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빠와 시선이 얽혔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걸까.
“네 계획대로 밀고 나아가.”
아빠의 읊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모든 감각이 내게 “나는 내 딸을 믿고 있으니까.” 하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이채가 도는 맹수의 눈을 마주하니 막연한 확신 같은 게 생겼다.
‘그래. 할 수 있어. 난 혼자 싸우는 게 아니니까.’
나는 무언의 응원이 담긴 시선을 등에 업고 모리스를 향해 돌아섰다.
“모리스 대신관밈. 내기 하나 하실래요?”
당돌한 제안에 모리스 대신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냥감을 잡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가 물지 않고는 못 배길 미끼를 눈앞에 대고 흔들 것.
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 모리스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만약 댱신이 이긴다면 굳이 흑마법을 쓰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쥴게요.”
“네가 무슨 수로?”
“황족의 지지와 귀족들의 지지가 필요하시쟈나요. 제겐 두 힘을 움직일 힘이 이써요.”
내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절대 허세 섞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 황제와 다음 황위 계승자인 노아가 내 편이라는 건 공인된 사실이다. 그러니 모리스의 입장에도 솔깃한 제안일 수밖에 없다.
모리스에게는 황위를 이을 정통성이 없을뿐더러, 흑마법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권력을 잡는 게 이로울 테니까.
간악한 입술이 서서히 움직였다.
“……영리한 계집.”
“이 내기에서 댱신이 이긴다면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걸고 댱신에게 충성을 맹세할게여.”
모리스의 새카맣게 물든 눈동자가 ‘충성’이라는 말에 반응했다.
그가 미끼를 문 것이다.
언제나 눈치 빠른 아빠는 말하지 않아도 어찌 행동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육식 수인인 내가 짐승의 본능을 이길 수 없는지 모두 앞에서 증명해 보이겠다.”
맹수의 매서운 눈빛이 철창 너머로 모리스에게 꽂혔다.
“방법은 네놈이 하던 방식 그대로 하지.”
“좋다.”
* * *
모리스와의 내기는 간단했다.
보름 동안 아빠를 굶긴 다음 짐승의 본능, 즉 식욕으로 시험하는 것이다.
아빠는 내기를 위해 스스로 황실 감옥에 갇히길 택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째 되는 날.
나는 깨어난 노아의 도움 덕분에 아빠의 면회를 갈 기회를 얻었다.
“아빠는 괜챤겠쬬?”
“아가님, 뚝 하세요. 며칠 굶는다고 유명을 달리할 만큼 각하는 나약하시지 않습니다.”
리챠드가 울먹거리는 나를 품에 안고 달랬다.
“아빠 짱짱 센 건 알지만, 세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쟈나요.”
“괜찮으실 겁니다. 적어도 약속하신 것은 지키시는 분이니까요.”
“무사히 다시 돌아오겠쬬?”
“그럼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가님과 하신 약속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키실 겁니다.”
맞아, 우리 아빠는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는 사자님이시니까.
나는 코를 훌쩍이며, 내 마음을 좀먹으려는 걱정을 밀어냈다.
“그럼 얼른 뚝 하시는 겁니다. 뚝.”
“뚝.”
“좋습니다. 씩씩한 모습으로 뵙고 오는 겁니다. 아가님이 우는 모습을 보는 거야말로 각하께 가장 힘든 일이니까요.”
“녜, 세상에서 제일 씩씩한 아기가 될 꼬에요.”
“좋습니다. 그럼 가 볼까요?”
일주일 만에 본 아빠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코끝에 몹시 힘을 주어야만 했다.
“아빠, 나 와써요.”
“울지도 않고, 다 컸군. 내 딸.”
“괜챠나요?”
“밥은 잘 먹이고 있는 건가? 전보다 가벼워진 것 같은데.”
아빠는 쇠창살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리챠드에게 잔소리했다.
“아가님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 저는 관짝을 고르고 싶지 않으니 최선을 다해서 아가님을 보필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봉급 값을 하는군.”
“이참에 인상해 주시렵니까?”
기운이 없어 벽에 몸을 기댄 아빠가 입술 새로 웃음을 흘렸다.
힘든 시간을 감내하고 있는 아빠를 위해 부러 농담을 하는 리챠드의 마음을 알아서였다.
“실없는 소리 하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아가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뚝 떨어지는 일이 없게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참고하도록 하지.”
아빠는 사이로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작전은 잘 진행되고 있나?”
“녜. 노아에게도 말해 놨어요. 폐하께서도 당분간 순순히 모리스의 뜻대로 움직여 쥬실 거예요.”
“제 무덤이 될 자리인지도 모르고 기세등등할 그 자식의 모습이 우습겠군.”
손을 뻗어 아빠의 손을 잡았다.
원래라면 쫀득쫀득 탄력 있어야 할 핑크 젤리가 며칠 고생한 탓에 푸석푸석했다.
나는 다시 시큰해져 오는 코끝에 힘을 주었다.
“곧 나쁜 놈들 뚝배기 깨는 모습 보여 드릴 테니까. 죠금만 힘내요, 아빠.”
“약속하마. 무탈히 네게 돌아가겠다고.”
그가 내 작은 손가락을 감싸 잡으며 덧붙였다.
“그러니 너도 아빠 없다고 밥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고 있어.”
바싹 말라붙은 목소리로 오히려 위로를 건네는 낮고 견고한 음성이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녜, 약속.”
“착하네, 내 딸.”
