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그, 그게 무슨!”
미소 띤 도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가 거짓을 말해도 이들은 확인할 길이 없다.
‘마 부장, 너도 당해 봐.’
“내가 언제 자넬 밀었나! 자네가 혼자 뒤로……!”
당황한 마 부장의 입에서 모두가 놀랄 발언이 튀어나왔다.
“……!!!”
놀란 사람들이 마 부장과 도희를 번갈아 쳐다봤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혼자 떨어지지 않았냐고.
마 부장을 보는 부서원들의 눈엔 경악과 혐오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직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이도 몇 있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매일 얼굴 보며 같이 지낸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자네가 혼자 내려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일세!”
“부장님은 됐고, 다음 서 대리.”
홀로 멀찍이 서 있던 서 대리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마 부장 못지않게 이 상황이 불편한 서 대리의 고개가 점점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서 대리, 나한테 할 말 없어?”
그가 고개를 들었다.
태연한 척 도희를 바라보지만, 그의 손은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
“계속 그렇게 살아. 너라곤 안 버리겠냐, 저 인간이?”
팔짱을 낀 도희가 고갯짓으로 마 부장을 가리켰다.
“강도희이이!!”
“왜 마형서어억!!!”
“……!!!”
이어 악에 받친 도희의 말이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마 부장과 서 대리는 내가 폭포로 떨어지는 걸 똑똑히 보았고!”
도희는 한 걸음씩 천천히 마 부장에게 다가갔다.
“죽든지 말든지 신고도 하지 않았으며! 내가 먼저 갔다며 거짓말까지 했지!”
말하다 보니까 더 열 받네.
“뭐 나중에 산에서 내 시체가 발견된다고 한들 혼자 하산하다 실족사한 것처럼 꾸미려고 한 거야? 진짜 죽을 수도 있었어. 천운이 도왔지. 보통이라면 무조건 죽었을 거야.”
마 부장의 속내를 듣는 도사가 아니었다면 도희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싸늘한 눈빛으로 서 대리를 잠깐 쳐다본 도희는 마 부장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신고했으면 구조 당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파르르 떨리던 도희의 눈꺼풀이 감겼다 다시 떠지며 마 부장을 쏘아봤다.
“당신들은 그러지 않았잖아?”
주위에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지만, 숨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도희의 긴 외침 동안 누구도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짧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그 고요함을 깬 한마디는 충격적이었다.
“안 죽었잖아.”
“뭐?”
“그래서 도희씨가 지금 죽었어?”
순간 도희의 입 안 가득 욕이 담겼다.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 차마 뱉진 못했지만.
“서 대리.”
도희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네 행동에 대해 합리화하고 싶은 모양인데.”
도희의 발길은 다시 서 대리에게 향했다.
“내가 살아온 건 기적이고.”
‘도사님 덕분인지, 때문인지! 아오!’
—크흠.
어쨌든 진짜 도희 홀로 사고를 당했어도 구하지 않을 이들이었다.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라고 알아?”
“…….”
“위험에 빠져 죽을 수 있는 상황을 알면서, 구조하지 않고 그 의무를 저버리는 행동은 살인과 같은 행위로 평가된대.”
“이, 이 미친 것이!”
서 대리가 대꾸 없이 고개를 숙이자, 이번엔 마 부장이 끼어들었다.
“뭐? 말해. 미친 것이 뭐?”
“나와!”
마 부장은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도희를 데리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억울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는 꼴만 보자면 그가 진정 피해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상황을 지켜본 많은 이들에겐 이미 결론 내려진 뒤였다.
도희 말이 사실이 아닐까 하는.
당장 서 대리의 얼굴만 봐도 나라 말아먹은 죄인의 얼굴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마 부장의 행동도 너무 이상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아는 강도희는 거짓말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작은 소곤거림이 점차 큰 웅성거림으로 바뀌어 간다.
“나오긴 뭘 나와야.”
