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신경 마비 알약 주머니가 황제의 손에 넘어갔다.
“저, 저 물건이 왜 그대로……!”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린 다페 남작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는 게 보였다.
‘이제야 사태 파악이 좀 되는 모양이지?’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걸 느낀 그는 다급히 모리스 대신관 쪽을 바라보았다.
도움을 구하는 눈빛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흐름은 우리 손에 넘어온 거나 다름없으니까.
“당신의 부하가 양심 고백 해써요.”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다!”
“당사자를 보고도 변명하실 수 있는지 궁금하녜요.”
현실을 부정하는 그를 위해 준비한 사람을 불러오라고 명했다.
계단 쪽에서 다페 남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단추를 소매에 매단 사내가 꾸물거리며 모습을 나타냈다.
그를 알아본 다페 남작이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너, 너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이 몸께서 분명 고향에 당분간 가 있으라고 했을 텐데.”
그는 눈앞의 사내가 자신이 사주한 측근 부하라고 틀림없이 믿는 것 같았다.
카멜레온 수인 벤 쟝이 변장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벤 쟝 할아버지의 실력은 자타공인이니, 아마 평생이 지나도 제 부하가 우리 쪽 사람이 변신해서 밀정 역할을 했다는 걸 모를 것이다.
“폐하! 다페 남작님께서 제게 금지된 약물을 수인들에게 사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벤 쟝이 황제의 앞에 엎드려 진실을 고하자 다페가 다급히 따라 조아렸다.
“내가 언제! 그런 적 없습니다, 저는 모르는 일이라고요!”
“이번에는 특히 라이언하트 가문을 난처하게 하기 위해서 각별히 신경 쓰라고 하셨고요.”
연륜에서 느껴지는 바이브가 있다는 말을 이럴 때나 쓰는 건가 보다.
벤 쟝은 옆에서 성질 나쁜 다페가 씩씩거리든 말든 태연하게 고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자의 말이 진실인가, 몬조거 다페 남작.”
황제가 싸늘한 시선으로 다페를 바라봤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자들이 저를 모함하는 겁니다. 대신관님!”
비겁하기는.
상황이 불리하게 굴러가자 모리스 대신관의 그림자 뒤로 숨으려는 그가 우스웠다.
나는 비굴하게 꿇어앉아 있는 다페에게 속삭였다.
“판단은 대신관밈이 아니라 폐하께서 하실 검미댜.”
“이, 이……!”
분에 겨운 다페가 벌떡 일어서려 했지만, 아빠가 조금 더 빨랐다.
가차 없이 그의 오금을 걷어차서 다시 꿇려 앉혔다.
“크억!”
“폐하께서 네놈에게 일어서도 좋다고 하신 적 없다. 또한 내 딸에게 감히 손찌검을 하려 하는 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아빠는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 가볍게 다페 남작을 제압했다.
힘에서 밀린 다페가 모양 빠지게 버둥거리며 욕지거리를 뱉어대는 모습에 구경꾼들은 혀를 찼다.
다페 남작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다들 그리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론은 완벽히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그 알약 어디서 공급받았는지 모두에게 말해 쥬세요.”
“그건 말입니다…….”
벤 쟝의 시선이 다페 남작을 지나쳐 모리스 대신관과 던버르레 공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하는 게 보였다.
내내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모리스 대신관의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잡역꾼의 말입니다. 마음에 담아 두실 가치가 없는 말일 듯합니…….”
“대신관. 라이언하트 영애의 말 못 들었는가. 판단은 대신관 자네가 아니라 짐이 듣고 내릴 것일세.”
황제가 냉정하게 모리스 대신관의 말허리를 잘라 내는 모습은 정말이지 짜릿했다.
* * *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황제가 중도에 말을 끊어 버리다니.
그로서는 몹시 불쾌한 일이었으며, 황제와 대신관 사이가 점점 틀어지고 있다는 걸 만인에게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든 일은 모리스 대신관이 사주한 겁니다. 물주는 던버르레 공작가가, 행동은 다페 남작이 맡아서 해 왔습니다.”
어디서 구르다가 온 건지도 모를 남자의 폭로전이 이어질수록 모리스는 궁지에 몰렸다.
어느 순간부터 기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열띤 취재를 펼쳤다.
“그럼 신경 마비 알약을 사용한 이유는 뭡니까?”
“제가 그 이유를 알고 이써요!”
불 난 집 옆에서 기름을 끼얹는 것은 가증스러운 라이언하트 영애였다.
자연스럽게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한 작은 계집아이가 병아리처럼 삐약거리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영애님께서 말입니까?”
“녜. 오랜 굶주림으로 정신이 허약해진 수인들에게 약을 먹여서 부작용에 노출시키려고 한 검미댜.”
“그 부작용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꾸몄다는 뜻이군요.”
“라이언하트 가문과 폐하와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했던 거죠. 수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면 폐하의 명을 업신여긴 거나 다름없쟈나요.”
아이가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논란은 점점 커졌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죗값 역시 커졌다.
휴대용 수첩 위에서 바삐 움직이는 깃펜들 중에는 모리스 대신관의 편은 없었다.
그들은 어느 순간 줄행랑을 쳐 버린 후였다. 괜히 함께 엮여서 똥 밟게 될까 봐서 내뺀 것으로 보였다.
