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그럼 이번 회의는 이쯤 하도록 하고. 다음 회의는…… 라이언하트 가문의 개원식이 끝난 후로 잡지.”
목적을 달성한 던버르레 공작과 다페 남작은 회의가 끝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한결같이 구역 질나는 놈들이군.”
아빠는 품속에 안긴 내 뺨에 얼굴을 비비며 화를 삭였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모습이 마치 불만 가득한 고양이가 애옭애옭,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참느라 고생해써요, 아빠.”
고생한 그의 뺨에 쪽, 뽀뽀를 하니 그가 고장 나 버렸다.
“…….”
그대로 굳어 버린 아빠가 내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깜짝 놀란 호박색 눈동자 위로 기다란 속눈썹이 끔뻑끔뻑 나풀거렸다.
‘방금 내게 뭘 한 거기?’ 하고 묻고 싶은 게 역력한 눈빛이었다.
“갑자기 제가 뽀뽀해서 기분 나빠써요?”
도리도리.
고개를 격하게 저은 그가 이번에는 반대쪽 볼을 들이밀었다.
……이쪽에도 뽀뽀해 달라는 건가?
머뭇거리다가 반대쪽 뺨에도 쪽. 뽀뽀를 했다.
그릉, 그릉.
옳은 선택이었는지 아빠의 목울대에서 나른한 골골송이 들려왔다.
그는 내 말랑말랑한 볼 위에 자신의 뺨을 마구마구 비비더니,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저택으로 바로 돌아갈 건가?”
“녜. 상대가 저렇게 나왔으니 우리도 뒤통수를 쳐 줄 쥰비를 해야죠.”
나는 뚝배기 브레이커 아가니까!
* * *
다페 남작은 약속한 대로 초저녁 즈음, 사람을 보내왔다.
말을 탄 간수가 제일 선두에 서 있었고 그의 뒤로 죄수를 호송할 때 쓰이는 이동용 수레가 뒤를 이었다.
“다페 남작가에서 왔습니다.”
말에서 내린 간수가 모자를 벗으며 내게 인사했다.
‘다페 남작가의 사람치고는 되게 예의 바른 사람이네.’
그쪽 사람이라서 아기인 나한테 되게 무례하게 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예의 바른 간수를 빤히 보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라.
오늘 처음 보는 남자인데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내 옆에서 서 있던 아빠가 한마디 툭 던졌다.
“어울리지 않는 말투로군.”
삐딱한 말투에 기분 나쁠 법도 한데, 간수는 배를 잡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떼잉! 한번 장난 좀 쳐 볼까 했드만, 어림도 없구먼.”
어어? 이 목소리는!
잔뜩 목소리를 내리깔고 인사했을 때와 달리 방정맞아진 톤은 귀에 익었다.
“체취를 그렇게 대놓고 풍기면서 못 알아봐 달라는 건, 기만이라고 생각 안 하나?”
“하하하! 보는 눈도 없으니 이제 나도 편하게 해야겠슈! 나의 썬샤인! 잘 지냈는가?”
험상궂게 생긴 간수의 얼굴이 신기루처럼 허물어지더니, 벤 쟝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벤 쟝 할부지!”
반가운 그에게 포르르 달려갔다.
“아하하, 이제야 내 선샤인께서 나를 알아보는구먼! 하마터면 섭섭할 뻔 했슈.”
“변장 솜씨가 너무 감쪽같아서 못 알아봐써요.”
“암, 암, 그렇고말고. 내 말 했지 않았던가? 완벽한 잠입일 거라고!”
일전에 다페 남작가에 들어가기 위해 변신한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이어서 그인 줄 몰라봤다.
“아직 다페 남쟉 쪽에서도 눈치 못 챘쬬?”
“그럼, 그럼. 내가 그때 잡아 뒀던 살수로 변신한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 할 겨.”
그 살수는 저택의 지하에 있다.
웨인투르와 리챠드가 번갈아 감시하고 있다고 들었다.
“오늘은 왜 다른 모습이에여?”
