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황제는 나에게 호언장담했던 혼수 약속을 정말 화끈하게 지켰다.
다음 날이 밝자마자 ‘황실 국무 회의 참여 권한’을 덜컥 우리 가문에게 주신 것이다.
‘생각보다 엄청 화끈하신데?’
그동안은 세도 세력을 중점으로 권한이 있었던지라, 귀족들에게는 다소 파격적인 소식일 터였다.
나는 곧장 계획을 세웠다.
이 일을 기점으로 흐름을 아예 우리 쪽으로 가져올 생각이었다.
“아빠, 오늘 계획 잘 외우셨쬬?”
“외웠다. 에이코 백작 부인을 통해서 귀족들에게 검투장 리모델링 소식을 흘리겠다고 했지?”
“녜. 에이코 부인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워낙 인망이 높은 분이라서, 사람들이 금방 흥미를 가질 꼬에요.”
내가 열심히 설명하는 동안 말없이 내 양 갈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손장난을 치던 아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들이 미끼를 물 때 내가 초대를 하겠다 말하면 되는 건가?”
“맞아요! 잘하실 수 있쬬?”
“상은?”
“녜?”
갑자기 웬 상 타령?
뜬금없는 방향으로 흘러간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자, 아빠는 뚱한 표정이 됐다. 그는 내 양 볼을 아프지 않게 늘리며 툴툴거렸다.
“리챠드한테는 고생했다는 상으로 삑삑이 장난감인지 뭔지를 선물해 줬던 것 같은데.”
“아, 삐삐깅 장냥감 말씀하시능 겅궁낭. (아, 삑삑이 장난감 말씀하시는 거구나.)”
바보 같아진 내 발음을 듣고 조금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아빠는 아까보다 누그러진 표정으로 죄 없는 내 볼을 풀어 주었다.
“이번 작전은 사냥의 밤 축제를 해체시킬 아주 중요한 열쇠라고 하지 않았나?”
“녜. 그동안 수인과 동물들에게 부정적이었던 인식을 바꿔 줄 공간을 만들 거니까여.”
다페 남작가로부터 소유권을 이전받은 ‘검투장’의 리모델링이 얼마 전에 마무리되었다.
나는 폭력적이고 끔찍했던 그곳을 탈바꿈할 계획이었다.
이름하여 동물 치료 센터!
얼핏 평범한 동물병원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르다.
‘우리는 이곳에 사냥의 밤 축제에서 희생양이 될 수인들을 빼돌려 둘 계획이거든!’
축제에 동원되는 수인의 대부분은 다페 남작가가 국경 지대에서 불법으로 잡아 온 이들이다.
때문에 다친 이들이 태반일 터였다.
그들을 치료하고 재활시켜 무사히 가족들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
거기까지가 내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었다.
“네 뜻대로 가능한 소문을 크게 내도록 도와주겠다. 관심 갖는 이들이 많아야지 더 큰 파급력을 가질 테니까.”
역시 우리 아빠가 최고라니까!
활짝 웃으며 그를 안아 주려 했는데, 새끼손가락이 눈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단.”
……으응?
“일이 다 끝나면 나한테도 상을 준다고 약속하도록.”
그가 새끼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삑삑이 장난감 시끄러워서 싫어하시는 거 아니었나?’
그는 결국 내게 거듭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흡족한 표정으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정말 사자님 속은 모르겠다니까.
* * *
내가 아빠와 함께 에이코 백작가의 살롱에 들어서자, 귀족들이 슬그머니 우리에게 몰려들었다.
“라이언하트 백작님, 축하드립니다. 황실 국무회의 참여 권한을 얻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올해 사냥의 밤 축제 준비 임원에 라이언하트도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래저래 축하드릴 일이 많군요.”
대부분 황제파 세력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동안 세력 싸움에 밀려 기를 못 폈던 이들이 여기 다 있네.’
