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42/142)

127화

세상에 삑삑이 신발을 신고도 얌전할 수 있는 아기가 몇이나 될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삑삑삑삑삑삑삑삑!

잔뜩 신이 나서 달리는 내 뒤로 대형 강아지가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리챠드는 나보다 두 배는 더 들떠 보였다. 연노란빛 귀가 팔랑팔랑 흔들리다가 발라당 뒤집힌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무아지경인 우리의 모습에 피헨느가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에 드십니까?”

“녜! 엄청 엄청 엄청요! 피헨느 최고!”

오랜만에 아이처럼 실컷 뛰놀아서 그런지 기분도 끝내주게 좋았다.

삑! 삑! 삑! 삑!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뛸 때마다 소리가 나는 삑삑이 신발은 정말이지 짜릿했다.

한바탕 즐긴 뒤, 흥분을 가라앉히려 시선을 돌렸는데.

‘어라?’

흥에 취한 리챠드가 삑삑이 소리에 맞춰 궁둥이를 들썩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거 어쩌면…….’

문득 좋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피헨느, 혹쉬 이거 똑같은 걸로 또 구해 쥴 수 있을까요?”

“몇 개나 필요하십니까?”

피헨느가 주섬주섬 짐 가방을 가져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원하는 디자인으로 골라 보세요.”

대체 몇 개를 사 왔기에 골라 보라는 걸까?

아무 생각 없이 가방 속을 들여다본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세상에! 가방 안의 짐이 모두 삑삑이 신발일 줄이야!’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피헨느 역시 루나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라이언하트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을 말이다.

대체 얼마를 쓴 거람.

먼 나라의 수입품이라 한 켤레만 해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을 텐데.

커다란 짐 가방 두 개를 가득 채운 신발은 족히 50 켤레는 넘어 보였다.

“뭐 이렇게 많이 샀써요?”

“아, 가게에 있는 것을 모두 쓸어 담았습니다.”

피헨느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가는 금방 금방 큰다구여.”

“비스에서 똑같은 걸 신는 아기가 있다면 아가님과 헷갈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헷갈림 방지를 위해서 젼부 싹쓸이해 온 거예요?”

“혹시 몰라서 앞으로 나올 신상품도 미리 예약해 두었습니다.”

……맙소사.

나는 이마를 탁 부여잡았다.

‘당장 내년만 돼도 내가 훌쩍 커 버려서 못 신게 될 것 같은데.’

너무나도 해맑게 플렉스 해 버렸다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괜히 아빠의 곁에서 오랫동안 일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고마워요, 피헨느.”

“별말씀을요.”

“한 개만 조금 개조해도 되져?”

“물론이죠. 모두 아가님의 것이니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무엇을 만드시려고요?”

“피헨느랑 프로스트 씨가 없는 동안 고생한 리챠드에게 선물을 하나 하려구여.”

아래로 축 늘어진 리챠드의 귀가 뒤로 획 젖혀져서 물개처럼 보였다.

“제게 선물을요?”

“녜. 기대해도 죠아요. 최고의 선물일 테니까.”

나는 으흥흥, 웃으며 장담했다.

* * *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

삑-뽁!

라이언하트 저택의 집무실에 장난감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삑-뽁! 삑-뽁!

아까부터 심기 불편한 얼굴로 리차드를 노려보고 있던 아빠가 30분 만에 입을 열었다.

“리챠드. 입에 물고 있는 건 뭐지?”

“이 장난감 공 말입니까?”

“그래.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그 공.”

“선물받은 장난감입니다.”

삑-뽁!

입이 귀에 걸에 걸린 커다란 댕댕이, 리챠드가 삑삑이 장난감을 마구마구 물기 시작했다.

삑-뽁! 삑-뽁! 삑-뽁! 삑-뽁!

요란한 소리를 견디다 못한 아빠가 인상을 쓰며 귀를 틀어막았다.