“그야, 이 간수를 라이언하트 가문으로 보낸다기에 나의 선샤인을 보고 싶어서 왔지!”
“저도 보고 싶었어요, 할부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서로 안부를 묻고 있는데, 등 뒤에서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따라서 나온 아빠와 할아버지였다.
【영 마음에 안 든다.】
“동감입니다.”
【확, 처리해 버려?】
“탁월하신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쩐지 음침한 대화가 오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 어깨를 털어 내며, 본론을 꺼냈다.
“벤 쟝 할부지, 그럼 데려온 수인들 상태부터 볼까여?”
여태껏 밝았던 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후우. 그 썩을 놈의 자식이 보내기에 데리고 오긴 했다만…….”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써요?”
“다들 하나 같이 상태가 거시기 하니께. 일단 마음의 준비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 같슈.”
벤 쟝이 이동용 수레로 다가갔다. 일반적인 것과 다르게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수레는 내부가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덜컹! 덜컹!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수레가 휘청거릴 정도로 흔들렸다.
‘대체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주먹 쥔 손에 땀이 찼다.
“조심하쇼. 다칠 수도 있으니.”
벤 쟝의 경고에 아빠는 나를 품에 안았고, 할아버지는 당장에라도 바람을 날릴 태세였다.
“그럼…… 열겠슈.”
긴장감 속에서 수레의 문이 열렸다. 그 안은 쇠창살로 한 번 더 막혀 있었다.
콰앙!
컴컴한 수레 안으로 빛이 들자, 안쪽에서 무언가가 격렬히 움직였다.
“!”
“더 보지 않는 게 좋겠다.”
아빠가 놀란 나를 품속 깊이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뭐야, 방금?’
찰나였지만, 수레 안에 있던 생물체의 상태를 똑똑히 봤다.
“쉬이, 괜찮다. 괜찮아.”
등을 토닥거리는 아빠의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지만 좀처럼 내 심장은 진정하지 못했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이 고막 바로 옆에서 들릴 정도로 크게 뛰었다.
‘초식 수인이 어째서.’
내가 잘못 본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아 봤지만,
쾅! 콰앙!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소리가 헛것을 본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줬다.
【눈빛을 보니 완전 맛이 간 것 같은 눈빛이군. 초식 수인이 육식 수인 앞에서 이렇게 공격성을 띨 리가 없는데.】
“보통이라면 꼬리를 말고 도망갔어야 하죠. 보통 상태라면.”
【그 빌어먹을 자식. 역시 살려 두는 게 아니었다.】
아빠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두 분의 말씀이 맞다.
다페 남작이 보낸 수인은 ‘보통 상태’가 아니었다.
‘그건 마치…….’
이성이 마비되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상태였다.
‘상태가 안 좋을 줄은 내심 예상하고 있었다만, 이 정도일 줄이야.’
생각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나 역시 분노가 차올랐다.
진짜, 용서 못 해.
나는 천천히 수레에 갇혀 있는 초식 수인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비쩍 말라서 피골이 상접해 있는 그들을 보니, 마음이 미어졌다.
“일부러 굶긴 거예여?”
“그 쳐 죽일 놈들이 한 짓을 내 입으로 다 말하자니 속에 열불이 끓어! 열불이!”
“다들 못해도 열흘 이상은 굶긴 거 같은뎨.”
“굶기다뿐이겠슈? 그놈들이 나한테 이걸 투약하라고 했다니까.”
“약까지 쓰라고 했다구여?”
“겨우 시선을 돌려놓고 빼돌릴 수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에 이것까지 먹었더라면 어땠는지 상상도 하기 싫구먼.”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다 하다 못해 약물까지 손을 대?
어쩜 이렇게 악한 짓만 골라서 하는지, 그들을 벌할 이유가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무슨 성분인진 모르겠다만, 께름칙해서 주는 대로 다 빼돌려서 가져왔슈.”
“잘하셨써요.”
벤 쟝이 알약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내게 건넸다.
곧장 주머니 속 알약을 살펴본 나는 머리의 피가 쫙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 약은…….”
