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이곳에서 얼마나 헤맨 걸까.
끝없는 지평선을 따라 계속해서 걷는 동안 시간 감각이 무뎌지는 바람에 가늠할 수 없었다.
‘흑마법에 먹혔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 당최 어디인지 모를 곳에 와 있었다.
출구를 찾아 방황하던 나는 한참 만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여기서 나가게 해 쥬세요.”
허공에 가루처럼 흩어져 있던 별빛이 하나로 모여서 사람 형상을 갖췄다.
내가 처음 이 이상한 공간에서 눈을 떴을 때 마주한 존재였다.
【처음에는 네 힘으로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거야 그쪽……이 저를 도와쥬지 않겠다고 하셔서 그런 거죠.”
【말했다시피 그것은 네가 바란다고만 해서 이뤄질 순 없는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뎨요?”
【기다려야지.】
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내 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존재는 자신을 ‘신’이라고 소개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신이라니.’
솔직히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 광활한 공간을 정처 없이 헤매면서 깨닫게 됐다.
저 존재가 확실히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 공간도 현실이 아닌 게 분명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공간은 땅과 하늘의 구분이 없었다. 마치 우주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거꾸로 걸을 수도 있었고, 중력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허공에는 태양과 달이 공존해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여긴 대체 어디지?’
이상했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았고, 먹고 마시지 않아도 허기짐이 느껴지지 않으니.
……어라.
불현듯 달갑지 않은 생각이 스쳤다.
설마.
“저 죽은 거예여?”
【빨리도 묻는구나.】
미확인 존재가 웃음을 터트리자 주변의 별들이 공명했다.
여기 정말, 천국인 거야?
【제법 아이다운 생각이다만 너는 죽지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이라고?
찝찝함이 촛농처럼 눌어붙는 말이었다.
“아직이라는 말은, 곧 그렇게 될 슈도 있다는 거죠?”
【퍽 예리한 면도 있구나.】
“똑바로 대답해 쥬세요.”
【이제야 본질을 물으니, 제대로 답해 주마. 이곳은 네 무의식의 공간. 영원히 멈춰 있는 세계다.】
아득한 공간에 울려 퍼진 메아리가 한데 엉겨 붙어 가슴을 관통했다.
영원히 멈춰 있는 세계.
‘원작 소설에서 봤던 구절이야.’
첫사랑을 잃은 노아는 얼어붙은 겨울 속에 영원히 갇혔다고 했다.
그냥 은유적인 표현인 줄 알았는데, 진짜 존재하는 곳이었다니.
“그럼 당신은 진쨔 신이에요?”
【이제야 이곳을 제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구나. 나는 빛이고 어둠이며 이 영원의 공간을 주관하는 존재. 너처럼 이곳을 떠도는 영혼을 보살필 때도 있지.】
“진쨔 신이시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도 알고 계시겠네요?”
존재는 주변의 별들을 은은하게 빛낼 뿐,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희미한 빛이 내게 확신을 주었다. 정말 왠지 모를 일이었다.
“알려 쥬세요! 세계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려면 오또케 해야 하는지.”
【그리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더냐?】
“당연하죠! 약속했는걸요.”
모든 일이 무사히 끝나면 함께 손을 잡고 산책하자고 했다.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 약속한 이도 있었고, 소꿉놀이하며 오래오래 함께하자고 손가락 도장을 찍은 이도 있었다.
‘반드시 지키기로 한 약속이야.’
그러니까 이대로 이곳에서 영영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이들과 새끼손가락 걸고 한 모든 약속들을 지키기 위해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전 돌아가야만 해요. 부디 도와쥬세요, 신님. 지켜야 할 약속이 너무 많아요.”
무엇보다 그들이 보고 싶었다.
햇볕을 받을 때 반짝반짝 빛을 머금는 그 애의 어여쁜 금빛 머리카락도.
웃을 때마다 찌푸려지는 눈가의 상처를 가진 아빠도.
조건 없이 나를 아껴 주고 사랑해 주었던 라이언하트 가문의 모든 식구들과 동료들이 그리웠다.
간절함을 담아 신에게 애원했다.
그 진심이 닿은 건지, 사뭇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들이 대가를 치러야 한대도 말이냐?】
“녜?”
【말 그대로의 질문이다. 그들이 무슨 대가를 치르든 간에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었다.】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나는 한참 만에 대답할 수 있었다.
“제가 돌아가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뎨요.”
【영리하구나, 아이야.】
존재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그를 따라서 웃을 수 없었다.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니.
맥이 탁 풀렸다.
“…….”
【어찌하겠느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은 내 곁으로 와 물었다.
【네게 고민할 시간을 충분히 주겠다.】
“…….”
얼마만큼의 시간이 또 흘렀을까.
한참을 인내하고 기다려도 내가 미동도 없자, 그를 둘러싼 별이 빛을 잃었다.
내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그런 걸 바랄 리가 없쟈나요.”