도희는 가방에서 흰 무언가를 꺼내더니, 마 부장 얼굴을 향해 힘껏 던졌다.
탁!
흰 봉투 하나가 마 부장의 옆통수를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난 간다. 마 부장 새끼야. 지옥에나 가라.”
“강도희이이이이!!!”
사람들을 헤치며 쿨하게 뒤돌아서 걸어가는 도희의 오른손이 하늘을 향해 뻗더니, 가운데 손가락이 올라온다.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마 부장은 당장이라도 도희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물론, 막아서는 이들을 제치기엔 역부족이었다.
상사 얼굴에 사직서 던지고 나간다는 말을 실행하는 이가 있을까 싶지만.
어마무시한 실행력을 갖춘 그 돌아이가 여기 있었다.
마 부장은 이제 서서히 부서져 갈 것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뒤에서 마 부장이 무어라 소리치는 듯했지만, 곧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묻혀 버렸다.
도희가 엘리베이터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도 도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경악과 충격에 빠진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도희와 친한 이들은 이성을 잃은 마 부장을 말리느라 바빴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힐 때였다.
“도희씨.”
불쑥 손 하나가 들어오더니 누군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다.
“아, 이도하씨. 오랜만이에요.”
“제 이름을 아시네요…….”
“회사에 도하씨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도희가 싱긋 웃어 보였다.
도하가 보고 싶던 바로 그 미소였다.
무언가 말 걸 것처럼 보이던 도하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도희를 바라본다.
‘뭐지?’
도희도 멀뚱멀뚱 도하를 마주 봤다.
띵—
곧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저 내려야 하는데.”
도하는 도희를 마주 보고 선 채 입구를 막고 있었다.
“바래다 드릴게요.”
“네?”
‘갑자기?’
“같은 방향이에요.”
“저랑요? 저희 집 아세요?”
“아… 도희씨 실종되었단 소식 듣고 알아봤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도하는 단호한 목소리로 허리까지 숙여 가며 정중히 사과했다.
‘소문대로 엄청 정직하네.’
“큭.”
도희가 짧게 영문 모를 웃음소리를 냈다.
“아, 죄송해요. 기분 안 나빠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거의 동시에 나온 말이었다.
‘빈말은 모른다는 냉미남에게 이런 소릴 듣다니.’
도희는 자신이 큰일을 겪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도하씨.”
이어 도희가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근데 도하씨, 퇴근 시간 멀지 않았나요?”
“…….”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멍청하다 느낀 도하였다.
* * *
도희는 단잠에 빠져 있었다.
오랜만에 갖는 낮잠이 얼마나 달콤한지,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띵동— 띵동—
그때, 현관문 벨이 울리고, 잠시 후 도희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도희가 반쯤 감긴 눈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강도희! 문 열어, 문!
연이어 누군가 현관문을 쾅쾅 두드린다.
“끄응.”
억지로 몸을 일으킨 도희가 문을 열었다.
“세상에. 잤어? 밖에 폭탄을 던져 놓고 혼자 잘 잤네?”
“강아야.”
도희는 금세 소파에 엎어져 누워 있었다.
“나 이제 백수야. 크흐흐…….”
“알아. 너 아직 인터넷 안 봤어?!”
“인터넷? 왜?”
“네 이야기 다 올라왔어!”
“뭐?!”
잠이 확 달아난 도희가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
‘나 뭐? 혹시 걸렸나? 거짓말한 거?!’
“너희 회사 사람이 글 올렸어. 오늘 너희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랑 너 사직서 부장 얼굴에 던지고 엿 날리고 나온 거까지 전부.”
“아, 난 또…….”
그것까진 생각 못 했는데.
“조회수 장난 아니야, 거의 음성 기록 수준으로 올렸던데? 사이다긴 하더라. 크크.”
어차피 이제 뒤처리는 그들 몫이었다.
