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1/142)

132화

우리는 에이코 백작가의 살롱이 끝나고 곧장 저택으로 돌아왔다.

평소였으면 우리의 귀가 시간에 맞춰 마중 나와 있을 리챠드가 보이지 않았다.

“리챠드가 왜 안 나왔찌?”

“손님이 왔나 보군.”

아빠가 마구간 뒤쪽으로 줄지어 서 있는 마차를 보며 말했다.

말이 한두 필이 아닌 걸 보니, 손님이 꽤 여러 명이 와 있는 모양이었다.

‘누가 온 거지?’

서둘러 저택 안에 들어갔다.

소란스러운 응접실 앞에서 사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리챠드를 발견했다.

“리챠드, 웬 손님들이에여?”

“아,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한 발 늦게 우리를 발견한 리챠드가 시계를 확인하고 이마를 짚었다.

“죄송합니다, 아가님. 갑자기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괜챠나요. 그건 그렇구, 기자들은 뭐 때문에 온 거래요?”

“지난 화재 사고 때, 아이를 구하러 뛰어든 일이 세간에 알려졌는지 피헨느 씨와 프로스트 씨를 취재하려고 왔다 합니다.”

응접실 안은 한창 열띤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타 신문사에서 나온 기자들과 폴에게 둘러싸인 피헨느와 프로스트를 보고서 우리는 2층으로 향했다.

“잠자리에 드실 준비를 하겠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직 안 잘 꼬에요.”

아빠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며 리챠드에게 말했다.

“초대쟝을 쓰려고요.”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살롱에서 검투장 리모델링에 관한 소식을 잘 퍼트려 놨으니, 이제는 그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했다.

동물 치료 센터의 개원식 초대장 작성하기!

황제 폐하는 물론, 영향력 있는 귀족들과 신문 기자들까지 초청할 계획이었다.

‘수인에 대한 제국민들의 부정적인 생각을 한 번에 고칠 거거든.’

이번 계획에 내가 알고 있고,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을 생각이니만큼 자신이 있었다.

“아가님, 부탁하신 것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여, 리챠드.”

나는 리챠드가 가져다준 편지지를 쫙 펼쳐 놓았다.

‘어디 보자, 일단 초대장을 보낼 리스트를 적어 볼까?’

화제성을 생각해야 하니, 황제 폐하와 세도 세력에게 각각 한 통씩.

동부 세력을 주름잡고 있는 에이코 백작가에도 한 통. 남부는 프로스트 남작님의 고향이니, 그쪽을 통해서 보내면 되겠고…….

각 신문사에도 한 통씩 보내려면 지금부터 서둘러 써도 밤을 꼴딱 지새워야 할 것 같았다.

후우.

벌써부터 손목이 저릿저릿한 기분이 들었지만, 힘을 내서 깃펜을 야무지게 쥐었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께.>

첫 문장을 써 내렸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빠가 대뜸 내 편지지를 가져가 버렸다.

“이걸 네가 손수 쓸 생각인가?”

“리챠드가 바쁘니까 어쩔 수 없쬬.”

“쓰지 마.”

“그럼 오또캐요. 당장 내일부터 돌려야 하는뎨.”

“토리 무크한테 맡기든가.”

“토리는 엄청난 악필이에여.”

토리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사실이다.

“그럼 피헨느한테…….”

“아까 봤쟈나요. 피헨느 씨랑 프로스트 남쟉님은 당분간 인터뷰하느라 바쁠걸요?”

“…….”

무언가 굉장히 불만인 듯, 아빠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하나 같이 도움이 안 되는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빠가 무언가 결심한 듯, 내가 들고 있던 깃펜을 뺏어갔다.

“아빠가 도와쥬시려구여?”

“쓰는 건 내가 쓸 테니까, 넌 봉투에 넣는 것만 하도록.”

아빠는 여전히 인상을 잔뜩 찌푸린 모습으로 정갈한 글씨를 적어 내렸다.

조금 놀라긴 했다.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인간들에게 편지 쓰는 일이 없던 아빠였으니까.

