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어떤 것을 상상했든 간에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검투장 리모델링이 이번 작전의 핵심인 만큼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했으니까.
“아가님의 뜻대로 치료센터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리챠드가 정문을 활짝 열었다.
황제를 필두로 사람들이 하나둘, 센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세상에, 이게 대체…….”
여기저기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고, 기자들은 쉴 새 없이 사진용 마도구를 바삐 작동시켰다.
“이곳이 과거 폭력이 행해지던 곳이었다니 전혀 믿기지 않는구나.”
황제가 흡족한 얼굴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역시 라이언하트 가문입니다.”
“맞습니다. 폐하께서 괜히 믿고 맡기신 게 아니었어요.”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검투장의 모습과는 정반대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폐쇄적인 분위기였던 공간을 커다란 창을 여러 개 내서 개방감을 준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덕분에 햇볕이 양껏 들어와 식물원처럼 꾸민 내부와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마치 휴양지에 온 것만 같아요.”
황제에 이어서 에이코 백작 부인까지 인테리어를 칭찬하고 나서자, 그녀의 추종자들이 줄줄이 동감을 표했다.
‘지금이에요, 아빠.’
나는 반대쪽에서 서 있는 아빠에게 눈짓을 보냈다.
“제일 먼져 깃털이 예쁜 새 친구들을 소개할게요.”
아빠가 휘파람을 불자,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창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열린 창을 통해서 푸른 꼬리 깃털이 아름다운 공작새가 제일 먼저 날아들었다.
“어머, 저 신비로운 깃털 색 좀 봐요!”
햇살이 반사되는 각도에 따라 오색 빛깔로 빛나는 깃털을 가진 푸른 공작새는 단숨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공작새의 정체는 피헨느였다.
“좋아써. 그동안 준비한 걸 모두에게 보여 쥴까요?”
“뺘옥!”
마치 내 말에 대답하는 것처럼 공작새 모습을 한 피헨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으로 우리가 몰래 준비했던 것들을 보여 줄 시간이었다.
* * *
지금으로부터 2주 전.
내 계획에 따라 다페 남작이 보낸 수인을 보살피던 중,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아빠가 내게 물었다.
[수인들을 잘 먹이고 찌워서 무얼 할 생각인 거지?]
[수인 퍼레이드를 펼칠 꼬에요.]
[수인 퍼레……이드?]
머릿속에 그려 놓은 것들을 설명했다.
<수인 퍼레이드>는 내가 소설 속에 빙의하기 전 삶의 경험에서 빌려온 계획이다.
화려한 의상에 동물 인형 탈을 쓴 이들이 노래하고 춤추던 퍼레이드.
예쁜 불빛 아래서 신나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던 모습은 어린 시절 잊지 못할 추억 중 하나다.
‘나이를 먹고도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서 놀이공원에 갔던 적이 종종 있었지.’
아마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우리가 준비한 <수인 퍼레이드를> 좋아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한편에 작은 동심을 품고 살아가니까.
[수인들에 관한 인식을 바꾸는 게 목젹이에요. 공격적이고 사납다는 편견에서 귀엽고 친근한 이미지로.]
[……이야기를 해 보긴 하겠다만, 협조를 해 줄지는 모르겠군.]
아빠가 다페 남작이 보낸 앙상하게 마른 수인들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나는 씩씩하게 츄릅 열매를 양손으로 으깨며 장담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옛날에 그런 말이 있꼬든요. 머리 검은 짐승보다 동물들이 더 은혜를 잘 안다고.]
* * *
그리고 다시 현재.
그때 했던 내 호언장담이 현실로 펼쳐졌다.
“뺘아―옥!”
피헨느가 위 꼬리덮깃을 넓게 펼치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악공들이 악기 연주를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웬 노랫소리지?” 하고 궁금해하면서도, 박자에 맞춰 까닥까닥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반쯤 승리를 확신했다.
내가 리챠드에게 부탁해서 미리 고용해 놓은 무도회 전문 악공들이 연주한 곡은 다름 아닌…… 전설의 수능 금지곡 메들리였으니까!
단언컨대, 이 엄청난 K-pop의 중독성을 이겨 낼 자는 없을 것이다.
링댕동, 링댕동, 링디기디기댕댕동 ♩
암욜맨, 암욜맨 그대여. 따라닷따 오늘도 ♬
픽미 픽미 픽미 업 ♪
덩덩 댄스, 덩덩 댄스, 덩덩 댄스, 져스트 댄스 ♬
4번째 곡이 연주될 때쯤에는 이미 사람들 대다수가 자신도 모르게 음악에 맞춰 들썩거리고 있었다.
“뺘옥!”
공작새의 울음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지자, 열린 창틈을 통해 크고 작은 새들이 날아들었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허공에서 멋지게 활강한 새들은 윤이 흐르는 깃털을 뽐내며, 귀부인들 곁을 빙글빙글 돌았다.
“어머!”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날아든 새 떼에 놀란 귀족들도, 이내 새들이 공격 의사가 없다는 걸 깨닫고 상황을 즐기기 시작했다.
몇몇 귀부인들은 새들과 어우러져서 춤을 추기도 했다.
‘좋았어. 이 정도면 첫 팀의 퍼포먼스는 성공적이고, 그다음 팀은…….’
나는 치료센터 내부에 심어 놓은 커다란 나무들로 시선을 옮겼다. 숨어서 내가 신호를 보내길 기다리고 있던 토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역시도 피헨느처럼 수인화한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토리!’