“끄응. 내 이미지 어떡하지 강아야? 성질 드러운 거 동네방네 소문 다 났네.”
말과는 다르게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마 부장은 실명까지 거론되던데? 근데 그 부장 사고 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봐.”
“엥?”
“마 부장 실체를 고발한다는 글이 올라왔어. 그것도 성. 추. 행.”
“성희롱도 아니고 성추행?”
“사내에서 일어난 일이라서 감사과에 신고까지 했나 봐. 근데 묻혔대. 그리고 자기는 바로 회사 나왔다던데.”
“그럼 우리 회사 사람이라는 말이네? 난 왜 처음 듣지?”
“그게 그때 감사과에 이야기한 뒤에 마 부장이 찾아와서 이직 이야기를 했대.”
“뭐라고?”
“서로 같은 공간에서 얼굴 붉히면서 일하기 힘들지 않겠냐고, 그러고 나서 회사에 소문 안 내는 조건으로 이직시켜 줬대.”
“허어, 평소에 살짝 선 넘을 듯 말 듯한 농담을 자주 하긴 했는데…….”
추행이라니.
생각보다 더 미친 종자였네.
당한 사람은 뭔 죄야 진짜.
‘누구지?’
마 부장 때문에 이직하고 퇴사한 이가 어디 한둘인가.
“근데 마 부장 입김으로 이직까지 했다면 지금 터트려도 보복성 대우가 있을 텐데, 마 부장 성격에 충분히…….”
절대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방금 회사 일로 마 부장이 보내는 욕설 문자와 전화 때문에 도희도 전화기를 꺼둔 상태였다.
도희야 사직서 던지고 나왔으니 마 부장 입장에선 어쩔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뻗치는 곳이라면 말이 달랐다.
“이미 퇴사했대. 자기에게 저지른 만행도 폭로하고 싶다고 글 썼더라. 아주 개X끼라고.”
그가 저지른 지난 악행이 끝내 흔적이 되어 그를 붙잡고 늘어진다.
‘모든 악행은 결국 본인에게 돌아간다는 건가.’
—그것이 순리네.
“아, 깜짝이야.”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시지.’
—깜빡이가 무어냐? 뭘 그리 놀라느냐.
“강아야, 넌 적응돼?”
그때, 도희의 눈에 입은 살짝 벌어진 채 여기저길 훑는 강아의 모습이 보였다.
‘풉, 역시나.’
“…도사님 안녕하세요.”
서책이 보이지 않아 허공에 대고 인사하는 강아였다.
—무서워 말게. 귀신도 아니고 해치지도 않으니.
“푸흐… 풉.”
“웃지마. 강도희.”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도희였다.
“강아야, 어차피 도사님은 못 속여. 그냥 편하게 생각하고 편하게 말해. 뭐 어쩔 거야, 생각을 막을 순 없잖아.”
—너는 좀 가려 생각하는 게 어떠냐.
“에이, 생각을 어떻게 가려서 해요. 그냥 막, 막 떠오르는 건데!”
목소리만 들리는 도사와 투닥거리는 도희.
강아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그리 큰일은 겪었는데… 왜 이리 태연한 거야, 얘는.’
강아가 말없이 물끄러미 도희를 바라본다.
‘이제 뭐 먹고 살려고…….’
사막에 떨어져도, 선인장으로 김치 담가 먹을 생활력을 가진 애라 크게 걱정은 안 되지만.
강아는 도희가 생각 없이 행동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아, 가끔 눈 돌아갔을 때 빼고.’
물론 알아서 잘하겠지만 은근 걱정이 되는 걸 어쩐다.
“강도희, 너 이제 뭐 할 거야?”
“배고파! 밥 먹자.”
“아니. 오늘 말고 앞으로 말이야. 앞으로.”
“음…….”
도희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고민에 잠겼다.
‘설마 너 아무 생각 없이 지른 거니?’
“너 설마…….”
“나 이제 뭐하지 강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