“대체 왜 그런 걸 선물한 건지 모르겠군, 쓸데없이.”

“아가님께서 주신 겁니다만.”

“…….”

아빠의 복슬복슬한 앞발이 툭, 떨어졌다.

“루나가?”

“네. 아가님께서요.”

삑-뽁!

리챠드는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으며 삑삑이 장난감으로 소리를 냈다.

마치 ‘어디 한 번 더 뭐라고 해 보시죠?’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하여튼 간에, 우리 사자님을 놀리는 데는 리챠드가 1인자라니까.

“……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예술품을 보는 것 같다는 뜻이었다.”

“분명 쓸데없다고 하셨던 것 같,”

“리챠드.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해 봐. 네 관은 직접 골라 줄 테니까.”

으르렁 섞인 경고에 리챠드의 입이 다물렸다.

삑-뽁!

개구쟁이 리챠드를 제압한 아빠는 내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루나 아빠 말은…….”

덩치가 산만 한 사자가 네 살짜리 딸의 눈치를 살피며 진땀을 뺐다.

이럴 때 보면 사자가 아니라 개냥이 같았다.

“전 괜챠나요.”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녜. 걱정하시지 말래도. 그것보다, 두 분 계속 그렇게 있으실 거예여?”

나는 수인의 모습으로 변신해 있는 아빠와 리챠드를 번갈아 봤다.

7월 중하순으로 넘어가서 그런가.

두 남자에게는 푹푹 찌는 한여름 날씨가 버거운 모양이다.

요즘 들어 저택에 있을 때는 지금처럼 수인화한 상태로 소파며 의자를 뒤로하고, 대리석 바닥에 흐물흐물 늘어져 있었다.

“거기가 시원한 건 알지만, 슬슬 변신해야 하지 않겠어요? 곧 황제 폐하께서 오시는뎨.”

오늘 정오에 황제가 라이언하트 저택에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며칠 전, 할아버지가 그를 오찬에 초대했다나 뭐라나.

그 덕에 두 남자는 시원한 대리석 바닥에서 벗어나 사람으로 변신해 예의를 갖춘 정복을 차려입어야 했다.

“여름 동안에는 아버지를 황실에 맡겨 두고 싶다는 생각이 물씬 드는군.”

삐이익- 뽀옥…….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삑삑이 장난감의 소리가 아빠의 말에 동의를 표하는 듯했다.

“얼른요. 시간 없써여.”

나는 슬라임처럼 바닥에 푹 퍼져 있는 두 남자를 겨우 일으켜 세워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시켰다.

이 날씨에 슈트를 입어야 하는 게 안쓰러웠지만, 달리 방법은 없었다.

수인화한 모습으로 황제를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황실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외출복 차림의 피헨느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벌써요?”

“엘베른 님께서 마중 나와 계시니, 천천히 환복하시고 나가 보시면 될 듯합니다.”

“피헨느는 프로스트 씨 병문안 다녀오실 거져?”

“네. 잠시 외출하는 동안에는 웨인투르 씨에게 아가님의 호위를 맡겨 두었습니다.”

“아빠랑 리챠드도 같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죠심히 다녀오세요.”

과일 바구니를 든 피헨느가 병문안을 위해 떠났고, 나는 서둘러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서는 할아버지와 황제가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혹 내가 두 사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할까 싶어서 문 앞에서 귀를 대고 대화를 슬쩍 엿들었다.

“기억하는가? 황후와 라리엘 부인이 우리 몰래 약속했던 일 말일세.”

【기억하고말고. 아들과 딸을 낳으면 사돈 맺자고 했었지.】

“요즘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네. 정말 우리가 사돈을 맺었다면, 자네 핑계로 가끔 정무를 빼먹으면서 놀러 갔을 텐데, 하는 생각.”

【황제가 놀 궁리만 한다는 걸 제국민들이 알아야 할 텐데.】

“허허허허! 자네도 심심치 않을 테니 좋지 않은가?”