나는 그중 우리의 계획에 도움이 될 만한 가문을 눈여겨보았다.
“이제 슬슬 협력할 가문이 필요하시지 않을까 싶네요.”
아빠는 슬며시 떠보는 귀족들의 말에 크게 대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행히 나를 품에 안고 있는 것으로 짜증을 잘 달래고 계셨다.
“오늘도 역시나 귀여운 아기 영애님과 함께 참석하셨군요.”
“허허허, 그러고 보니 아기 영애님의 짝도 미리 정하셔야 하는 건 아닙니까?”
“그건 너무 이른 일 아니오?”
“가문에 이바지하는 일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
아까부터 열심히 나불거리던 귀족이 말을 멈추었다. 내내 대화에 무관심했던 아빠의 눈빛이 일순간 살벌하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내 앞에서 무슨 소리를 떠들어대든 상관없다. 하나, 내 딸에 관해 함부로 혀를 놀리다간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내 겨, 결례를 범했소.”
분위기가 급격히 싸해져서 곤란해질 찰나, 때마침 에이코 백작 부인이 다가와서 다행이었다.
“라이언하트 영애님, 백작님 두 분 다 와주셨군요.”
“안뇽하세요, 백쟉 부인. 이렇게 멋진 살롱에 초대해 쥬셔서 감사해요.”
“머지않아 황태자비가 될 분께서 살롱을 빛내 주시니 오히려 제가 영광이지요.”
에이코 백작 부인의 인사말에 주변 귀족들이 호기심을 가졌다.
“황태자비라니요?”
“우리 신사분들께서는 소식이 느리시군요. 황제 폐하께서 라이언하트 영애님을 며느리로 삼겠다고 하셨답니다.”
그녀가 발이 넓은 편이라는 것을 듣기는 했다만, 벌써 그 소식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새삼 그녀의 정보력이 놀라웠다.
“그게 참말입니까?”
“영애의 대부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도 얼마 전 일인 것 같은데…… 이번에는 며느리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귀족들의 모습에 에이코 백작 부인이 내게 슬쩍 윙크를 날렸다.
“귀엽고 영특하신 분을 어찌 마다할까요? 제 슬하에 아들이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요.”
“좋게 봐 쥬셔서 감사해요.”
“이리 상냥하시기까지 하니, 단연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실 듯합니다.”
에이코 백작 부인의 칭찬 세례에 왠지 쑥스러워져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꿈틀거리는 눈썹이 내게 불만을 표하는 것 같았다.
“어머……, 백작님께서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지.”
오만상이 된 아빠를 본 에이코 백작 부인이 내게 물었다.
있다마다요.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그녀에게 슬쩍 귀띔해 주었다.
“아빠가 요즘 며느리라는 말에 예민하시거든여.”
“질투로군요. 원래 딸 가진 아빠들이 다 그러더라고요. 우리 그이도 아직까지 난리랍니다.”
“에이코 백작님도 그러셔여?”
“말도 마셔요. 저를 빼놓고 둘이서 얼마나 애틋한지. 요즘은 밤마다 동화책을 읽어 준다니까요.”
“우와, 백쟉밈은 엄청 다졍한 아빠시네요.”
에이코 백작 부인이 아빠의 얼굴을 힐끗 살피더니, 내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조만간 영애님 방에도 동화책이 왕창 쌓이겠네요.”
“녜?”
“제가 저 비슷한 눈빛을 잘 알고 있거든요.”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여느 때보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아빠가 보였다.
헉. 저 광기 어린 눈빛은…….
어쩐지 아빠의 속마음이 읽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내 딸이 분명 다정한 아빠라고 했다’ ―라고 말이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딸이 남을 칭찬하는 건 절대 못 참는 아빠는 투지를 불태웠다.
마치 기르신 신문에 내 사진이 나왔을 때, 출간된 신문을 몽땅 사 버렸던 그날처럼!
“에이코 백쟉 부인…….”
