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보름간 굶주린 사자 수인과 이성을 잃은 하이에나가 어슬렁거리는 경기장에 누가 맨몸으로 들어가고 싶어 할까.
관객석에서 술렁거림이 커졌다.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기 영애님이 위험해요.”
“설마 모리스 대신관님께서 아기 영애를 진짜 해치려고 하는 거겠어요? 그리고 그런 거였다면 누구보다 황태자님께서 말리셨겠죠.”
모두가 일제히 한 곳을 바라봤다.
노아와 황제, 그리고 라이언하트 가문의 수인들이 이 상황을 말리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으니 더욱 궁금증이 커졌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걸까? 라고 묻고 싶어 하는 게 얼굴에 훤히 보였다.
“라이언하트 영애가 기권하겠죠?”
누군가 불안에 떨며 말했다.
그들이 아무리 이익을 좇는 집단이라고 하지만,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자들은 아니었다.
4살짜리 아기를 맨몸으로 맹수가 들끓는 곳에 집어넣는다는 게 미친 짓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모리스 대신관님이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시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 봐야죠.”
모두 숨죽이고 내게 집중했다.
나는 깊게 숨을 내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런 협박 소용없으니까, 입 댜물고 문이나 열어요.”
* * *
이렇게 오랜 허기를 느껴 본 게 얼마 만이던가.
밑바닥에서부터 켜켜이 쌓인 공허가 이든의 이성을 좀먹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목말라.’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며칠간 물도 먹지 못해 바싹 마르다 못해 갈라진 목구멍에서 쇠 맛이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목을 축이고 뜨거운 것을 입에 넣고 싶었다.
‘뜨겁고…… 신선한 것이 필요해.’
평소에는 절대 피의 맛을 즐기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은 어떤 야만스러운 짓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공허한 속을 달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헉!”
“여, 영애님께서 저 안으로 들어가셨어.”
사람들이 무어라 떠드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고막 깊이 닿지 못하고 스치는 바람처럼 흩어졌다.
“당장 이 내기를 멈추는 게 좋겠소!”
소란스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이든은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걸쳐 있는 이성이 차츰 흐려짐을 느꼈다.
크르르, 그의 입술 새로 낮은 목울대 소리가 퍼졌다.
‘……피 냄새.’
오랜 굶주림으로 인해 잔뜩 예민해진 후각이 냄새의 근원을 금방 찾아냈다.
반대편 출구 쪽에 달라붙어 있는 하이에나들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이든은 홀린 듯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굶주린 사자가 다가오자, 하이에나들은 눈치를 살피며 출구 쪽에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그러나 무언가 아쉬움이 남았는지, 멀리 가지는 않았다. 마치 사냥감이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무심코 하이에나들이 있던 방향으로 눈을 돌린 이든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빠.”
물에 닿으면 녹아 없어질 것 같은, 달고 폭신한 음성.
무언가에 이끌리듯 시선을 옮긴 곳에는 무해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생명체가 있었다.
‘……누구였더라.’
옅어진 이성만큼이나 기억도 흐릿했다.
아직 이든의 머릿속에는 공허와 갈증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빠, 나 와써요.”
“…….”
맹수의 동공이 깊어졌다.
짙어진 눈동자 속에 말랑말랑한 밀가루 반죽 같은 아이가 가득 들어찼다.
깜빡, 깜빡.
시선을 맞춘 아이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려 왔다.
이든은 반달로 곱게 접히는 눈인사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상했다. 기껏해야 한 입 거리도 안 될 텐데.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해치고 싶다는 마음 또한 들지 않았다.
“집에 가쟈.”
아이가 손을 뻗었다.
이든은 그 하찮을 정도로 작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잡아야 하는 걸까.
왠지 내밀어진 저 손을 잡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왜 손 안 쟙아 줘요.”
밀가루 반죽이 가늘게 떨었다.
가만히 응시하다 보니까 무언가 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이 기분은.’
묵직한 돌덩어리가 속을 답답하게 했다. 보름을 굶었던 것보다 더 깊은 갈증이 느껴졌다.
“아빠만 믿으라고 했으면서.”
빛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움직일 때마다 풀 향기가 풍겨 왔다.
익숙한 냄새였다.
언젠가 한 번 맡아 본 기억이 있는…….
무의식의 어느 지점에 파묻혀 있던 풀 내음이 날카로웠던 신경을 느슨하게 풀어 놓았다.
귓가에 낡은 펌프질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잊은 게 뭐였더라.’
망각을 자각하니 불쾌함이 밀려 왔다.
이든은 기억을 되짚으려 풀 향기에 집중했다.
“완젼 뽕쟁이야.”
울먹이는 목소리가 낙뢰로 변해 가슴 깊이 내리 꽂혔다.
잊고 있던 것들이 떠올랐다.
[제 이름은 루나임미다.]
저를 향해 반달로 고이 접힌 푸른 눈동자를 잊다니.
제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다.
[아빠가 안아 쥬세요.]
자신을 올려다보며 양팔을 벌리던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잊은 것도 스스로 괘씸했다.
뇌가 장식이었나?
기억이, 이성이 조금씩 돌아올수록 동공의 초점도 점점 선명해졌다.
[아빠가 너무 좋아, 오또케오또케. 아빠가 너무 멋져, 오또케오또케.]
그래, 다른 건 몰라도 그걸 잊다니.