그런 그가 딸을 고생시키기 싫어서 귀찮은 일을 감수하고 있다.

새삼스레 내가 그에게 사랑받는 딸이라는 게 실감 갔다.

“자, 됐다.”

황제에게 보낼 편지는 반듯하게 쓴 반면, 모리스 대신관이나 다페 남작에게 보낼 편지는 대충 휘갈겨 쓴 아빠의 행동에 웃음이 났다.

나는 집중해서 초대장을 작성하는 아빠를 슬쩍 껴안았다.

“아빠. 초대쟝 다 쓰고 낚싯대로 같이 사냥놀이하고 잘까요?”

퐁!

아빠의 등 뒤로 튀어나온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 * *

결국 새벽까지 실컷 우다다! 시간을 즐긴 아빠와 나는 그 여파로 인해 나란히 늦잠을 자고 말았다.

우리는 퉁퉁 부은 얼굴로 <사냥의 밤> 회의에 참석했다.

“라이언하트 영애도 참석할 줄은 몰랐네만.”

일찍이 와 있던 던버르레 공작이 눈썹을 까딱 치켜세웠다. 그 옆에 앉은 다페 남작도 혼잣말을 하는 척 한마디 얄밉게 거들었다.

“어린애가 뭘 안다고.”

다 들리거든요?

안 그래도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했던 나는 황제가 써 준 임명장을 꺼내 보였다.

“두 분께서 폐하의 의견에 불만이 있으신 것 같다고 전해 드릴까여?”

“크흠.”

두 남자는 차마 더는 딴죽을 걸지 못하고 입에 자물쇠를 걸어 잠겼다.

“다들 피차 바쁜 몸들이니 서둘러 회의나 시작하지.”

자리에 착석한 아빠가 나를 무릎에 앉히며 서기를 쳐다봤다.

황제에게 보고할 회의 보고서를 쓰기 위해 참석한 서기가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기존에 사냥의 밤 관련 행사의 재정은 던버르레 공작님께서, 사냥용 수인 공급과 관리는 다페 남작님께서 맡아서 하셨습니다.”

“수인은 모두…… 거의 납치하다시피 한 이들이군.”

보고서를 넘겨보던 아빠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냥의 밤 행사가 끝난 후 동원되었던 수인들 대부분이 폐사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얼마나 비인도적인 짓인지 여실히 드러내 주는 지표네.’

사실 이쯤 되면 다들 이 행사가 얼마나 끔찍한지 어렴풋이 알 텐데.

아무도 나서서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여태껏 유지되어 온 것 같았다.

나는 화를 삼키고 있는 아빠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는 무엇을 맡으면 되는 거져?”

“라이언하트 가문에서는…….”

자칫 예민할 수 있는 주제였기에 서기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던버르레 공작과 다페 남작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나오시려나.’

그들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자신 있었다.

여러 경우의 수를 이미 머릿속으로 수차례 계산하고 대책을 세우고 왔다.

‘어디 한번 우리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넘겨주지 않겠다고 우겨 보시지?’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며 노려보는데,

“라이언하트 백작가에게 이 위대하신 몸이 맡아서 해 왔던 수인 관리를 맡기는 게 어떻나?”

뜻밖에도 먼저 입을 연 것은 다페 남작이었다.

내 예상을 벗어나는 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듯이 던버르레 공작이 동의를 표했다.

“그리하는 게 좋겠소. 혼자서 두 업무를 보는 것보다, 둘이서 수인 공급과 관리를 각각 나눠서 맡아 관리하는 게 더 체계적일 테니 말이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긴 했다만, 수상했다.

‘이렇게 순순히 제 밥그릇을 내놓을 리가 없는데?’

다른 이도 아니라 ‘다페 남작’이라서 더 의심이 갔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놈이 자신의 몫을 떼어서 우리에게 나눠 준다고?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뜬다 하면 믿겠다.

‘분명 꿍꿍이가 있는 눈빛인데.’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으며 다페 남작을 노려봤다.