【징그럽게 시커먼 사내를 매일 보아 무엇에 써먹으라고. 내 부인과 보낼 시간도 없어서 아까웠을 것이오.】

농담조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둘 사이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멤버 데이 때에 비하면 확실히 관계가 호전된 것 같았으니까.

황제가 사과를 했던 당시에는 오랜 시간의 공백 때문인지 어색한 기류가 흘렀는데…….

이제는 절친이 따로 없으셨다.

‘두 분이서 2주 내내 거의 붙어있다시피 하시더니, 부쩍 사이가 좋아 보이시네.’

여하간 좋은 의미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똑똑.

노크로 방문을 알리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제국의 지고하신 태양, 황졔 폐하를 뵙슴미다.”

“영애는 오늘도 사랑스럽구나.”

“폐하께서도 여전히 멋지셔여.”

살포시 치맛자락 끝을 잡고 황제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허허허! 우리 아기 영애님의 화술이 벌써부터 범상치 않군, 그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할아버지의 옆으로 쪼르르 가서 앉았다.

그런데 어째, 할아버지는 뚱한 표정이셨다.

【이 할애비는?】

“녜?”

【할애비한테는 할 말 없느냐?】

“으음…… 오늘따라 더 하얗게 보이시네여……?”

나름 고민 끝에 꺼낸 말이었는데.

원하던 대답이 아닌 모양이다.

【되었다. 되었어.】

앗, 삐지신 건가.

【삐지긴. 사내대장부가 그런 걸 신경 쓴다고. 】

그렇다고 우기기에는 삐쭉 튀어나온 입술이 자기주장 투철해 보이는데.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황제가 기어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엘베른 경. 예전에는 자식이 생겨도 짐처럼은 안 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더니만, 이제는 자네가 영락없는 팔불출이 다 됐네, 그려.”

【그만 웃고 본론이나 꺼내시게. 오늘 내 손녀님께 전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양 뺨이 붉어진 할아버지가 소파 아래로 반쯤 뚫고 내려가며, 화두를 돌렸다.

“그래, 잡담은 이쯤하고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할아버지와 농담을 주고받을 때와 달리, 황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지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엘베른 경을 통해 짐과 경 사이에서 과거에 오해가 있었다는 것은 전해 들었는가?”

“녜. 대신전과 세도가가 손을 잡고 작당해서 폐하가 모르는 사이에 일을 꾸민 거라면서여?”

“그래. 지난번 영애가 황실을 방문해 주었을 때, 엘코어를 통해서 엘베른 경과 함께 진실을 알게 됐지.”

내가 예전에 엘코어를 통해 아빠의 과거를 보았듯, 이번에는 엘코어가 할아버지와 황제에게 과거의 진실을 보여 주었다고 했다.

“그들이 한 짓을…… 짐은 결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다.”

둘 사이를 이간질한 것.

이간질을 위해 황후의 묘비를 훼손시킨 것.

그리고 몇십 년 동안 황제를 속인 것으로도 모자라, 죄 없는 수인과 동물을 학대한 것.

그 모든 악랄한 행위들이 황제를 분노케 했다. 꽉 틀어쥔 주먹 위로 핏줄이 시퍼렇게 서는 것이 보였다.

“하여 그들에게 죗값을 물으려고 한다.”

나는 황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금방 알아차렸다.

“제 도움이 필요하신 거죠?”

“스트리트 3가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서는 엘베른 경에게 전해 들었다. 곧 다페 남작가에 관한 일을 폭로할 거라지?”

“녜. 신문 기사는 다 준비해 뒀어요. 이번 주 내로 나올 꼬에요.”

“그에 맞춰서 함께 낼 기삿거리를 제공할까 하는데.”

이채가 도는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짐은 황후의 묘비를 훼손하는 데 앞장섰던 리아노 공작가의 작위를 격하시킬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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