정말 뇌가 장식이었나 보다.
완전히 이성을 되찾은 이든이 이마를 부여잡고 “정신 나간 놈. 기억 못 할 게 따로 있지”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꾸우우욱!
기회를 엿보던 하이에나가 기이한 울음소리를 냈다.
“!”
이든은 그 하울링이 하이에나들이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 주고받는 공격 신호라는 것을 알았다.
공격 대상은 당연하게도 제 딸아이였다.
“어? ……어어! 안 돼!”
누군가의 외침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그것을 신호탄 삼아 하이에나 무리가 사냥을 개시했다.
그간 굶주렸던 하이에나들이 사냥감을 보고 참지 못하고 달려든 것이다.
“라이언하트 영애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에는 끔찍한 절망이 서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어질 장면을 차마 볼 수 없었는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끔찍한 소리가 들려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둔탁한 충격음과 깨갱거리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눈을 떠 상황을 확인했다.
“라, 라이언하트 백작님께서 아기 영애님을 구했어!”
누군가 감격에 겨운 소리로 외쳤다.
커다란 사자가 아이를 제 등 위에 태우고 굶주린 하이에나를 제압하고 있었다.
수인의 왕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었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침 흘리며 덤비던 하이에나들을 정리해 버렸다.
“아기 영애님의 말이 맞았어요.”
사람들은 딸아이의 털끝만큼도 못 건들게끔 하는 이든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눈에 담았다.
꼬랑지를 내린 하이에나들이 나왔던 통로 쪽으로 도망가 버렸다.
상황은 빠르게 종료됐고, 몸집이 거대한 사자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 주었다.
“아빠…….”
양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아이가 코를 훌쩍였다.
“미안하다. 바로 못 알아봐서 미안해.”
“아빠는 바보 몽춍이야.”
아이는 서슴없이 사자에게로 총총총 걸어가 안겼다.
“아빠가 미안해.”
사자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작은 아이를 품에 안았다.
비록 겉모습은 사자였지만, 사람들 눈에는 인간일 때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진정한 부성애로군요.”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수인은 그 뿌리가 짐승이나 다름없어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사람을 해칠 것이라는 모리스의 주장이 완벽히 빗나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이번 내기는 라이언하트 영애님의 승리가 확실합니다.”
“어서 이 끔찍한 내기를 끝내 줬으면 좋겠어요. 저 두 분이 다치지 않게끔.”
흐름이 바뀌었다. 본능마저도 억누르고 자신의 딸아이를 지켜내는 이든의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켰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자 모리스가 핏대를 세웠다.
“당장 통로를 다시 재개방하라!”
다음 계획을 실행시키려는 모리스의 앞으로 노아가 걸어 나왔다.
“이제 그만하세요. 모리스 대신관.”
“노아 딜러인. 네가 지금 나를 막아선 것이냐?”
“더는 봐 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루나의 부탁 때문에 간신히…… 참고 있었던 거니까.”
낮게 깔린 아이의 음성이 이다지도 살벌하게 들릴 일이던가.
모리스에 비해서 노아의 몸집은 한없이 작았지만, 왠지 거대한 존재를 마주한 것만 같았다.
보이지 않는 힘의 차이에서 오는 무력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젠장. 저따위 어린애는 이 흑마법으로……!’
모리스의 혈관이 꿀렁거리며 힘을 모으려 하는 순간.
풀 향기를 실은 바람을 조종하던 노아가 주먹을 콱 쥐었다.
그러자 시간이 멈추었다.
“!”
멈춰진 세상 속에서 노아만이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천천히 모리스에게로 걸어갔다.
모리스는 꽉 쥔 주먹 아래로 식은땀이 배어 드는 것을 느꼈다.
도망치지도, 공격할 수도 없었다.
그저 노아가 제 앞에 설 때까지 허수아비처럼 굳어 있어야만 했다.
“착각하지 마.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을 없애지 않은 건 순전히 루나 때문이니까.”
루나한테 끔찍한 장면을 보여 줄 순 없지.
노아의 속삭임이 끝나자, 다시 멈춰 있던 시간이 흘렀다.
바닥에 주저앉아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숨을 몰아쉬는 모리스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드니 짓밟고 싶었던 아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댱신이 졌어요, 모리스.”
아이의 등 뒤에는 거대한 사자가, 앞에는 엄청난 힘을 숨긴 마법사가 지키고 있었다.
‘제기랄. 내기를 하자고 했던 건, 함정을 파놓기 위함이었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빠르게 굴러가는 새카만 눈동자 앞을 루나가 막아섰다.
“그동안 모리스 저 남자가 폐하를 속이고, 제국을 능멸하려 꾸몄던 일들에 대해서 여기 이 자리에서 밝히게써요.”
“네까짓 게 아무리 떠들어 봤자, 어린애가 하는 소리를 믿어 줄 것 같나?”
“모리스. 쥬변을 둘러봐요. 사람들이 지금 누구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사람들은 모리스를 향해 비난이 담긴 야유를 퍼붓고 있었다.
“하마터면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뻔한 일을 꾸민 모리스 대신관은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비리가 있다면 그 또한 벌을 받아야겠지요.”
완벽히 판이 뒤집혔다.
이제 더 이상 이곳 어디에도 모리스의 편은 없었다.
루나는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리며, 자신이 들었던 말을 고대로 돌려주었다.
“어리석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