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29/142)

130화

그로부터 며칠 후, 황실의 초대장을 받은 우리 가족은 황궁으로 향했다. 황제와 손을 잡기로 한 이후로 첫 정식 초대여서 기분이 색달랐다.

“폐하께서 소개해 쥬고 싶은 사람이 있다던데, 누구일까요?”

【보나 마나 자랑거리가 생긴 거겠지.】

심드렁한 말투였지만, 이미 몸이 앞서 알현실로 향하는 걸 보면 할아버지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성격 급한 할아버지가 먼저 알현실의 벽을 쑤욱 통과해 들어갔다.

덩그러니 복도에 남겨진 아빠와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엄청 기대되시나 봐여.”

“꼬리가 안 튀어나온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우리도 들어가요, 아빠.”

“그러도록 하지.”

아빠의 손을 잡고 부지런히 알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서부터 진한 커피 향과 함께 달콤한 디저트 냄새가 풍겨 왔다.

“폐하, 라이언하트 백작과 백작 영애가 도착했습니다.”

“들라 하라.”

허락이 떨어지자,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었다.

이윽고 알현실로 총총총 걸어 들어간 나는 반가운 얼굴과 마주했다.

“루나!”

“노아!”

황제의 옆자리에 앉은 노아가 나를 발견하고 표정이 밝아졌다.

‘폐하께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셨구나!’

얼마 전, 황제가 라이언하트 가문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던 날.

내가 황제에게 했던 제안이 떠올랐다.

[폐하, 그 대신에 저도 한 가지 청할 게 있어여.]

[내 라이언하트 영애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어서 말해 보거라.]

그날 내가 청한 것은…….

[노아를 폐하의 양자로 받아 주세요. 리아노 공작가가 심판받을 때, 노아를 보호해 줄 힘이 필요해요.]

[그 아이를 참으로 아끼나 보구나.]

내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이의 안위였다.

그날, 폐하가 나의 부탁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진짜로 받아들여 주실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황실의 후계자를 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폐하, 감사해요!”

“표정을 보아하니 내 며늘아기께서 감동한 모양이구나.”

황제의 맞은편에 앉으려던 아빠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칫했다.

“……지금 누가 며늘아기라는 겁니까?”

【드디어 노망이 난 듯싶구나.】

산 사람처럼 소파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은 할아버지가 덩달아 인상을 팍 썼다.

“내 듣기로는 노아와 약혼을 한 사이라고 들었네만.”

황제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아빠와 할아버지의 시선이 나에게로 날아왔다.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이 할애비 눈에 아직 흙 안 들어갔다!】

이글이글거리는 두 수사자의 눈빛에 얼굴이 뚫릴 것만 같았다.

‘으아아. 이거 완전 밀림의 왕이 아니라, 질투의 왕 사자님들이 따로 없으시네.’

맞은편의 노아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잠깐만, 이거 어째 불안한데…….

아니나 다를까.

노아가 상큼한 미소와 함께 폭탄을 투척해 버렸다.

“저희 이미 반지도 나눠 낀 사이예요.”

“반지……?”

【말도 안 된다!】

아빠와 할아버지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노아는 태연하게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치, 루나? 네가 직접 내 손에 끼워 주기도 했잖아.”

“응?”

“네가 만들어 줬던 거 다 간직하고 있어.”

어라?

이제 보니 그의 열 손가락 빼곡히 끼워져 있는 풀꽃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다름 아닌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것들이었으니까!

“호오. 손가락에 낀 것들이 그 반지로구나.”

지켜보던 황제가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동시에 아빠와 할아버지의 시선이 앞다투어 노아의 열 손가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모두 루나가 만들어 준 거예요. 엄지의 반지는 태어나서 처음 만든 반지, 검지의 것은 루나가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만든 반지. 중지에 낀 반지는…….”

노아는 열 손가락에 낀 반지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동안 두 수사자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이 움찔움찔하는 걸로 봤을 때…….

이미 상상 속에서 두 분은 저 반지들을 향해 냥냥펀치를 날리며 섀도복싱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데, 어찌 아직까지 이리 시들지 않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냐?”

“마법으로 풀꽃의 생명이 지속될 수 있도록 했어요.”

“그 열 개의 반지를 모두?”

“네. 어렵지 않은걸요.”

“호오. 역시 출중한 재능이구나.”

황제가 감탄을 내뱉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계열의 마법 중, 생명력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마법은 높게 평가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군사력을 높이는 기반이 될 수 있으니, 타국에서는 그런 마법사들을 앞다투어 모셔 간다고 들었는데.

‘그런 엄청난 마법을 풀꽃 반지에다가 남발하고 있다니. 이거 재능 낭비 아니냐고요.’

어쩐지 뿌듯한 얼굴로 칭찬을 바라는 듯한 노아를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리 노아가 어디서 이상한 것(?)만 배워 온 걸까.

사실 이미 그 답은 알 것도 같다만…….

나는 충격 먹은 표정으로 바닥에 흐물흐물 녹아내린 할아버지와 불만 가득한 표정의 아빠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황제가 주의를 집중시켰다.

“자, 이제 모두 모였으니 정식으로 소개하지. 앞으로 카일 에덴의 성을 이을 짐의 후계자일세.”

