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같은 시각, 에덴 제국의 황궁 역시 담을 넘어 온 소문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느 가문에 줄을 서는가에 따라서 목숨이 좌지우지되기 쉬운 곳이니, 더욱 유난인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내 듣기로는 작위 격하는 거의 확정이라고 하던 것 같은데.”
“그거야 내일모레, 국무회의 때 보면 알겠지. 참석하지 않으면 그대로 버려진 패가 되었단 소리 아니겠는가?”
“정말 폐하께서 각하를 쳐 내실까? 그럼 궁의 대부분이 갈려 나갈 터인데.”
“자네도 얼른 라이언하트 저택에 편지라도 보내게. 동궁 쪽 이들은 이미 어제 싹 다 보냈다니까.”
“뭐? 그런 건 진즉 말해 주지 그랬나!”
궁인들은 사색이 되어서 저마다 라이언하트 백작가에 보낼 발 빠른 전령을 찾으러 흩어졌다.
‘루나가 제대로 한 방 먹였네.’
마침 초대를 받고 입궁한 노아는 황궁인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나의 루나라니까.
언제나 상상 이상의 결과를 이뤄내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모든 것이 루나의 말 대로네.’
지난주, 그녀에게 받은 편지의 내용이 문득 생각났다.
<곧 작전을 시작할 꼬야.
입양될 때 갔던 관공서 기억나지?
일요일 전까지 그곳에 가서 파양 신청서를 제출해. 반드시 리아노 공쟉 몰래 가야 해.>
노아는 편지를 받은 즉시 움직였다.
비밀리에 접수된 파양 신청서는 바로 어젯밤, 정식 허가가 떨어졌다.
이제 더 이상 노아의 이름 뒤에 ‘리아노’의 성은 붙지 않게 됐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오늘 새벽, 리아노 공작가에 관한 비리 기사가 터졌다.
정말 간발의 차였다.
‘루나는 이 모든 것을 미리 계산하고 있었던 걸까?’
미리 귀띔 주지 않았더라면 ‘리아노’의 성을 쓰는 노아 또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작과 함께 잡혀갔거나, 저택 내에서 근신해 있어야 했겠지.’
절대로 지금처럼 멀쩡히 돌아다닐 수 없을 터였다.
그랬기에 노아를 지나쳐 가는 황궁인들이 그를 힐끗힐끗 곁눈질하기 바빴다.
“……저분은 리아노 가문의 후계자가 아닙니까?”
“그분이 어찌 황궁에…….”
생략된 말은 저들끼리 주고받는 눈짓에서 다 드러났다.
‘양아버지가 구금되어 있는데 저리 떳떳이 황궁에 출입하다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그러나 노아는 기죽지 않았다.
애초에 몰래 파양 신청을 했으니,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조용히 기쁨을 삼켰다.
지금 이들이 보이는 경악과 적대감이 궁내부에서도 리아노 공작가의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기에.
모든 것이 루나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서 흡족했다.
그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소문에 귀가 밝으신 줄 알았는데, 못 들으셨나 봅니다.”
“또 무슨 소문이 있습니까?”
내심 리아노 가문의 추락을 바라지 않던 이들이 희망이 담긴 눈초리로 물었다.
그들이 리아노 가문의 건재함을 응원하는 이유는 자신들도 줄줄이 엮여 황궁에서 쫓겨나게 될까 봐 두려워서였다.
“오늘 아침부로 파양 신청에 정식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그럼 이제 리아노 공작가의 후계자가 아니라는 것인가?”
그들의 눈이 더 커질 수도 없을 만치 크게 확장됐다.
‘후계자마저도 손을 떼고 갈 정도라고?’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리아노의 이름을 버렸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가문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의 증거였으니까.
“네. 오늘은 리아노의 성을 달고 입궁한 것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손님으로서 이곳에 온 것입니다.”
“화, 황제 폐하의 초청을 받았다고, ……요?”
“더 하실 말씀 없으신 것 같으니, 저는 이만 서둘러 자리를 떠 보겠습니다. 폐하를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 말입니다.”
노아는 딱딱하게 굳은 이들을 뒤로하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알현실 앞에 도달했다.
그제야 생각이 몰려왔다.
‘폐하께서 나를 왜 부른 걸까?’
딱히 짐작 가는 것은 없었다.
‘설마 내가 리아노 공작가의 후계자였다는 걸 빌미로 같이 엮어서 보내려는 생각인 걸까?’
몰래 진행한 파양 신청에 대해서는 황제도 모르고 있을 터이니,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황제라고 한들,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멍청하게 당한다면 루나가 슬퍼할 테니까.’
그는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하고서 알현실 안으로 들어섰다.
“제국의 지고하신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쉽지 않은 발걸음일 텐데, 와 줘서 고맙구나.”
“폐하께서 부르셨으니 당연히 그래야지요. 한데…… 무슨 연유로 저를 부르셨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앉거라.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정말 리아노 공작의 이야기라도 꺼낼 생각인 걸까?
노아는 주변을 살피며 의자에 앉았다.
문지기 외에 무장한 병사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 자신을 잡을 실력자를 잠복시켜 놨을 수도 있으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슈크림 빵을 좋아한다고 들어서 급하게 준비했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구나.”
황제가 종을 울리자 시종이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갑자기 웬 슈크림 빵 타령?’
뜬금없는 대화 주제에 노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나를 방심하게 하려는 작전인가?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해서 기습을 노리려고?
잔뜩 긴장한 노아는 시종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은쟁반을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안에 뭐가 들었을까.
함정 마법?
수면제?
