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여기가 어디야?
솨아아아아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세찬 물줄기 소리가 도희의 귓가를 때린다.
도희는 이미 반쯤 일어나 앉아 있었다.
물론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뭐지? 여기 어디야……?’
이내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느꼈던 아찔한 기분이 온몸을 덮쳐 왔다.
“으으으!!!”
도희가 짧게 몸을 털었다.
엉덩이에 닿은 딱딱하고 거친 바닥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스으… 읍.”
숨을 깊게 들여 마시니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 속 깊숙이 찔러왔다.
‘……살았다.’
도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내려다봤다.
‘이렇게 죽는 건가’ 싶은 생각과 함께 폭포에서 떨어지던 아찔한 기분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분명 폭포로 떨어졌는데…….’
눈을 떠보니 이곳이다.
도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옷이 살결에 닿으며 찬 기운이 온몸 곳곳에 스며들었다.
옷을 만져 보니 서늘한 촉감만 느껴질 뿐 물기는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도희의 고개가 자연스레 빛이 스며드는 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입구를 쏟아지는 폭포 물줄기가 덮고 있었는데 그 입구로 은은한 햇빛이 스며들었다.
‘동굴……?’
이곳은 폭포 뒤 위치한 동굴로 보였다.
‘폭포 뒤에 이런 동굴이 있다니…….’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살아 있는 걸 보니 폭포 밑 웅덩이가 꽤나 깊은 모양이다.
‘살아서 다행이긴 한데.’
“후…….”
넋 나간 표정의 도희가 제 이마를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폭포 뒤편에 동굴이 있다는 걸 산 관리자들은 알겠지?’
만약 모른다면…….
서늘한 공포심이 등줄기를 타고 순식간에 스쳐갔다.
‘여기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둘 중 하나.
흐르는 물줄기 밑으로 수영해서 나가 볼까 했지만, 도희의 수영 실력으론 어림도 없었다.
‘그리고 저 물줄기를 어떻게 뚫고 나가.’
도희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고 절망하고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다른 출구를 찾으려 동굴을 둘러보려는데 울퉁불퉁한 동굴 바닥 때문인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 때문인지.
그녀는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들었다.
사실 둘러볼 것도 없이 동굴의 구조는 단순했다.
폭포가 쏟아지는 한쪽을 제외하면 사방이 꽉 막힌 원형 구조.
옅게 어둠이 깔린 동굴의 구석구석,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을 훑어보려 애쓰느라 그녀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
그때, 도희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동굴 중앙을 떡하니 차지한 돌단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다.
도희가 돌단 앞으로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발목까지 오는 낮은 돌단.
그 위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은 나무 목함이 고이 놓여 있다.
‘헐. 이건 또 뭐지?’
폭포 뒤 어느 동굴 그리고 오래된 목함.
도희의 머릿속에 수십 개의 물음표가 띄워졌다.
혹시 누군가 있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나무 상자가 여기 왜…….’
사람이 드나드는 동굴일지도 모른다는 안도감 함께 목함에 대한 궁금증이 떠올랐다.
이땐 몰랐다.
이 발견이 그녀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거라는 걸.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목함.
덕지덕지 묻어 있는 세월의 흔적이 한껏 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누가 여기에 이런 걸…….”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며 목함에 조심스레 다가간 그녀.
이런 걸 함부로 열어도 되나 생각이 듦과 동시에, ‘딸칵’하고 열린 목함.
아니, 사실 잠깐 머뭇거렸다.
누가 봐도 사연 있어 보이는 이 목함을 열어 봐도 되는 건지.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절대 열어 보지 마시오’라고 적혀 있지 않은 이상 무조건 열어 볼 거라는 걸.
그리고…….
‘여기 나밖에 없잖아?’
반쯤 열린 목함 속 때 묻은 누런 양피지 책 한 권이 도희의 눈에 들어왔다.
‘책?’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한 그녀는 혹시나 오염이라도 될까, 아주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책을 한 장 펼쳤다.
스슥—
첫 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낯선 음성.
—내 그대 같은 이를 아주 오래 기다렸네.
“꺄아아아아!!!”
동굴을 가득 메운 폭포음 사이로 도희의 괴성이 울려 퍼진다.
탁!
뒤이어 둔탁한 소음이 나더니, 그녀 손에 있던 서책은 어느덧 바닥에 반쯤 펼쳐져 있었다.
—그대는 정의로운가?
‘사람 목소리……?’
“누, 누구세요?”
바닥에 주저앉은 도희가 쉴 새 없이 눈을 깜빡거리며 동굴 여기저기를 살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봐도, 그녀 발 앞에 서책 이외에 보이는 건 없다.
어떠한 생명체도.
어떠한 물건도.
‘방금 들은 소리는 뭐지?’
—지금 그대 눈앞에 있지 않은가.
“……!!!”
‘책, 책이 말을 해……?’
그 높은 폭포에서 떨어졌는데 살아 있는 것이 이상한 참이었다.
‘나 죽었구나, 죽은 거야…….’
도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아이고 억울해!! 아이고오오오!!”
어쩐지 이번 모임 죽어도 오기 싫더라니.
그렇다고 와서 죽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고!
아니, 잠깐만…….
‘감각이 이리 현실적인데 죽었다고?’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희가 제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손길이 닿는 곳 족족 더없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귓가를 때리는 물줄기 소리는 여전하고, 그 물줄기로부터 튄 물 한두 방울이 볼에 와 닿았다.
오른쪽 신발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딛고 선 땅의 울퉁불퉁함과 서늘한 한기마저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나는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아니면… 죽어도 감각이 다 느껴지나? 사후 세계가 있었어……?’
—그대가 죽은 것도 아니고.