노아 카일 에덴.

이제 새로운 성을 갖게 된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장인어른.”

“…….”

대꾸하지 않고 꾹 다물린 아빠의 입술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지금은 수인화 상태가 아니었지만, 아마 사자의 모습으로 변신해 계셨더라면…….

분명 꼬리를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바닥을 팡팡! 내리치며 불만을 표하셨으리라.

차마 체면 때문에 성질대로는 하지 못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잘 부탁하네.”

황제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아빠에게 악수를 청했다. 마지못해 악수를 받아들인 아빠를 보며 황제는 빙긋 웃으며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황태자 책봉식은 세도가의 세력을 모두 정리한 다음, 올겨울 올릴 생각이네.”

그의 말은 달리 말해서, 올겨울이 오기 전까지 부패한 세도 세력을 모두 내쫓겠다는 뜻이었다.

내가 짜놓은 계획과 얼추 맞았다.

“이번 가을 축제를 기점으로 물갈이를 하면 되게써요.”

“영애가 계획하고 있는 것을 듣고 싶구나.”

“이번에 폐하와 할부지가 찾아낸 증거로 리아노 가문의 작위를 백쟉으로 격하시켜 가세를 꺾어 놓기는 했지만, 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하쟈나요?”

“그렇지. 아직 자금줄이 되어 주는 돈버르레 공작가와 실질적인 행동 대장인 다페 남작가가 건재하니 말이다.”

“좋은 묘수가 이써요.”

황제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짐이 무엇을 도와주면 되는 것이지?”

나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이번에 사냥의 밤 축제를 뿌리 뽑아 버릴 꼬에요.”

“제국의 계절 축제를 말이냐?”

내 포부를 들은 황제의 얼굴은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고 있다.

‘소설 속에서 황제가 세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정치적인 싸움을 했던 장면에서 본 기억이 있어.’

황제도 나름 혼자만의 싸움을 했던 캐릭터이다. 그를 지지해주는 세력이 미미했을 뿐이지, 그는 때마다 ‘계절 축제 폐지’ 안건을 국무회의에 올렸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자신들의 자금줄을 호락호락 포기할 이들이 아니었다.

일대 다수의 몰아붙임에 해당 안건은 매번 통과되지 못했다.

“녜. 폐하께서도 세도 세력과 모리스 대신관이 계절 축제를 이용해서 돈을 모으고, 세력을 확쟝시키시는 건 아시져?”

“알고 있다. 해서 짐도 그 악습을 뿌리 뽑으려고 했으나, 워낙 오랜 시간 고착된 문화이기에 번번이 실패하였지.”

“늘 강압적인 방법으로 폐지하려고 하셨으니 그렇지여.”

“좋은 수가 있느냐?”

기대감으로 차오른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그 속에는 무한한 신뢰도 얼핏 엿보였다.

“사냥의 밤 축제 준비 임원에 저희 가문을 넣어 쥬세요.”

“분명 반대할 텐데?”

“그거야 좋은 협박 거리가 있쬬.”

“협박?”

“녜. 다페 남쟉밈께서 저희한테 큰 빚을 진 적이 있꼬든요.”

으흐흐흥,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황제에게 속닥속닥 작전을 이야기해 줬다.

내 이야기를 듣는 황제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그 작전대로면 충분히 성공하겠어.”

그럼요. 누가 짠 작전인데.

뿌듯하게 웃는 나를 보며 황제는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사람처럼 밝은 얼굴이 되었다.

“그럼 딱딱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오늘 모인 본론을 얘기하는 게 좋겠군.”

으응?

어리둥절해진 나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세도 세력을 몰아내는 작전 회의보다 더 중요한 본론이 있었나?’

의아한 표정은 아빠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한 명씩 찬찬히 훑어보던 황제의 시선은 아직까지 바닥에서 슬라임처럼 붙어 있는 할아버지에게로 향했다.

“내 며늘아기에게 첫 혼수는 뭐로 줄까?”

【우리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대도!】

바닥에 붙어 있던 할아버지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와, 원래 형체를 갖추셨다.

“하하하하, 엘베른 경. 분명 예전에 그리 약조하지 않았던가. 딸과 아들이 태어나게 되면 사돈을 맺자고.”

【그건 그때의 일이고!】

“어허, 설마 한 입으로 두말하려는 건가?”

【정 그 약속을 이루고 싶다면. 내 손녀님이 아니라, 내 아들놈. 그래, 저놈을 며느리로 데려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황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어째. 폐하께서 할아버지를 놀리는 데 진심이신 것 같았다.

“일단 며늘아기의 답부터 들어보세. 무얼 줄꼬?”

알현실 안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내게 분명히 독심술의 능력이 없었음에도 남정네들의 속마음이 읽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랑 결혼자고 싶다고 해, 루나.’

‘이 아빠랑 검은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살고 싶다고 하거라.’

‘내 손녀님이 이 할애비를 잊는 거 아니지?!’

미안하지만 세 분 다 정답이 아닌걸요.

나는 못 말리는 팔불출 3인방을 뒤로하고, 황제에게 대답했다.

“썩어빠진 정재계를 뒤엎어 쥬세요!”

내 우렁찬 대답에 황제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가히 내 며늘아기다운 혼수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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