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사자는 사냥감이 방심할 때까지 발톱을 숨긴다.
긴 인고의 시간이 지나 때가 오면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놓는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나는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 폐하의 묘비를 훼손하라 사주한 죄. 수인과의 동맹을 깨트리기 위해 폐하를 속인 죄. 그 밖에도 댱신이 꾸민 일에 대해 다 알고 있으니까 허튼 생각하지 마.”
이 순간만을 위해서 꾹 참고 있던 리챠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모리스 대신관과 그의 지지 세력들이 벌인 추잡한 짓에 관해서 정리한 자료입니다.”
리챠드는 준비해 온 서류를 황제에게 넘겼다.
딱 보기에도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는 자료였다.
그동안 라이언하트 가문의 세작들이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수집한 방대한 양의 증거 자료를 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렇게나 많았다고? 세상에, 신이시여!”
“저런 악마 같은 자가 여태까지 대신관의 자리에 있었다니. 당장 저자와 추종 세력의 죄를 엄중히 물어야 합니다, 폐하!”
모리스와 세도가를 향한 책망이 절정으로 달했고, 증거 자료를 넘겨보던 황제의 손이 멈췄다.
“한데, 제일 마지막 장의 설계도는 뭔가?”
리챠드가 황제가 가리킨 장을 곁눈질로 살폈다. 윗면에 십자가가 그려진 직육면체 설계도였다.
“아, 그것 말씀이십니까.”
작게 탄성을 뱉은 리챠드는 활짝 웃는 낯으로 입을 뗐다.
“관짝 설계도입니다만.”
“땅에 묻는 관, 말인가?”
“예. 미리 준비했습니다. 앞으로 저치들에게 몹시 필요할 듯하여.”
이럴 때 보면 리챠드가 제일 사악하다니까.
“철저한 준비성이로군.”
“폐하께서 알아주신다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우아한 미소로 모리스와 일당들에게 한 방 먹이는 리챠드를 보며 황제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짐이 이번에도 영애와 라이언하트 가문에게 큰 빚을 졌구나. 이번에는 짐이 무엇으로 그 공로를 치하할꼬?”
“갖고 싶은 건 없써요.”
“없다고?”
“녜.”
담백하게 뱉은 내 대답에 도리어 황제가 당황했다.
“잘 생각해 보거라. 혹 갖고 싶은 건물이 있다든가, 눈여겨본 영토가 있다든가 하지 않는가?”
“으음. 별루요.”
“하면 프리마산의 광맥은 어떤가?”
“그것도 갖고 싶진 않은뎨.”
연이은 싱거운 반응에 그의 눈동자가 바빠졌다.
“아니면…… 그래! 영애에게 공작 작위를 주마.”
“녜?”
원래 공작 작위가 그렇게 덜컥 줘도 되는 거였나요?
갑자기 왜 내게 무엇이든 쥐여 주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폐하의 뒤에서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노아의 입김이 있었던 걸까?’
나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황제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정말 괜챠나요. 저희는 그저 잘못된 것을 바로 쟙으려고 한 것뿐인걸요.”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심이었다.
처음에는 피폐 소설 속, 일회성 캐릭터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열심히 생존하다 보니 사랑하는 이들이 생겼고, 그들을 지키려다 보니 빌런의 뚝배기를 깬 것이다.
그저 그뿐이다.
이 일에 대해서 굳이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또 짐이 영애에게 한 수 배우는구나. 그래도 바라는 게 생긴다면 언제든 말하거라. 그동안 고마운 일이 많아서 그러니.”
“아! 갖고 싶은 건 없찌만, 폐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이써요.”
황제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무엇인가? 어서 말해 보거라.”
“매년 가을에 열리는 사냥의 밤 축제를 폐지해 쥬세요.”
“영애라면 대체할 축제 역시 생각해 두었겠지?”
당연한 걸 물으시네.
축제 이름은 물론, 어떤 식으로 구성하고 누구에게 맡길지까지 다 머릿속에 그려 놓은 지 오래다.
“물론이죠! 칼과 활로 서로를 다치고 아프게 하는 사냥의 밤 대신, 함께 웃고 즐길 수 있는 ‘수인 퍼레이드’는 어때여?”
“일전에 치료센터에서 보여 주었던 그런 것을 말하는 게로구나.”
“녜.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고 공생하는 축제가 우리 에덴 제국의 대표가 되었으면 좋게써요.”
그리된다면 앞으로 수인이 핍박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모두에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엔딩일 될 수 있을 테고.
“라이언하트 백작, 역시 자네는 최고의 딸을 두었네.”
잔뜩 들뜬 나를 흐뭇하게 보던 황제가 넌지시 아빠에게 말했다.
어느 틈에 사람 모습으로 돌아온 아빠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머리 위로 아빠의 손이 닿았다.
쓰다듬는 손길은 언제나 그렇듯 따뜻했지만, 야윈 탓에 부쩍 기운이 없어 보였다.
아, 맞다. 츄르!
나는 미리 챙겨온 츄르를 얼른 꺼내 아빠에게 내밀었다.
“아빠가 죠아하는 츄르 갖꼬 왔써요.”
“허허, 역시 딸아이가 최고군.”
내가 준 츄르를 냉큼 입에 문 아빠를 보며 황제는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폐하도 하나 드릴까여?”
“짐의 것도 있는가?”
“그럼요. 여기 있써요.”
황제에게도 남은 츄르를 건넸다.
“짐까지 이렇게 챙겨 줄 줄은 몰랐다만…….”