“혹시 썬샤인이 아는 약이 알약이요?”
“금지된 약물이에여.”
벤 쟝이 빼돌려 온 약을 알고 있는 건 나뿐만은 아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빠도 이 약을 드셨을 테니까.’
내가 마따따비로 천연 해독제를 만들어 주기 전까지, 아빠가 복용했던 ‘후각 마취 알약’과 비슷했다.
“신경 마비 알약이에여.”
“그건 부작용이 심해 유통 금지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알약의 정체를 알게 된 아빠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야말로 과거 몸소 ‘신경 마비 알약’의 부작용을 경험한 장본인이니, 위험성을 제일 잘 알고 있어서였다.
<신경 마비 알약>은 ‘후각만 마취’하는 오늘날의 약과 달리, 치명적인 부작용 성분이 들어 있다.
바로 ‘복용자의 폭력성을 극대화시킨다’는 것.
그것 때문에 의료계는 이 알약 생산과 판매를 법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런 불법 알약을 수인에게 몰래 먹여서 보내려 했다고?’
이건 대놓고 우리를 엿 먹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술수가 뻔하네여.”
“불법 알약 사용으로 엮을 생각이었나 보군.”
“잔뜩 굶긴 상태에서 저 약까지 복용시켰다면, 아무리 초식 수인이더라도 인간을 물어뜯으려 했을지도 몰라요.”
자칫하면 나도 수인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동물 치료센터 개원식 때, 수인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선보였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한 걸 보면…….
그들이 그리는 꿍꿍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아빠. 우리 치료센터 개원식까지 며칠 남았쬬?”
“2주 남았다.”
“시간은 충분하녜요.”
나는 양팔을 걷어붙이며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빠는 릴리앙이랑 같이 츄르를 대량으로 만들어 쥬세요.”
“당장 착수하도록 하지. 나흘 밤낮으로 하면 한 달 치를 만들 수 있다.”
아빠는 허공에다 냥냥펀치를 슉슉, 날려 보이며 츄릅 열매를 으깨는 시늉을 해 보였다.
“리챠드와 피헨느 씨한테는 수인들의 컨디션 관리와 꽃단장을 맡겨 쥬세요.”
“단장은 무엇 하러?”
아빠가 허공에 휘두르던 주먹을 거두며 물었다.
“첫인상은 중요한 법이쟈나요. 병약한 모습보다는 멋지게 단장한 모습이 상대에게 호감을 더 살 수 있찌 않겠어요?”
“허허허! 역시 나의 선샤인은 현명하다니까. 그럼 나는 무얼 도와주면 되는 거요?”
“벤 쟝 할부지는 계속해서 다페 남작가에 잠입해 비리의 증거를 모아 쥬시면 돼요.”
“그거야 쉽구먼!”
나는 우리 식구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리며 각자에게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웨인투르에게는 다친 수인들의 재활 치료를 맡기면 될 꺼 같아여.”
“당장 지시를 내리도록 하겠다.”
이제 그만 아빠와 저택 안으로 들어가 식구들을 소집시키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불쑥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 할애비는?】
……아 맞다. 할아버지를 빼먹었지 참.
【설마 이 할애비를 까먹은 건 아니겠지?】
진실대로 말했다가는 한 달 동안 삐지실 것 같았다.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안 까먹었쬬. 할부지는 제일 중요한 역할이라서 그래요.”
【제일 중요한 역할이라고?】
잔뜩 시무룩했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동시에 아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 역할보다 더?”
아, 이런. 미끼를 할아버지만 물었어야 했는데.
덩달아 아빠까지 물어 버리신 것 같다.
“아버지께 질 수 없다. 그 중요한 역할이라는 게 뭐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 때문에 나는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러니까, 그게…… 총 책임을 맡을 지휘관 같은 건뎨.”
【하하하! 역시 그런 건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이 할애비에게 어울리지!】
“내게 시켜라, 명예 지휘관!”
또 이상한 것에 꽂혀 불이 붙어 버린 두 남자를 보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번 작전 성공할 수 있는 거 맡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