필시 저들도 작전을 세우고 온 것이다. 하면, 그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빨리 알아차려야 했다.

“수인 관리를 맡기겠다고?”

아빠 역시 나와 생각이 통한 모양이다. 목소리에 잔뜩 경계가 서려 있었다.

“왜 이 몸께서 특별히 양보해 주겠다는데, 싫나?”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시오. 마침 라이언하트에서 치료센터를 개원한다고 들었소만, 큰돈을 만질 기회 아니오?”

다페 남작의 껄렁거림도, 던버드레 남작의 회유도 우리에게는 썩 유쾌하게 와 닿지 않았다.

“그래. 내 검투장을 멋대로 개조해서 치료센터인가 뭔가를 한다고 들었는데. 거기서 실컷 짐승들이나 관리하면 되겠네.”

마지막에는 거의 시비조에 가까운 다페 남작의 말투 때문에 아빠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가운데 낀 서기는 제게 불똥이 튈까 봐서 냉큼 상황을 정리했다.

“그, 그럼 보고서에는 라이언하트 백작님께서 수인 관리를 맡겠다고 기록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아빠는 여전히 속이 끓는 듯했지만,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애초에 거절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아빠가 고통받을 수인들을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좋소, 잘 생각했네. 부디 잘 관리하여 이번 사냥의 밤 축제 준비에 차질이 없길 바라네.”

“기껏 추천서를 써 준, 폐하의 이름에 먹칠이나 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순간 던버르레 공작과 다페 남작의 입술이 동시에 말려 올라가는 것을 포착했다.

대충 분위기를 보니까 알겠네.

이번 계략의 주동자는 다페 남작이었다.

‘다페 남작의 수준 내에서 예상되는 술수는 몇 가지 없어.’

그 와중에 굳이 치료센터를 콕 짚어서 언급한 걸 보면…….

순간적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다.

‘설마, 그걸 노리는 건가?’

나는 표정 관리에 신경 쓰며, 간밤에 아빠와 함께 준비한 초대장을 꺼냈다.

“말이 나온 김에 던벌레 공쟉밈, 다페 남쟉밈께 드릴 게 이써요.”

“무엇인가?”

나는 습관적으로 열 손가락에 낀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는 던버르레 공작에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동물 치료센터 개원식 초대쟝이에요. 폐하와 귀족분들과 신문 기자들도 많이 많이 초대했으니까, 꼭 참여해 쥬세요.”

“……신문 기자들을 불렀다고?”

던버르레 공작의 가지런한 눈썹이 까딱 치켜 올라갔다.

‘아, 이렇게 속마음을 알기 쉬워서야.’

나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당연히 이 몸을 위한 초대장도 있겠지?”

“당연하져. 다페 남쟉밈 것도 여기 있어여.”

교양머리 없이 초대장을 찢어발기다시피 열어 본 다페 남작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조언을 하나 하지. 이 몸께서 좋은 생각이 나서 말이야.”

“조언이여?”

나는 순순히 그가 흔들어 대는 미끼를 무는 ‘척’ 해 주었다.

“당장 오늘 저녁에 행사 때 사냥감으로 쓰일 수인을 보낼 테니, 치료센터를 여는 날에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건 어떻나?”

“행사 준비 임원으로서의 그 자질을 증명하라는 거져?”

“자ㅈ……, 뭐라고?”

어휴. 그 무식한 머리로 누구를 곤란에 빠트리겠다는 건지.

같은 팀인 던버르레 공작도 혀를 찰 만큼 한심했지만, 나는 끝까지 순수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했다.

“죠아요. 다페 남쟉밈의 조언대로 개원식 때, 수인을 어떻게 잘 관리하고 있는지 제국민들에게 선보이는 시간도 마련할께여.”

“기대하겠소.”

던버르레 공작이 자신들의 작전이 먹혔음을 확신하는 듯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실컷 웃어 두라고.

정말 ‘미끼’를 문 쪽이 누구인지는 곧 밝혀질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