고서 뒤뜰 정원에서 예쁜 꽃을 꺾어 나름대로 미니 꽃다발도 만들어 놓았다.

“피헨느가 죠아할까요?”

“그럼요. 아가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것이니 당연할 겁니다.”

사실 나는 꽃만 골랐다뿐이지, 포장지로 꽃다발을 만들어 리본까지 묶어 준 것은 모두 리챠드였다. 손재주가 좋은 그 덕분에 제법 예쁜 꽃다발이 완성됐다.

“이제 들어가서 좀 쉬실래요?”

“곧 도착할 시간 아닙니까. 집사로서 제가 마중 나가야지요.”

얼굴 가득 ‘피곤’을 써서 붙여 놓고도 그는 나를 혼자 두지 않으려 했다.

‘저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아무리 그가 체력 넘치는 강아지 수인이라고 하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피헨느와 프로스트 남작, 둘 중 한 명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두 명의 몫을 해내려고 했으니 얼마나 정신없었겠어?’

요즘 들어 부쩍 장난기가 줄어든 것이 피곤함의 증거였다.

리챠드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내가 봤을 때는 그에게 잠시 숨 돌릴 틈이 필요해 보였다.

“한 달 동안 고생 많으셨써요.”

“아가님께서 알아주시니 묵은 피로가 절로 가시는 기분입니다.”

“아빠한테 휴가를 달라고 해 보까여?”

그는 일부러 씩씩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우리 각하를 두고 제가 어찌 쉬겠습니까?”

“그래도. 리챠드 그동안 너무 고생 많으셨는뎨.”

“그럼 그간의 노고를 치사하는 상을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내가 상으로 줄 만한 게 있던가?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 머리를 굴리던 나는 퍼뜩 무언가 깨달았다.

“이거 혹쉬……, 봉급 인상해 달라는 시그널이에요?”

“그럴 리가요. 제가 금전적인 욕심이 없는 편인지라.”

휴가도 괜찮다 하고, 봉급 인상도 생각 없다 하면 대체 뭘 줘야 하는 걸까?

나름 심각한 고민에 빠진 나를 보고 리챠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는 이걸로도 충분합니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서 나를 끌어안았다. 아빠의 품에 안길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각하께서 보신다면 난리가 나겠지만요.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인 겁니다, 아가님.”

“응, 비밀!”

뺨 위로 간질간질한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 순간 강아지의 모습으로 수인화 한 리챠드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피헨느 씨 오기 전까지 산책하고 있을까여?”

“산책! 너무 좋습니다!”

나는 꼬리콥터가 발동한 리챠드와 함께 저택 밖으로 나섰다.

폴폴폴.

햇빛이 유난해서 그런가. 리챠드가 걸을 때마다 금빛 털이 휘날리는 게 오늘따라 더 잘 보였다.

‘벌써 털갈이 시기인가?’

내가 알기로는 강아지들은 봄, 가을에 털갈이를 하는데.

워낙 장모 골든 레트리버라서 그런지 털 빠짐이 장난 아니었다. 어느 정도냐면, 변신 풀었을 때 탈모가 아닌 게 신기할 지경이랄까?

‘떨어지는 털을 모아서 뭉치면 토리 한 마리 뚝딱 만들겠네.’

나는 신이 나서 먼저 앞으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가, 한 번씩 멈춰 서서 뒤를 휙, 휙, 돌아보는 리챠드 뒤를 뽈뽈뽈 쫓아갔다.

‘조만간 털갈이 대비도 해야겠어.’

생각에 잠긴 채 저택을 두어 바퀴 돌았을 즘이었다.

마차 한 대가 저택 앞에 멈췄다.

이내 마차 문이 열리고 피헨느가 두 손 가득 짐 가방을 들고 내렸다.

“아가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피헨느!”

나는 그녀에게 포르르 달려가 안겼다. 나를 안아 줄 손이 없었던 그녀는 냉큼 짐 가방을 흙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나와서 기다리실 줄 알았다면 마차를 타고 오는 게 아니라 날아올 걸 그랬습니다.”

“얼마 안 기다렸써요.”

“그래도 더위를 먹고 쓰러지시면 어떡합니까.”

“그 정도로 약하지 않아요. 아직 한여름도 아닌뎨.”

“우리 아가님께서는 작고 소중하시니까요.”

이럴 때 보면 피헨느도 한 호들갑 하는 것 같았다.

‘라이언하트 식구들은 나를 설탕 조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니까.’

괜히 낯부끄러워진 나는 대화 주제를 슬쩍 바꿨다.

“피헨느, 퇴원 축하해여!”