환각 마법?
어떤 술수를 쓰든 간에 빠져나갈 대책은 이곳에 오는 동안 미리 세워 두었다.
여차하면 방어 마법을 사용한 후, 탈출 마법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혹…… 슈크림 빵, 싫어하나?”
잔뜩 날을 세우고 있는 노아에게 황제가 질문을 던졌다.
아니, 슈크림 빵 얘기는 왜 자꾸 꺼내는 거람.
노아는 난데없이 슈크림 빵 집착남이 되어 버린 황제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심각했다.
“이상하군. 분명 좋아하는 거라고 들었는데.”
중얼거리는 혼잣말에서 얼핏 ‘루나’의 이름이 들렸던 것도 같다.
‘황제와의 알현도 루나가 계획해 둔 걸까?’
새롭게 피어난 의문에 익숙한 이름이 섞여 있어서 그런지, 노아의 경계가 조금 허물어졌다.
“이걸 어쩐다. 어째 점수 따기는 글러 버렸구나.”
여전히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긴장이 풀리니 용기가 생겼다.
“폐하.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래. 내 그냥 본론부터 말하도록 하지.”
황제가 은쟁반을 옆으로 밀어 버리고서, 정체 모를 서류를 노아에게 내밀었다.
빠르게 상단에 적힌 문구를 읽어 내린 노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입양 신청서>
……뭐?
거듭 읽어 봐도 제 시력에 이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즈음.
황제가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내 양아들이 되지 않으련?”
* * *
“……피헨느랑 프로스트 남쟉밈이 톰을 입양하기로 했다고요?!”
나도 모르게 언성이 커지고 말았다.
앗차차, 여기 병실이지 참.
뒤늦게 현실을 자각한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피헨느와 프로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대체 언제 결심한 고예요?”
“하하하, 그게 말입니다.”
“아가님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당신은 가만히 누워 있어요.”
피헨느가 몸의 반 이상이 붕대로 칭칭 감긴 프로스트 남작을 도로 침대에 눕혔다.
그 와중에 ‘당신’이라니!
상당히 낯간지러운 호칭이었다.
‘대체 어느 틈에 이렇게 가까워진 거지?’
어쩐지 콧구멍이 벌렁벌렁거리려고 했으나, 나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아까부터 피헨느의 얼굴이 빨개질 대로 빨개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놀렸다가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피헨느가 병실 밖으로 뛰쳐나갈 것 같았다.
“두 분이 톰 오빠를 입양하겠다는 뜻은,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아요?”
“네, 아가님. 저희 둘…… 부부가 되기로 했습니다.”
“졍말요?!”
내심 둘 사이를 몰래 응원하던 나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얌전히 누워 있던 프로스트가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아하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아가님!”
“당신, 내가 죽는다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죠!”
“미안합니다, 부인! 하하하!”
그렇게나 좋을까.
아직 병상 중인 사람이면서도 그의 입꼬리는 귀에 걸려 있었다.
“언제 마음을 굳힌 거예여?”
프로스트 남작이 피헨느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진작 알았다만.
둘이 진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피헨느가 수인이다 보니까, 선을 긋는 것 같았는데.’
수인과 인간의 커플이라니.
사회적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조합이라서 이 둘이 ‘결혼’까지 결심했다는 걸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럼 피헨느가 수인이라는 사실도 프로스트 씨가 아는 걸까?’
혹시 그것을 숨기고서 결혼하려는 건 아닐까 싶어서, 살짝 걱정도 됐다.
먼 훗날 진실이 밝혀지고 난 후, 혹여라도 그녀가 상처받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내 걱정의 눈초리를 읽은 피헨느가 작게 미소 지었다.
“이이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피헨느의 본래 모습도 본 거예여?”
“네. 프로스트 씨가 저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 날. 제 변신이 풀린 모습을 가려 주기 위해 겉옷으로 절 감싸 주느라 전신에 화상을…….”
피헨느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괴로워하자, 프로스트는 부러 씩씩하게 대답을 가로챘다.
“저는 그날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천사가 강림한 줄 알았습니다. 피헨느 씨의 날개가 너무 아리따워서 순간 천사를 본 줄 알았다니까요.”
능글맞게 말하며 피헨느의 어깨를 감싸는 프로스트는 그 누구보다 듬직했다.
“오, 울지 마세요. 피헨느, 당신이 울면 제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는 다정한 눈빛으로 피헨느의 표정을 살피며 그녀를 달랬다.
“의사 말로는 요즘 화상 치료술이 하도 발달해서 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흔적도 없이 멀끔하게 된다잖아요. 그러니, 뚝 해요. 응?”
“……안 울어요. 누가 운다고.”
코끝이 빨개져서 훌쩍거리는 그녀를 사랑스러워 못 견뎌 하는 프로스트를 보고 있다 보니, 나도 문득 누군가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요. 내 여자는 강해서 고작 이런 일로 울지 않죠. 치료가 끝나는 대로 각하에게도 말씀드리고 결혼식을 올리기로 해요.”
“부케는 꼭 우리 아가님이 골라 주신 꽃으로 할 거예요.”
“부인이 좋다면 나도 좋습니다.”
피헨느를 꼬옥 품에 안은 프로스트가 내게 씨익 웃었다.
“아가님의 보육원 식구인 톰도 남부럽지 않게끔 사랑받는 아이로 키우겠습니다.”
“거봐요, 제 말이 맞죠? 제가 프로스트 냠쟉밈은 좋은 아빠가 될 거라고 했쟈나요.”
나는 마음속으로 피헨느와 프로스트, 그리고 톰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