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리아노 공작가의 작위 격하.
단순히 떠보려고 꺼낸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분노로 타오르는 눈빛 속에서 진심이 읽혔다.
“귀족들의 반발이 있을 꼬에요.”
나는 생각이 깊어졌다.
근래 리아노 공작가의 평판이 아무리 떨어졌다고 한들, 지지 세력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아무런 명분 없이 ‘작위 격하’를 공표한다면 많은 반발이 따를 터.
‘황제 폐하께서 이를 모르진 않으실 텐데…….’
믿는 구석이라도 있으신 걸까?
“지난 2주간 엘베른 경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특히 황후의 묘비 훼손에 관한 기록은 아예 날조되었더군.”
“배후가 따로 있었댜는 얘기죠?”
【당시 상황이 기록된 사건 보고서를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도 정도가 있지.】
잠자코 듣고 있던 할아버지가 으르렁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건 보고서라면, 황실 서기관이 공식적으로 기록한 거쟈나요.”
【그래. 아주 작정들 하고 거짓을 지껄여 놨더군. 해서 지난 2주 동안 과거 사건에 대해 재조사를 했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같이 만나는 두 남자를 보며, ‘그동안은 서로 떨어져서 어떻게 살았나 몰라’ 하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런 중요한 일을 계획하고 계셨다니.’
새삼스럽게 두 분의 뒤에서 후광이 느껴졌다.
“리아노 공작이 엘베른 경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황후의 묘비를 훼손시켰다는 증거를 찾았다.”
“그것을 빌미로 작위 격하를 하시겠댜는 거네요. 아무리 기세 높은 고위 귀족이라고 해도, 황후 폐하의 묘비를 건든 죄는 엄중하니까여.”
“그러하다. 분명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무작정 가신들을 동원해 무죄를 종용하려 들 것이다.”
귀족들이 하는 짓이야 뻔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쪽수로 밀어붙이기’는 고전적인 수법이니까.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귀족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껍데기뿐인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황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근본적인 이유를 알았다.
“그러니, 폐하에게는 라이언하트 가문의 지지가 필요하신 거죠?”
“짐의 의도를 알고 있는가?”
“세도가 세력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있으니 폐하의 손을 잡을 리가 없고, 그렇다고 지방 세력들을 택하쟈니 힘이 미약하쟈나요.”
“그래. 신흥 세력은 늘 있었으나, 항상 둘 중 하나였지. 세도가에게 물들어 버리거나, 세도가에 의해 없어져 버리거나.”
“세도가에 굴복하지도 않고, 맞설 힘까지 있는 가문이 폐하를 지지한다고 나서면, 선뜻 반발하고 나서지는 못할 꼬에요.”
“거기까지 앞서 내다보다니. 역시 라이언하트 영애는 영리하구나.”
황제는 평범한 아이의 수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도 알아듣는 나를 보며 새삼 감탄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누구의 손녀님인데 말이야.】
“하긴, 경의 부인은 몹시 현명한 여인이었지. 경을 닮았으면 큰일 날 뻔했을 텐데 말일세.”
【뭐라 했는가? 날 닮은 게 어때서!】
“하하하! 농일세, 농.”
황제는 그새를 못 참고 팔불출처럼 손녀 자랑을 늘어놓는 할아버지를 놀리며 낄낄거렸다.
참……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동네 이웃 할아버지들 같았다.
누가 이 두 사람을 황제와 전(前) 수인족 우두머리라고 볼까?
“라이언하트 가문에서 잘 고려해 보고 뜻을 정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컷 할아버지를 놀려 먹은 황제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확실히 황제는 노련한 책략가였다. 이런 부탁을 라이언하트 가문의 가주인 아빠가 아니라, 나에게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가문의 실질적인 중심이 나라는 걸 알고 계시는 거지.’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옳다.
나의 아빠, 나의 이든은 내 말이라면 끔뻑 죽는시늉도 할 남자였다.
내가 황제와 뜻을 같이하자고 정한다면 기꺼이 따를 터였다.
무엇보다 복수해야 할 대상이 같으니,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죠아요. 폐하께 힘을 실어 드릴게여.”
“정말인가?”
화색이 도는 황제를 보며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었다.
【거봐, 내 손녀님께서는 의리가 있다니까.】
“그래. 의리는 엘베른 경, 자네를 똑 닮았군그래.”
【당연하지. 내 손녀님 아닌가!】
할아버지는 두 어깨에 잔뜩 힘을 싣고 으쓱거렸다.
“폐하, 그 대신에 저도 한 가지 청할 게 있어여.”
“내 라이언하트 영애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어서 말해 보거라.”
나는 으흥흥, 웃으며 황제에게 속삭였다.
“……들어주실 수 있으셔여?”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 약조했으니 물론이다. 한데, 의외로구나. 보통 이런 기회가 있으면 땅덩이나 작위를 달라고들 하던데.”
그저 말없이 생긋 웃었다.
폐하도, 참. 전 평범한 아기가 아니잖아요.
* * *
황제가 라이언하트 저택에 다녀간 날로부터 나흘 후.
신문에 대서특필이 보도되었다.
파장이 큰 기삿거리였기에 세간의 관심은 엄청났다.
루나 신문
제국력 1537년 7월 17일
✒ [속보] 황실, “리아노 공작가 작위 격하” 공표…… 황후 폐하 묘비 훼손 혐의로 체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