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어깨 위가 타인의 눈물로 뜨겁게 젖어 갔다.
어깨를 타고 떨림이 전해졌다.
“루나, 너 정말 돌아온 거야?”
대답을 기다릴 여유조차 없었는지, 노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보랏빛 눈동자에는 다급함과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다 결국 그는 스스로 답을 찾은 모양이다.
“루나다. 정말, 루나야.”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뺨에 닿았다. 비눗방울을 어루만지듯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에는 미미한 풀 향기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네가, 정말……. 정말 어떻게 되는 줄 알고.”
폭풍우 속에서 떨고 있는 새처럼 웅크린 그가 안쓰러워 슬며시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제야 그 보랏빛 세계에 폭풍이 물러갔다.
“이거 꿈 아니지?”
“응, 꿈 아니야.”
“정말?”
“정말. 봐. 만져지기도 하고, 얘기할 수도 있쟈나.”
몇 번이고 거듭 확인을 하고 나서야 실감이 가나 보다.
질끈 깨물어 부르튼 입술 새로 그는 울음 섞인 안도를 뱉어 냈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걱정시켜서 미안해.”
“다시는 안 돼. 그렇게 말도 없이 멀리 가 버리면 안 돼.”
“그러지 않겠댜고 약속할게.”
“새끼손가락 걸고.”
“응, 새끼손가락 걸고.”
항상 해 왔던 대로 그의 손에 약속 도장을 찍어 줬다.
드디어 노아가 웃었다. 멈춰 있던 세계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금빛 머리카락처럼 찬란하게.
‘솔직히 무서웠어.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봐.’
코끝을 문지르며 노아를 따라서 헤헤 웃었다. 그 미소로 하여금 평화를 되찾은 노아가 내 손을 놓아 주었다.
그의 시선이 내 등 뒤로 향했다.
눈짓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은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아빠가 서 있었다.
“…….”
“…….”
붉어진 눈시울로, 그새 수척해진 얼굴로, 숨 쉬는 것도 까먹었는지 미동도 없이 그렇게 굳어 있었다.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신 건가.’
늘 거대하고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던 그가 처음으로 나약해 보였다. 당장 바스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에 애써 끌어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른 것 같다.
“아빠.”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아빠는 지독한 저주에서 갓 풀려난 것처럼 휘청이며 얕은 숨을 뱉었다.
정말이지 나는 못된 딸인 것 같다. 맨날 이렇게 걱정만 끼치니 말이다.
“우리 아빠 츄르 많이 만들어 드려야겠댜.”
“……이리 와. 제대로 안아 보게.”
두 팔을 벌린 아빠를 향해 포르르 달려가서 안겼다.
이 따뜻한 품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내 목 뒤까지 온전히 감싸 안는 커다란 손에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다.
“저 얼마나 잠들어 있어써요?”
“오늘로 6개월.”
“그동안 시간이 반년이나 흘렀댜구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 놀랐다.
“그럼 그 나쁜 놈들 재판은여?”
“모두 해결됐지.”
아빠는 모리스와 세도가 세력의 최후가 어땠는지 말해 주었다.
“모리스 대신관은 재판을 받을 것도 없이 흑마법으로 폭주한 이후 영혼이 소멸되어 사라졌다.”
“세도 세력의 재판은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작위와 가진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고 지옥의 섬으로 호송됐으니.”
‘지옥의 섬’은 대륙의 모든 악질 범죄자를 모아놓은 거대 감옥이다. 설립된 이후로 지금껏 아무도 탈출하지 못해 탈옥률 0%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결국 악당들에게 걸맞은 최후를 맞이했구나.’
직접 두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모두 해결되었다니 그간 이어져 왔던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고마웠다. 긴 시간 동안 묵묵히 내 곁을 지켜 줬을 두 남자에게.
“지켜줘서 고마워여.”
“당연한 것이다. 아빠니까.”
“그래도 졍말 고마워요.”