나 하나 살자고 아빠나 노아, 다른 가족들을 나락 속으로 끌어 내리고 싶지 않았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더는 생각을 깊게 하지 않기 위해 무릎을 끌어안았다.
【아이야, 나는 네가 원한다면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줄 수 있다.】
귓가에 다정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꾐이었다.
“처음엔 제가 바란다고 해서 이뤄질 수는 없는 거라고 하셨쟈나요.”
【기다림의 시간은 지났다. 자, 그러니 어서 내게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보거라.】
“됐써요.”
【……뭐?】
“원하는 거 없댜구요.”
나는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삼키기 위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나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금세 마음이 바뀐 것이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게야?】
“아뇨. 여전히 보고 싶어요. 하지만 제가 돌아가려면 누군가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하셨쟈나요.”
【그래. 하나, 그것은 그들이 감내해야 할 몫.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않느냐?】
어쩐지 설득하려는 어투로 들렸지만, 아무렴 나랑은 상관없었다.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까.
“어떻게 상관이 없써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인뎨.”
【해서 그들을 다치게 하기 싫어서 네 삶을 포기하겠다?】
공간이 진동하더니 빛을 잃었던 별들이 전보다 더 강한 빛을 발산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장면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아니. 사실 조금 솔직해지자면,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던 햇살 같은 내 사람들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더는 참기 힘들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보고 싶은데 영원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버틸까.
한 번 터져 나온 울음은 멈출 줄 몰랐다.
“녜. 그러니까 이제 말 걸지 말아요. 뭐든 다 들어줄 것처럼 말해 놓고서. 완전 뽕쟁이 신이야.”
【……허.】
신은 눈물범벅이 된 나를 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이야. 정말이지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구나.】
한껏 인자해진 말투만큼이나 부드러운 바람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얼핏 풀 향기가 섞인 것도 같다.
【본디 인간이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인 것을. 어찌 너는…….】
“그건 그냥 평범한 인간이 그러는 거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인간은 달라요.”
【사랑?】
캄캄한 밤하늘처럼 어두웠던 신의 눈동자에 별빛이 생겨났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 법이니까요.”
때로 사랑은 삶을 용감하게 만든다.
그것이 가족의 사랑이든, 연인 간의 사랑이든, 친구 간이든…… 어떠한 형태를 가졌든 마찬가지다.
나의 삶도 그랬다.
과거에는 마냥 죽음을 두려워했던 내가 이제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용감해졌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켰으면 된 것이다.
그래, 그냥 그거면 된 거야.
【네 말이 맞구나. 네가 사랑하는 이들 역시 같은 선택을 한 것을 보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같은 선택을 했다니?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보아라. 너를 사랑하는 이들이 무슨 결심을 했는지.】
신이 허공을 향해 손짓했다.
허허벌판의 공간에서 작은 구멍이 생겨났고, 그 구멍을 통해 그리운 얼굴들이 보였다.
[루나를 구할 방법은 없습니까.]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지. ……큰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
[그 방법을 알려 주세요. 대가가 무엇이든 내 딸을 구해야겠으니.]
[어떤 대가를 치러서든 루나를 구하고 싶어요.]
신이 다시 손을 흔들자, 아빠와 노아를 보여 주던 구멍이 사라졌다.
심장이 불안으로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설마! 안 돼여. 아무도 저 때문에 불행해지기를 원치 않아요.”
【걱정하지 말거라. 약속의 아이야. 내 너를 시험하기 위해 짓궂은 질문을 했으나, 너의 진심을 알았으니 원래대로 보내주겠다.】
정말일까? 신의 농간이 아니라?
신은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얼어붙어 있는 내 손을 이끌었다.
【아이야, 네 의로운 선택에 감명하여 상을 주겠다. 원래 누렸어야 할 너의 힘과 삶을 돌려주마.】
주변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고른 신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무슨 말이에여? 제가 원래 누렸어야 할 힘과 삶이라니.”
【깨어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야.】
신이 제 손등 위로 숨결을 불어 넣자, 별이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벽화 속의 예언대로 너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될지니.】
따뜻한 풀 향기가 몸을 감싸는 걸 느끼며, 나는 다시 아득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라이언하트 저택의 내 방이었다.
‘돌아왔어!’
기쁜 마음에 벌떡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두 남자를 발견했다.
아빠와 노아가 침대 양 끄트머리에 불편한 자세로 선잠에 든 채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진쨔 아빠랑 노아다.”
신이 보여 준 환상이 아니었다.
나는 조심히 손을 뻗어 두 남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루나?”
내 손길 때문에 선잠에서 깬 노아가 몽롱한 눈으로 나를 봤다.
잇달아 아빠도 벌떡 일어섰다.
“루나가 깨어났어?”
며칠 밤을 지새운 건지, 새빨갛게 충혈된 눈에 눈물이 차오른 게 보였다.
“아빠! 노아!”
두 남자가 동시에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깨어났구나, 깨어났어.”
“응, 나 왔써요.”
떨리는 두 남자의 등을 작은 손으로 토닥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