“영애, 갑자기 왜 이렇게 시무룩해졌어요?”
“혹쉬 동화책을 묻으려면 땅을 얼마큼 파야 할까여?”
“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무언가 알았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세상에, 설마 아빠와 하는 소꿉놀이인가요? 아니면 촉감놀이? 백작님은 참 멋진 아빠시네요.”
그런 낭만적인 게 아닌걸요.
오늘부터 밤마다 동화책 읽어 주기 작전이 펼쳐질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찔했다.
“아무튼 백쟉 부인, 조만간 백쟉가로 초대장을 보낼게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안 그래도 그 소식 들었어요. 검투장을 동물 치료 센터로 리모델링한다고 하셨죠?”
“녜. 부인께서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좋게써요.”
“당연하죠. 제가 실은 환경 운동가로만 알려져 있는데, 동물 애호가이기도 하거든요.”
내게 비밀을 고백한 그녀는 손님맞이를 위해 자리를 떴다.
좋아. 모두 계획대로였다.
에이코 부인이 흥밋거리를 던져 주고 떠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판을 깔면 되는 것이다.
“동물 치료 센터라니, 그것은 또 어떤 새로운 사업입니까?”
남겨진 이들이 흥미를 갖고 몰려들었다.
지금이에요, 아빠!
나는 아빠의 옆구리를 콕 찔러서 신호를 보냈다.
“상은 잊지 않았지?”
……언제부터 이렇게 삑삑이 장난감에 진심이셨던 거지?
* * *
같은 시각, 모리스 대신관의 별장에도 작은 모임이 있었다.
던버르레 공작, 다페 남작. 그리고 그들과 가장 밀접하게 지내는 가신들까지 약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별장은 고요했다.
모두 최근 리아노 가문에 관한 일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이빨 빠진 호랑이인 줄 알았더니. 발톱을 숨기고 있었어?’
중앙에 앉은 모리스는 화를 다스렸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한 거지?
황후를 처리한 이후, 고분고분하게 자신의 뜻대로 따랐던 황제이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가 변했다.
대체 언제부터였던가?
모리스의 머릿속에 하얀 아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루나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
그래, 돌이켜보면 그 아이를 처음 본 후부터 황제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발걸음을 끊었던 황후궁에 찾아가지를 않나.
뜬금없이 대부가 되겠노라 선언하고.
이제는 제게 의견을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후계자를 정했다.
제 통제 아래 있었던 것들이 하나둘 벗어나고 있었다.
모든 원인은 그 아기 영애였다.
“모리스 님, 대책이 필요합니다.”
눈치를 살피던 코노미야 백작이 조심스럽게 화두를 던졌다.
“최근 라이언하트 가문의 지지율이 동부 지역을 시작으로 남부, 서부까지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합니다.”
“헛소문이겠지, 단기간에 그게 가능할 리가 없어!”
다페 남작이 성질머리답게 대뜸 소리부터 지르고 봤다.
‘무식하기는.’
귀족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치고받고 싸우는 것만 좋아하지, 정치적인 안목이 없는 다페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리 없었다.
“크흠…….”
모두가 불편한 기색을 내뱉으며 눈치를 보는 가운데. 모리스 대신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번 사냥의 밤 행사 준비에 라이언하트 가문도 관여한다지.”
“네. 내일 회의 때부터 참석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모리스는 별장에 모인 귀족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봤다.
‘이런 일에 쓸 만한 패는 역시…….’
마음을 정한 그가 호명했다.
“다페 남작. 지난번 검투장 일로 진 빚을 갚아야 하지 않겠나?”
라이언하트 가문에 검투장을 뺏긴 이후로 찬밥 신세였던 다페 남작은 이번이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맡겨만 주십쇼, 대신관님. 무슨 짓을 해서든 꼭 놈들을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무슨 짓이든지.”
모리스 대신관의 입꼬리가 조용히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