모두를 위해서 싸울 테니 모든 게 끝나면 함께 산책하자던 아빠의 약속은 밤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만월에 새겨졌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 * *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장소는 검투장의 경기장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치료 센터였다.
‘치료받은 수인들이 마음껏 재활 운동할 수 있는 운동장으로 사용하려고 보존해 놓은 건데.’
이런 식으로 다시 악행의 장소로 쓰이게 되니, 어쩐지 씁쓸해진 마음을 안고 주변을 둘러봤다.
모리스가 일을 크게 벌인 탓에 구경꾼이 몰려들어 북적거렸다.
“라이언하트 백작님이 수인이었다니 아직도 안 믿겨요. 지난번 티파티에서 봤을 때, 지성인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야 오늘 결과를 보면 알겠지요. 정말 짐승일지, 아니면 우리가 오해하는 건지.”
자기 자신의 일인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귀부인들도 더러 보였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지만, 아빠의 편도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부디 모든 것이 무사히 끝날 수 있게 해주세요.’
신에게 조용히 기도하는 사이, 모리스 대신관이 입장했다.
뒤이어 황제 폐하와 노아까지 준비된 자리에 앉고 나서야 장내는 조용해졌다.
“그럼 라이언하트 백작 영애와의 내기를 시작하도록 하지.”
오랜만에 공석에 마주한 모리스 대신관은 그전보다 더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시커먼 연기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꿈틀거리고 있었다.
“저거 제 눈에만 보여여?”
나는 조용히 옆자리에 앉은 리챠드에게 물었다.
“아뇨. 제게도 보입니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는 것 같쬬?”
“그런 것 같습니다. 저런 걸 보고도 태연히 앉아 있을 인간들이 아니니까요.”
리챠드가 모리스의 어깨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 것이 내게 보이는 거지?’
빙의자라는 것 외에는 평범한 4살짜리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나였기에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흐음.
잠겨 있는 내 앞으로 스멀스멀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흑마법은 영혼을 대가로 악마에게 힘을 빌리는 것이다. 해서 영안이 떠 있는 자들만 볼 수 있지.】
영안이 떠있는 자?
나는 어느 틈에 내 옆자리에 자리하고 앉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영안은 보통 수인들이나, 신력이 있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이다.
‘평범한 엑스트라 아기일 뿐인 나와는 전혀 관련 없을 텐데…….’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와중에 모리스 대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언하트 백작을 들여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경기장과 이어진 통로 문이 열렸다.
관중들은 숨을 죽이고 어두컴컴한 통로를 바라봤다.
……터벅, 터벅.
묵직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마침내 양지로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이 드러났다.
“헉!”
관람석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비명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휘날리는 검은 갈퀴, 그 아래로 살짝 초점이 엇나간 호박색 동공을 가진 거대한 사자가 걸어 나왔다.
세로획으로 찢어진 흉터까지 더해 있으니 한껏 사나워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완전 맹수나 다름없네요.”
“역시 육식 수인은…….”
사람들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래 굶주려 야위었지만, 특유의 감춰지지 않는 위용에 기가 눌린 것이다.
“라이언하트 영애, 앞으로 나오도록.”
모리스의 부름에 나는 리챠드의 품에서 내려왔다.
“다녀오께요.”
리챠드와 식구들을 지나쳐 아빠가 있는 경기장으로 향했다.
“도망가지 않았구나.”
통로 앞에 선 모리스가 나를 삐딱하게 내려다보며 비아냥거렸다.
“내기에 건 약속이나 쟐 지키세여.”
“어리석기는.”
그와 오래 말을 섞기 싫었던 나는 열린 경기장 문으로 들어갔다.
쿵.
내가 들어가기 무섭게 모리스가 철문을 닫아 버렸다.
모리스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돌아본 나를 향해 비열하게 웃으며 간수에게 재차 명령을 내렸다.
“다른 통로도 열어.”
다른 통로라니?
사전에 약속된 바가 없었다.
이의를 제기하기도 전에 반대쪽 통로의 철문이 덜커덕 열렸다.
―크르렁!
넓은 경기장 부지에 사나운 포효가 메아리쳤다.
“!”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어둠 너머의 통로에서 달려오고 있는 발소리는 못 해도 열댓 마리는 넘어 보였다.
꾸우―욱! 꾸우우욱!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하이에나 여러 마리가 나타났다. 눈이 풀린 채로 침을 질질 흘리는 걸 보니, 그들 역시 오랜 시간 굶긴 것 같았다.
하이에나가 나를 보자마자 곧장 달려왔지만, 내가 선 통로와 경기장 사이에는 여닫을 수 있는 투명한 벽이 세워져 있었다.
“영애를 가엾이 여겨 참고로 말해 주자면, 그것들은 수인이 아니라 진짜 금수들이다.”
모리스가 경기장 밖에서 엄청난 아량을 베푸는 듯이 거들먹거렸다.
‘비겁한 새끼.’
뒤통수를 쳐 놓고 뻔뻔하게 웃는 모습이 꼴도 보기 싫었다.
모리스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육식 수인에 대한 공포를 심기 위해, 사전에 말도 없이 맹수를 준비한 것이다.
똑같이 보름간 굶긴 상태로!
―꾸우우욱!
하이에나가 공격 신호를 보내며 단체로 하울링 했다.
“지금이라도 포기할 기회를 주마.”
모리스가 투명한 벽을 여닫는 장치를 손에 쥔 채로 말했다.
목숨이 아깝거든 순순히 자신에게 굴복하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