아빠는 그새 조금 길어진 내 머리카락에 입술을 맞추며 눈을 반달로 접었다.
문득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늘 무표정이던 그가 이제는 이렇게 스스럼없이 웃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 감동스러웠다.
“루나. 장인어른과 못다 한 말은 오늘 밤에 이어서 하기로 하고, 다른 분들한테도 인사하러 가는 건 어때?”
“우리 라이언하트 식구들?”
“응. 그리고 폐하와 톰. 폴, 몬크, 셀리, 스텔라, 에이코 백작 부인, 그레이고르 씨…… 모두가 루나 네가 깨어나길 기다렸어.”
나 정말 잘살았나 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은 걸 보면 말이다.
“응! 인사하러 갈래!”
아빠와 노아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오랜만에 거니는 복도의 풍경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두 남자와 함께 중앙 현관으로 이어진 계단을 막 내려온 순간.
1층 홀 복도 쪽에서 무언가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토로로로록.
작고 동그란 물체들이 내 발 앞으로 굴러왔다.
“……도토리?”
마도구 도토리였다.
나는 도토리가 굴러온 곳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는 리챠드와 토리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아가님!”
“소인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못 말리는 내 사람들이라니까.
* * *
“으아아, 더는 못 먹어여!”
올챙이처럼 뽈록 나온 배를 부여잡으며 포크를 내려 놓았다.
“아직 메인 요리가 안 나왔습니다, 아가님.”
리챠드는 태연한 얼굴로 음식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벌써 10번째 메인 메뉴였다.
“이게 메인 요리가 아니면 대체 뭐가 메인이에여?”
“글쎄요. 아마 드래곤 요리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얼마 전에 릴리앙 씨랑 웨인투르 씨가 같이 두 팔 걷어붙이고 드래곤 레이드를 가셨거든요.”
“미쳤어!”
“최고의 극찬이군요. 두 분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나를 배 터지게 할 셈인가?
내가 깨어난 이후로 벌써 한 달째 너무 잘 먹고 잘 자는 바람에 포동포동해져 버렸다.
식구들은 몹시 만족하는 듯했지만…….
“이러다가 뜐뜐이 아가가 되면 어또케!”
울상이 된 나를 보며 피헨느와 프로스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포동포동해야지 키가 쑥쑥 크지요.”
“제 부인 말이 맞습니다, 아가님. 허허허! 저희 아가도 포동포동하고 건강하게 나왔으면 좋겠네요.”
프로스트는 볼록 나온 피헨느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대며 말했다.
“제발 조용히 해요, 여보……!”
귀까지 새빨개진 피헨느가 등짝을 때려도 그저 좋단다.
‘그나저나 저 두 분에게 벌써 애기가 생겼을 줄이야.’
흐흠.
괜히 내가 다 쑥스러워 맞은편에 앉은 아빠에게로 말을 돌렸다.
“아빠, 오늘은 표식 안 아파여?”
“괜찮다. 네가 깨어난 이후로 통증은 없어졌어.”
요 근래는 포마드 스타일로 앞머리를 넘기고 다닌 탓에 이마의 표식이 한눈에 들어왔다.
초승달 모양의 표식.
그것은 6개월 전, 모리스의 흑마법에 공격당한 나를 구하기 위하면서 생긴 것이라 했다.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증표는 <목숨을 건 맹약>이었다.
내 숨이 멈추는 날, 함께 세상을 떠나겠다는 약속.
신이 말했던 대로 기어이 대가를 치르겠다고 나선 자에게는 표식이 남았다.
하나는 아빠의 이마에, 다른 하나는 노아의 이마에 자리 잡았다.
“혹시라도 다시 표식에 통증 생기면 말해 쥬셔야 해요.”
“또 쓸데없는 걱정. 네 몸부터 챙기도록.”
아빠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살짝 풀린 머리카락을 도로 묶어 주었다.
세심한 손길에 양 갈래 헤어스타일이 다시 완성되었다.