“너무 예쁜 꽃다발입니다.”

준비한 꽃다발을 내미니, 피헨느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퇴원 선물이에여. 리챠드가 도와줬써요.”

“꽃도 포장지도 리본 색도 모두 아가님께서 직접 고르신 겁니다.”

리챠드가 다 만들어 준거면서.

내게 공로를 돌리는 리챠드를 쳐다봤다. 어느 틈에 다시 늠름한 사람 모습으로 변한 리챠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피헨느의 짐 가방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아가님.”

헤헤, 반응을 보니 뿌듯했다.

피헨느는 꽃향기를 맡으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모습을 프로스트 씨가 보셨으면 또 반하셨겠네.’

프로스트 남작은 화상 치료가 아직 남아 있어서 피헨느와 함께 퇴원하지 못했다.

편지로 전해 듣길, 피헨느가 함께 퇴원하겠다고 고집부리는 그를 달래느라 혼났다고 했다. 그녀가 종종 병문안을 와 주기로 약속 도장 찍고 나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나 뭐라나.

아무튼 간에 귀여운 한 쌍이었다.

“햇볕이 강합니다. 못다 한 이야기는 저택으로 들어가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짐은 이리 주시면 됩니다.”

피헨느의 짐 가방을 들고 앞장서는 리챠드를 뒤따랐다. 그가 이끄는 대로 응접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동안의 근황에 관한 얘기를 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그 배후는 잡았습니까? 아가님께서 다치지는 않았고요?”

피헨느에게 스트리트 3가에 있었던 일을 말해 주니, 아니나 다를까 곧장 반응이 돌아왔다.

“당연히 갚아 줄 준비는 완벽히 해놨쬬. 폴이 피헨느의 인터뷰만 있으면 당장 신문에 공론화 할 수 있대여.” 

“다친 곳은요?”

“피헨느가 없는 동안 웨인투르 씨가 호위해 줘서 괜챠나써요.”

“다행입니다.”

한숨을 돌린 피헨느가 비장한 얼굴로 덧붙였다.

“인터뷰는 오늘 바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바로여? 피곤하지 않아요?”

“그것도 벌써 한 달 전 일이지 않습니까. 정의 구현은 질질 끌지 않고 바로 해 줘야 하는 법이죠.”

그녀가 싱긋 웃으며 폴에게 연락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역시 우리 언니 화끈하다니까.’

덩달아 의욕이 솟은 나는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투지를 불태우는 우리 앞으로 포도 주스가 담긴 잔을 내려놓으며 리챠드가 끼어들었다.

“두 분 대화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어째 피헨느 씨의 짐이 입원하실 때보다 배로 는 것 같은데, 제 기분 탓입니까?”

리챠드의 시선이 소파 옆에 가지런히 놓인 짐 가방에 닿자, 피헨느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아, 돌아오는 길에 아가님께 드릴 선물을 사 왔습니다.”

“제 선물이여?”

“저 멀리 동쪽 끝에 붙은 반도 나라에서 산 넘고 바다 건너온 물건이라는데…… 아가님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수줍게 내민 건 얼핏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신발이었다.

“예쁜 신발이로군요.”

“평범한 신발이 아닙니다.”

“혹 비밀이라도 있는 겁니까?”

리챠드가 귀를 쫑긋 세우고 호기심을 가졌다.

“이 신발은 전방 300m 밖에서도 잃어버린 아기를 찾을 수 있다는 마법의 신발이라 합니다.”

“호오.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오랜만에 리챠드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일단 보시면 압니다. 신겨 드리겠습니다, 아가님.”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서 내 신발을 바꿔 신겨 주었다.

“자, 이제 걸어보세요.”

그녀가 소파에 앉은 나를 바닥에 내려주었고 내 발이 땅에 닫자마자,

삑!

신발에서 잠들어 있던 본능을 건드리는 익숙한 소리와 함께 신발 밑창에서 현란한 불빛이 번쩍였다.

이건…….

혹시 내 눈과 귀가 잘못된 건가 싶어서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삑삑!

내 발걸음에 맞춰 신발에서 삑삑 소리가 났다.

‘말도 안 돼. 삑삑이 신발이 갑자기 여기서 왜 튀어나와?’

K-육아 용품과의 조우에 나는 그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성이 마비되고 말았다.

삑삑삑삑삑삑!

내가 우다다 뛰기 시작하자, 응접실 안은 삑삑이 소리와 요란한 불빛으로 가득 찼다.

“세상에, 대체 저 마성의 물건은 뭐랍니까.”

언제 변신이 풀린 건지.

다시 강아지 모습이 된 리챠드가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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