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초승달이 홀로 빛을 내는 야심한 밤.
불이 꺼진 사무실 안이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큰 통유리창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그 희미한 빛에 의지한 두 남녀의 몸이 바삐 움직인다.
“잠깐.”
새하얗고 가녀린 여성의 손이 남성의 탄탄한 팔을 멈춰 세운다.
“천천히 해요. 천천히.”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녀의 손길에 남자의 얼굴이 열기로 붉게 달아올랐다.
속삭이듯 작게 읊조린 차분한 말과는 달리 두 남녀의 몸은 여전히 쉼 없이 움직였다.
“아!”
예고 없이 튀어나온 신음에 스스로도 놀란 도희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괜찮아요?”
“쉿!”
그녀의 입가에 있던 새하얀 손은 어느새 남성의 입가에 닿아 있었다.
“괜찮아요. 종이에 살짝 베었나 봐요.”
그녀는 길고 가느다란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더니,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하아, 여긴 아무것도 없는 거 같습니다.”
남자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분명 칠흑 같은 어둠 속인데 왜 이 남자의 얼굴만 빛이 나는 건지.
애써 눈길을 거둔 도희가 책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더니 눈을 감는다.
지금 이 남자의 얼굴이나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부사장 집으로 가 봐야 할까요? 역시 철두철미한 인간이라 여긴 깨끗하네요.”
남자의 말에 도희의 입술이 움직이려는 순간.
—그자가 오네!
도희의 귓가로 중후한 남성의 긴박한 전음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재빠른 동작으로 허리춤에 묶어 뒀던 하늘빛 도포를 풀어 제쳤다.
그리고 두 팔을 들어 도포를 뒤집어쓴 뒤, 남자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찰나!
간발의 차로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말끔한 수트 차림의 덩치 큰 남성이 사무실로 들어선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에서 그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났다.
“강도희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부사장? 이 시간에 왜…….’
물론 부사장이 부사장실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이 새벽 한 시만 아니었다면.
부사장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두근두근.
그의 기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도희는 입가에 닿은 남자의 손 덕분에 새어 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삼켰다.
두근두근.
“죽었는지 살았는지 무조건 찾아내.”
삑—
통화를 끝낸 부사장의 손끝이 책상 끝단에 닿자, 사무실의 어둠이 달아났다.
“흐음…….”
부사장의 시선이 빠르게 책상 위를 훑더니, 매서운 그의 눈매가 더 가늘어진다.
누군가 그의 사무실을 뒤졌다.
그의 눈길이 사무실을 곳곳에 닿았다.
책상 위를 제외하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흔적을 남겨? 증거를 찾고 있다는 경고? 아니면…….’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 그가 급히 사방을 둘러보지만, 이곳에 누군가 숨을 만한 공간은 없다.
그의 발이 천천히 창가로 옮겨진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불 꺼진 빌딩 숲과 줄지어 움직이는 주황빛 점들.
‘창문으로 들어오진 못했겠지.’
사방이 훤히 오픈된 고층 빌딩의 창문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출입문은 하나다.
침입자가 있다면 보안 카메라를 확인하면 될 터.
잠시 멈칫한 그는 무언가를 챙긴 뒤 다시 걸음을 옮겨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이 내리깔린 사무실엔 한쪽 벽면을 차지한 큰 수족관의 기계 소음만 울려 퍼졌다.
“아휴…….”
도희가 덮어쓴 도포를 내리자, 은은한 달빛에 두 남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나의 도포를 같이 뒤집어쓰느라 둘은 서로의 숨결을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코앞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 닿았다.
“…간 거 같아요.”
민망한 도희가 남자 곁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푸른 도포가 걸쳐져 있는 도희의 어깨는 투명해서 사물이 그대로 투과되어 보였다.
다소 괴기스러운 장면이었지만, 남자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도희가 처녀 귀신이었어도 그는 두 손 들어 환영이었다.
“큰일 날 뻔했네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한 도희가 끝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희씨 괜찮아요?”
그녀는 코앞까지 다가왔던 부사장의 기척에 심장이 터져 버리는 줄만 알았다.
덮어쓰면 투명해지는 도포는 유용했다.
눈을 가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만 뺀다면.
몰래 숨는 판에 눈만 내놓고 있을 수도 없지 않나.
“괜찮아요. 얼른 뒤쫓아 갑시다. 악당 물리치러!”
애써 괜찮은 척하는 그녀의 입에서 다소 유치한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정의의 사도라도 된 느낌이네요.”
도희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남자의 입에서 한술 더 뜬 유치함이 흘러나왔다.
처음엔 그저 시급 높은 부업이라 여겼다.
도희는 어쩌다 ‘정의의 사도’를 빙자한 ‘정의의 노예’가 되었는가.
이야기의 시작은 고작 3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