“감사함미댜, 아빠!”
씩씩하게 인사하고 무릎에서 폴짝 내려왔는데, 마침 할아버지와 벤 쟝이 다이닝 룸으로 들어왔다.
【내 손녀님께서는 밥 잘 챙겨 먹고 있었나?】
“할부지 황궁에는 잘 다녀오셨써요?”
【그럼! 오늘은 황제와 벤 쟝과 함께 외국에서 유행한다던 골프라는 걸 하고 오는 길이다.】
할아버지 뒤로 모양새가 신기한 안경을 낀 벤 쟝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나의 션샤인! 참고로 말하자면 점수 내기 1등은 나였슈.”
【자네 그 입 좀 다물었으면 하네만.】
“오오! 자네도 침묵의 공공칠빵 놀이를 아는가 배? 아들한테 들었는가? 전부터 느낀 건데, 자네 아들은 동부지역 섬의 놀이를 참으로 좋아하는 것 같슈! 하하하핫!”
언제 이렇게들 친해지신 건지.
황제와 할아버지와 벤 쟝, 세 남자는 나이대가 비슷해서 그런지 부쩍 잘 어울려 다니셨다.
얼마 전에는 도원결의를 맺으셨다나 뭐라나.
아무튼 간에 잘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황제가 네게 전해 달라던 편지다.】
할아버지가 내민 편지를 받으며 슬쩍 칭찬을 던졌다.
“두 분 사이 좋아 보이셔요.”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소리를 할애비에게 할 수 있는 게냐.】
몸서리치며 연기처럼 펑, 사라져 버리는 할아버지 때문에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못 말려.’
나는 다시 아빠의 품으로 가서 황제가 보낸 편지를 펼쳐 보았다.
지난번 티 파티 때는 잘 귀가하였느냐?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 보고 싶구나.
문득 노아와 담소를 나누다 네 생각이 나서 이리 펜을 들었다.
소식은 들었느냐?
일전에 너와 약속한 대로 ‘사냥의 밤’ 행사는 폐지 시켰다.
그리고 내 며느리께서 기획한 ‘수인 퍼레이드’를 공식 축제로 지정하였지.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해서 총 책임자로 내 며느리를 올릴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한지 듣고 싶구나.
조속히 며느리와 함께 이 안건에 대해 논하며, 티타임을 즐기고자 하니 입궁해 주길 바란다.
-With love. 시아버지로부터>
(ps. 노아가 예쁜 꽃반지를 만들어 놨으니 소꿉놀이하러 황실로 놀러 오라고 전해 달라는구나.)
추신에 적힌 이름이 살랑바람이 되어 가슴께를 간지럽혔다.
‘바보 노아. 얼마 전에도 만들어 줘 놓고서.’
나는 이미 내 왼쪽 약지 손가락에 끼고 있는 꽃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보고 싶다, 얼른.’
황실에 놀러가서 같이 소꿉놀이도 하고,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나눠 먹어야지.
이제는 그 애와 보낼 시간을 상상만 해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와 함께 편지를 읽은 아빠가 내 머리카락으로 손장난을 치며 물었다.
나는 그가 혹시라도 질투로 심통 낼까 봐서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빠는 오또케 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해.”
“진쨔요?”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줄 알고.
아빠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비스듬히 의자 손잡이에 턱을 괴고서 내 말랑말랑한 볼을 콕, 찌르며 말했다.
“무슨 선택이든 상관없다. 내 딸이 하고 싶은 거니까.”
역시 우리 아빠님이라니까.
나는 으흐흥, 웃음을 흘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할래요! 다른 건 몰라도 조련은 자신 있꼬든요!”
앞으로도 우리의 시간은 이리 함께 흘러가겠지.
함께 걷는 길마다 서로의 발자취가 켜켜이 쌓여 가는 삶.
생의 끝자락에 도달하게 되는 날 누군가 내게 묻거든, 가히 외롭지 않은 삶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악당을 조련하는 아기님>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