‘그럼 말하는 책은 뭐야. 음성 지원인가? 만지면 소리 나는 책?’
—나는 이 서책도 아닐세. 그 속에 담긴 혼(魂)일 뿐이지.
다소 시끄럽게 느껴지는 폭포 소리를 뚫고 선명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 호… 혼이요? 영혼 할 때, 그 혼?”
떨어질 때 어디 돌부리에 머리라도 부딪혔나?
아님,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술이 덜 깼나?
이거 무슨 환상이나 망각 증상인가?
—환상이나 망각은 더더욱 아닐세.
도희의 입이 떡 하니 벌어지더니, 그녀의 눈빛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방금 저 생각을 말로 했나?’
—그대가 말로 굳이 하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네.
순간 도희의 모든 사고 회로가 멈춰 섰다.
너무 많은 생각이 뒤엉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꿈벅, 꿈벅.
눈만 깜빡이던 도희는 이내 자신의 머리털을 있는 대로 쥐어뜯으며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 시X.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살다 살다 폭포에서 떨어진 것도 믿기지 않는데, 말하는 책? 또 뭐? 생각을 읽어? 하. 그래, 영화에 나올 만한 폭포 뒤 동굴인데 뭔들 없겠어. 아니, 이거 꿈인가?!”
찰싹!
아프다.
오른쪽 뺨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아픔과 동시에 맑아지는 정신.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이미 자각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비현실적인 지금의 상황.
그걸 지켜보는 양피지 서책.
아니 혼?
아니 애초에 지켜본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듣고 있다? 것도 아니네.
듣긴 뭘 들어,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데.
살면서 본인의 머리가 나쁘다 생각해 본 적 없는 도희였지만, 오늘처럼 머릿속이 캄캄한 날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어떤 말로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지 감이 서지 않았다.
도리도리.
도희는 한차례 머리를 흔들더니, 바닥에 떨어진 책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이 목소리는 책 속에 담긴 혼의 목소리고, 제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신다구요?”
들은 대로 말은 내뱉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났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정신을 다잡으니 근본적인 물음이 떠올랐다.
“도대체 어떻게요?”
연이어 그녀 평생 애써 부정하던 단어가 떠오른다.
절대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던…….
“혹시…… 귀신이세요?”
—본래 죽은 혼(魂)이 지상을 떠돌다 보면 귀(鬼)가 되긴 하네만. 난 그저 혼일세. 또한 난 신(神)은 아니네. 혼만 남은 도인이 어찌 신을 자처하겠는가.
뭐라는 거야.
‘죽은 혼? 귀신이잖아!’
한평생 겁 없이 살았지만, 귀신은 무서웠다.
실체가 있는 사람이라면 같이 때리고, 싸우고 반항이라도 할 수 있다.
허나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영적인 존재를 어찌한단 말인가.
잔인한 살인마 영화는 봐도 귀신 영화만큼은 절대 보지 않던 그녀였다.
도희의 의식이 점점 혼미해질 무렵, 다시금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나는 도를 따르는 도사의 혼일뿐이네. 두려워할 필요 없네. 그저 사특한 도사에게 당해 이 서책에 혼이 갇힌…….
“허! 도사요?”
갈수록 태산이다.
이젠 도사란다.
“‘도를 아십니까’ 의 그 도사요?”
—오호, 자네가 도를 아는가?
‘허허. 아니요. 제가 도를 어찌 알겠어요.’
헛웃음이 난다.
도사라니… 책 속에 혼이 갇힌 말하는 도사라니.
생각을 읽는 도사라니!!!
“하… 하…….”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희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이마를 매만졌다.
—그렇네. 내 비록 사특한 도사에게 당해 이 모습이네만, 도를 따르는…….
“도사요? 산에서 도 닦는 그 도사요?”
—크흠. 그렇네. 그러니 다시 묻지. 그대는 정의로운가?
책이 헛기침도 한다.
‘뭐야, 몰래 카메라야?’
동굴 속 어딘가에 누군가 숨어서 이 장난 짓거리를 하는 건 아닌지.
도희의 눈은 연신 동굴 곳곳을 살폈다.
…그럴 만한 공간은 없다.
—정의로운지 답하는 게 그리 어려운가?
“정의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얼마나 정의로운지 논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정의로운 편에 속한다.
적어도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은 하지 않았고, 딱히 범법을 저지른 적도 없다.
그렇다고 정의롭다고 하기엔 나서서 크게 정의로운 행동을 한 적도 없다.
‘내 코가 석 자라.’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사는데 누굴 도울 여력이 있을 리가.
물론 눈앞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의 도움을 거절한 적은 없었다.
눈 감고 아는 걸 모르는 척, 못 들은 척하는 것보다 그저 작게나마 도울 수 있는 만큼 돕는 게 더 속 편했다.
그들을 위해서 도운 건지.
내 속 편하자고 도운 건지.
고민의 기로에 서서 정의란 무엇인가 생각이 깊어질 때쯤.
—되었네. 자네 정도면 충분하네.
“엥, 전 아직 대답을 정하지 않았는데요?”
이내 원인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대는 본 좌가 행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 큰 부족함은 없네.
도희가 아무 대답이 없자 도사는 말을 보탰다.
—도기(道氣)와 총기(聰氣) 또한 보이니 맞춤일세. 자, 이제 서책에 손을 대보게.
‘뭔 말이야, 대체.’
도저히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던 그녀는 하나씩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도희가 책에서 반보 뒤로 물러났다.
“손을 대면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의문스럽다는 표정의 도희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방금은 생각 없이 손댄 서책이지만, 지금은 반쯤 펼쳐진 채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대가 나를 도와 정의를 행할 수 있네.
정의를 행한다?
도사를 도와서?
어떻게?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제가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