“그럼 혹시 그동안 제국 내에서 수인들이 포악하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또한 관련된 일일 수 있다고 해석해도 되는 겁니까?”
한 기자가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정답임미다. 여러분은 그동안 모듀 조작된 언론에 속으신 거예여.”
가뜩이나 최근 <다페 남작이 운영하던 검투장 사건>과 <황후 묘비 훼손 사건>이 연이어 폭로되면서 제국민들은 ‘조작’에 민감했다.
한데 또다시 신뢰를 잃을 사건이 발생하다니.
모리스는 은연중에 깨달았다.
이제 한 발짝 앞은 절벽이라는 것을.
‘하등 도움도 안 되는 몬조거 다페 남작. 이 쓰레기만도 못한.’
이든 라이언하트의 구둣발 아래 깔려 힘도 못 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가 찼다.
진즉 버려야 했을 패였다.
아니, 이제라도 버리면 됐다.
“던버르레 공작, 꼬리를 자른다. 그리고…… 플랜B 실행시켜.”
무언가 결심한 모리스 대신관이 던버르레 공작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그들이라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 * *
어쩐지 내 등 뒤로 닿는 소름 끼치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이 섬뜩함은?’
돌아보니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는 모리스 대신관이 그 원흉이었다.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이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팔뚝 위로 솜털이 쭈뼛쭈뼛 섰다. 그가 풍기는 기운은 단순히 화가 난 사람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랑은 미묘하게 달랐다.
‘그러니까 이 느낌은…….’
파괴의 선상에서 최후의 안전핀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하기에는 겉으로 보기에 그는 얌전했다. 사람들의 쑥덕거림을 조용히 온몸으로 감내해 내고 있을 뿐이었다.
‘기분 탓인가?’
도무지 가시지 않는 찜찜한 기분을 지워 내려 애썼다.
“무슨 일 있나?”
별안간 조용해진 나를 이상히 여긴 아빠가 다페 남작을 뒤로하고 한달음에 내게 왔다.
“아뇨, 잠시 딴생각 해써요. 이제 체포하면 되져?”
“곧 황궁에서 기사단이 온다고 했으니 우리가 나설 것은 없다.”
그래, 아빠가 있는데 뭐가 문제야?
이유 없이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하는데 이상한 일이 펼쳐졌다.
“!”
기분 나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이 화들짝 놀라 날개를 활짝 펼쳤다. 높이 날아오른 새들은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냈다.
“뺘옥!”
“피헨느!”
비틀거리는 것은 피헨느뿐만이 아니었다.
허공에서 새들이 단체로 푸드덕거리고 있다면, 땅 위에서는 작은 소동물들이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토리! 리챠드! 모두 괜챠나요?”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진 수인들의 이상행동에 사람들도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상황 파악이 빠른 황제의 호위가 나섰다.
“폐하, 황태자 전하. 아무래도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두 분 다 자리를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루나도 같이 가야 해요.”
“아기 영애님은 라이언하트 백작님께서 챙길 겁니다.”
호위는 일단 황족 먼저 챙기려고 했으나, 그에 순순히 따를 노아가 아니었다.
“루나!”
“노아, 위험해. 일단 호위 기샤님의 말씀을 잘 들어.”
“그럼 너는.”
“나는 아빠가 있잖…….”
갑자기 땅이 진동하는 바람에 내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
작은 몸뚱이가 휘청,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아빠가 순발력 있게 털이 폭신폭신 난 팔로 나를 잡아 줬기 때문…….
어? 잠깐만. 푹신푹신한 팔?
“위험하다.”
귓가에 들려오는 아빠의 음성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성인 남성의 덩치에 몇 배나 큰 사자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인간화 변신이 풀린 것이다. 그에게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비명으로 인해 건물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사, 사, 사자 수인이다!”
“도망쳐! 육식 수인이야!”
평소에 육식 수인을 볼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버렸다.
무작정 출구를 향해 도망 나가는 자.
무작정 비명을 내지르며 혼절해 버리고 마는 자.
무작정 자신을 보호해 줄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집어 드는 자.
건물 안이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건 순식간이었다.
“라이언하트 영애가 데려다가 쇼를 펼친 건, 모두 초식 수인들이라 얌전했던 거겠지. 하지만 저 사자 수인은 어떨 것 같소?”
좋은 기회를 놓칠 일 없던 모리스 대신관이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어쩐지 악에 물든 그의 눈 흰자위가 점점 검게 물들어 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치 리챠드가 흑화하려고 했을 때 같아.’
모리스 대신관 주변으로 검은 오라가 모여들고 있었다.
‘폭주인가?’
아니, 그것과 조금은 달랐다.
인간은 수인처럼 감정에 동요하여 폭주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는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
‘설마.’
모리스 대신관이 끝끝내 ‘그 선택’을 한 걸까?
나는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를 자세히 살폈다. 어느덧 그의 주름진 얼굴 위로 검은 핏줄이 돋는 게 보였다.
“공생? 하!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다만, 과연 저 난폭한 육식 수인에게도 통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나?”
때마침 건물 안으로 황궁 기사단이 들어왔다.
상황을 알 리가 없는 기사단은 무기를 빼 들고서 커다란 사자를 향해 겨누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