멀리 있는데도 토리는 내 입 모양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찍!”
토리의 작고 하찮은 울음소리가 퍼지자, 나무에 꼭꼭 숨어 있던 날다람쥐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뛰어서 폴짝, 하늘을 날았다.
땅 밑에서는 풀숲에 숨어 있던 친칠라와 토끼들이 깡충깡충 뛰어나왔다.
“세상에, 귀여워라!”
한번 마주쳤다 하면 피할 수 없는 초롱초롱한 눈동자.
누구나 한 번쯤은 손을 뻗고 싶게 만드는 복슬복슬한 마성의 엉덩이.
앙증맞은 크기를 가진 작은 동물들을 보고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을 부여잡고 휘청거렸다.
“라이언하트 가문에서는 이런 귀여운 동물들을 어디서 구한 걸까요?”
“그러게요. 수집용인 걸까요? 왠지 탐나는데, 따로 한 번 문의해 봐야겠어요.”
생각하는 거 하고는!
지금 나쁜 말을 한 사람들은 내가 다 기억해 두었다.
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강아지로 변신한 리챠드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와요!”
미리 약속된 대로 골든 댕댕이의 모습으로 변한 그가 신나서 내게 달려왔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축 처진 귀와 어디서 뛰어놀다 온 건지, 꼬질꼬질한 털이 리챠드 시고르자브죵의 매력이었다.
“손!”
그가 잽싸게 내 손바닥 위에 털 뭉치를 얹었다.
“앉아!”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살포시 앉는 댕댕이를 보고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이제 마지막 필살기를 보여 줄 때였다.
‘준비됐어요, 리챠드?’
엄지와 검지를 펼쳐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고서 리챠드에게 눈짓을 보냈다.
‘물론이죠, 아가님!’
그러자 댕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빵야!”
총을 쏘는 시늉을 하자, 대형 댕댕이는 바닥에 발라당 배를 까고 누워 버렸다.
사람들은 혀를 내밀고 눈을 감은 채 천연덕스럽게 총 맞은 연기를 하는 강아지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건 난생처음 봅니다! 대체 어떻게 훈련을 시키신 겁니까?”
“그러고 보니 라이언하트 영애님께서 일전에 마법 고삐 없이도 야생마를 길들이시지 않으셨습니까? 아기 영애님은 조련에 재능이 있나 봅니다.”
“비법을 좀 알려 주세요.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짐승이 사람 말을 듣게 만든 건가요?”
예상대로 뜨거운 반응이 펼쳐졌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이 ‘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없어 보였다. 그저 수집용으로 잡아다 기르는 ‘일반 동물’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이상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여태까지 제국민들은 인간에게 엄청난 공격성을 띤 개체들밖에 접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간 <신경 마비 알약>으로 다페 남작이 여론을 조작해 온 탓이다.
나는 댕댕이의 등에 올라타며 입을 열었다.
“제가 억지로 가르치거나 길들이려고 한 건 아니에여.”
“그럼 어떻게 말 안 통하는 짐승들을 이렇게 통제하실 수 있는 겁니까? 혹시 마법 장치나 환각제 같은 거라도 이용한 건가요?”
“그런 건 쓰지 않아도 돼요. 그런 것 없이도 우리 모두 소통이 가능하니까요.”
사람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해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지.’
이 상황까지 예상했던 나는 마지막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수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냥 일반 동물이 아니라, 말이 통하는 수인이니까요.”
“뭐, 뭐라고요? 저들이 수인……?”
악기 연주가 멈추고 웨인투르가 캥거루 수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붉은 가죽 장갑을 낀 것을 발견하자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붉은 주먹? D 검투장에 있던 그 수인 검투사 아니에요?”
“마, 맞네! 그날 저 전투 병기가 도망쳤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죠?”
방금 전까지 즐거워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들은 웨인투르가 갑자기 돌변해서 덤벼들까 봐 무서웠는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기도 했다.
“우리 라이언하트 가문의 식구에여.”
점점 커지는 웅성거림 속에서 다페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 짐승을 누가 빼돌렸나 했더니, 감히 이 몸의 사유 재산을 겁도 없이!”
“웨인투르는 물건이 아니에여! 친구이고 가족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딴 열등하고 포악하기만 한 수인과 인간이 어떻게 동급이 될 수 있단 말인지 모르겠군!”
“도대체 어디가 열등하고 포악한뎨요? 여러분들 눈에는 정말 그렇게 보여요?”
나는 귀족들을 향해서 질문했다.
방금 전까지 질서정연하게 맞춰 비행하던 새와 귀여운 토끼며 다람쥐, 친칠라들…… 그리고 리챠드의 ‘손-앉아-빵야’ 3종 세트에 반했던 이들은 입을 쉽사리 열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다는 증거였다.
‘정말 수인이라고 무조건 위험한 존재인 걸까?’
그들은 방금 전 그 귀엽고 친근하고 사랑스러웠던 수인들의 모습들을 보고 흔들린 것이었다.
“포악한 건 수인들이 아니라 다페 남쟉 당신이겠찌!”
“저자가 그동안 약한 수인들을 잡아다 굶기고 학대한 걸로도 모자라서, 불법 알약을 먹여서 날뛰게 만들었습니다. 폐하.”
아빠가 손에 증거물이 될 알약을 든 채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저 알약은……! 신경 마비 알약 아닙니까?”
눈썰미 좋은 기자 한 명이 질문하기 무섭게 “트, 특종이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사진용 마도구가 작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