뭘 이런 걸로 감동하고 그러시나.
질투 많은 남자들에게 하도 시달리다 보니 이런 상황에는 대비가 된 것뿐인걸요.
나는 입술이 삐쭉 나와 뚱해 있는 노아에게 마지막 남은 츄르를 흔들어 보였다.
금방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 바보라니깐.’
으흥흥,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황제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츄르에 대한 감사 답례는 나쁜 놈들 뚝배기 깨는 걸로 갚아 쥬세요.”
“약속하마.”
약속 도장을 찍은 황제는 곧장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렸다.
“기사단은 들어라. 모리스 대신관과 던버르레 공작, 리아노 백작, 다페 남작을 체포하라.”
“예, 폐하.”
“관련된 이들은 모두 재판에 회부하여 엄벌을 내리겠다.”
황족을 모욕한 죄.
제국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사회적 혼란을 가져온 죄.
그리고 라이언하트 백작과 백작 영애를 해하려 했던 살인 교사죄.
그 모든 죗값을 치르려면 아마 앞으로 남은 생을 다 쏟아야만 할 것이다.
‘이제 진짜 끝이다.’
나는 기사단에게 어깨를 짓눌려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모리스를 바라봤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가만두지 않아. 이대로 끝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 기필코 네 녀석들을……!”
광기에 찬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모리스의 어깨에서 일렁이는 검은 연기를 통해 분노가 쌓이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건 어떻게 해야 하지?’
흑마법은 시전자의 생명을 갉아 먹으며 성장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아직은 모리스가 멀쩡해서 영향 범위가 작을 뿐이지, 만약 저것을 담는 그릇이 깨져 버린다면…….
죄 없는 일반인이 괜히 흑마법에 노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만간 노아와 논의해 봐야겠네.’
혹시 모를 일에도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네 녀석들을 부숴 버리고 말 거야! 부숴 버릴 거다! 부숴 없애 버릴 거라고!”
모리스가 엄청난 괴력으로 기사단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잡아! 다시 포박해!”
기사단이 금방 모리스의 몸뚱이를 결박했지만, 나불거리는 입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절대 혼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네놈들이 절대 행복할 수 없도록 목숨을 걸고서라도 너를 어둠의 먹이로 던지고 갈 것이야!』
괴이하게 어그러진 음성으로 퍼붓는 저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어둠이 널 삼킬지니, 그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공허에 영혼이 먹히리라!』
마지막 한마디까지 신랄하게 퍼부은 모리스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졌다.
“…….”
잠시 정적이 찾아와 방심할 찰나, 폭주가 시작됐다.
『사라져!』
……어?
제자리에서 튕겨지듯 다시 벌떡 일어난 모리스가 눈을 뒤집어 까며 반복해서 외쳤다.
『사라져라! 영원히 사라져!』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
모리스의 눈, 코, 입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검은 연기가 덩치를 부풀려 거대한 균열로 변했다.
“!”
이내 먹이를 삼키는 악어의 주둥이처럼 쩌적 벌어진 균열이 나를 삼켰다.
“루나! 안 돼!”
사랑하는 이들의 부름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검은 안개가 걷히고 정신을 잃은 루나가 맥없이 쓰러졌다.
“루나!”
노아가 재빠르게 마법으로 루나의 시간을 잠시 멈춘 덕에 아이는 바닥에 곤두박질쳐지지 않았다.
그의 품에 루나가 들어오니 다시 시간이 흘렀다.
“아가님!”
“라이언하트 영애!”
아이를 향한 걱정이 동시에 메아리쳤다.
“무슨 짓을 했지?”
격분한 이든이 모리스에게 달려들었다.
“내 딸에게 무슨 개수작을 부린 거냐고!”
『아하하하하하! 사라질 것이다! 어둠에 먹혀 없어질 것이야! 네놈들이 노력해 봤자 막을 수 없어!』
멱살을 잡힌 모리스는 미친 사람처럼 웃어 젖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어서 말해!”
이든은 팔뚝에 핏줄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모리스의 멱살을 콱 움켜쥐었다. 켁켁거리면서도 멈추지 않는 모리스의 웃음 속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이든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랄 즈음, 엘베른이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을 거둬라. 지금 그자를 해쳤다가는 루나까지 위험하게 돼.】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아십니까?”
【폭주한 흑마법이 루나의 영혼을 삼켜 버린 것이다.】
“그 말은…… 루나가…….”
【아직은 괜찮다. 다만 이대로 계속 둔다면 무의식 속에 갇혀 영원히 소멸해 버리겠지.】
모리스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린 이든은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안 됩니다. 그럴 순 없어요.”
루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패닉에 빠진 것은 노아 쪽도 마찬가지였다.
“정신 차려 봐, 루나.”
끌어안은 아이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작은 생명력이 무언가에 의해 잠식되어 가는 게 느껴져서 미칠 것만 같았다.
마나를 불어 넣어 봐도 감은 눈은 다시 떠지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가 퍽 사무쳤다.
“안 돼, 루나. 날 두고 가지 마.”
떨리는 음성은 애절하고 처절했다.
제발……. 다시 파도 같은 그 눈빛 속에 잠겨 들게 해줘.
모두가 비통에 빠진 가운데, 이든이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루나를 구할 방법은 없습니까.”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지. ……큰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
엘베른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두 남자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을 알려주세요. 대가가 무엇이든 내 딸을 구해야겠으니.”
“어떤 대가를 치러서든 루나를 구하고 싶어요.”
결연에 찬 눈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