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요물(妖物)
도희는 문득 어릴 적, 엄마가 사 준 요술봉이 떠올랐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하트 요술봉을 휘두르며 온 집안을 신나게 휘젓고 다녔는데, 먹고 싶거나 갖고 싶은 걸 말하면 바로 이루어지곤 했다.
그 요술봉을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지금도 찾아보면 베란다에 쌓인 박스 중 어딘가에 있을 거다.
물론 그 시절 도희도 알았다.
요술봉의 힘이 아닌 엄마의 애정이라는 걸.
‘그놈의 돈이 뭔지…….’
—어찌 그러는 게냐.
“아니에요.”
—내 살다 제 어미를 떠올리며 노기(怒氣)를 끓는 자식은 처음 보이.
“노기 아니고 걱정이에요. 걱정.”
‘어미’라는 단어에 눈치를 보던 강아가 슬쩍 도희의 손등 위로 손을 올렸다.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식 버리고 잘 먹고 잘사는지 싶은 걱정.”
‘고양이 한 마리, 고양이 두 마리, 고양이 세 마리…….’
이윽고 더 이상 생각하기 싫은지, 도희는 애써 고양이를 떠올리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강아의 속마음을 들은 도사가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사연 없는 자 없다지만 이 아이도 참… 기구하네, 기구허이.’
—한 가지 물건엔 하나의 도술이 새겨져 있네.
고양이를 세던 도희의 생각이 멈춰지더니 눈동자가 사방팔방 굴러다닌다.
“예를 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접선(摺扇)이라든가, 환상을 보여 주는 동경(銅鏡) 같은 것들일세.
도희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애매한 표정이 떠올랐다.
“부채랑 거울이요?”
바람 가지고 뭐해.
‘환상을 보여줘? 것도 딱히 안 끌리는데.’
환상은 말 그대로 환상이다.
흥미롭긴 하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도희가 짧게 혀를 차며, 요물들을 쓸모없다 여길 때쯤.
혹여 도희가 욕심낼까, 별 볼 일 없는 요물들을 읊은 도사는 은근 마음이 상했다.
—복을 가져오는 복주머니라든가…….
“뭐, 복주머니 가지고 있으면 복권이라도 당첨되나요?”
—그것이 무엇…….
“아니에요. 그 정도 행운의 부적이라면 이미 그 복주머니를 가진 사람이 수도 없이 중복 당첨됐겠죠.”
도사는 심드렁하게 혼자 말을 갈무리하는 도희를 보니 괜한 승부욕이 생겼다.
역시 이 여인은 도사의 뜻대로 생각해 주지 않는다.
—설마 그것뿐이겠는가.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는 목걸이라든가, 어떠한 병이든 고치는 침…….
“병을 고치는 침이요?”
“어떠한 병이든지요?”
상기된 목소리의 강아가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허허, 그렇네. 어떠한 ‘병’이든 고칠 수 있네.
“허어…….”
도희와 강아가 시선을 교환했다.
‘한의원을 확 차려?’
“우리 엄마 심장 안 좋으신대…….”
순간 도희가 움찔하며 강아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내내 잠자코 있던 강아의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단, 한 번만 사용 가능하네.
‘엥?’
“뭐야. 전부 일회용이에요?”
일회용이라 치더라도 침 한 방에 모든 병을 치료한다니 어마어마했다.
누구든지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면 천금을 주더라도 병을 고치고 싶어 할 테니.
—그것은 아닐세.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가락지’나, 바람을 부리는 ‘접선(摺扇)’ 같은 것들은 물건이 부서지지 않는 한 얼마든지 쓸 수 있네.
도희와 강아의 눈이 또 한 번 맞닿았다.
“공간 이동 반지요?!”
“미쳤다.”
벌떡 일어서 서책을 집어 든 도희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강아.
속마음 읽는 서책도 있는데, 신기하고 요상한 물건이 더 있을 수도 있단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근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세상엔 생각보다 더 굉장한 물건들이 존재하는 듯했다.
도사님을 알게 된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그 물건들을 찾더라도 내가 관리할 생각이네.
“네? 찾는 건 내가 찾는데?”
—악인(惡人)을 쫓으라는 말 기억하는가?
강아는 ‘악인’이란 생소한 단어가 등장하자, 뜻 모를 대화에 멀뚱멀뚱 도희만 쳐다봤다.
—그 일을 행하다 필요해지면, 그땐 잠시 빌려주겠네.
“도사님. 그럼 전 남는 게 뭔가요?”
—그것들을 사사로이 쓰는 건 불가하네.
요물 찾아줘!
악인 쫓아줘!
도사님 하란 대로 다 해줘!
“저는요? 그럼 저는요? 도사님?”
대체 재물은 언제 따라오나요!
차마 내지를 순 없어 속으로만 소리치는 도희였다.
띵동— 띵동—
그때, 강아 말곤 울릴 일 없는 초인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희의 시선이 현관문을 향했다 다시 강아를 향한다.
“너 말고 우리 집에 올 사람이 있냐?”
“네가 알지, 내가 알어?”
“없는데…….”
띵동— 띵동— 띵동!
“얼른 나가 봐. 뭐 죄지었어?”
“…어. 좀 많이?”
“아휴…….”
아무리 친구라도 차마 아니라고 말 못 해주는 솔직한 강아였다.
* * *
도심 속 한적한 카페.
도희의 맞은편엔 낯선 이가 앉아 있다.
그의 외모는 젊은이라고 하기도, 중년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너무 불쑥 찾아온 건 아닌지, 죄송합니다.”
그가 다시 한 번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도사님과 한창 중요한 딜(?) 중이긴 했지만, 뭐 어쩌겠나.
도희의 휴대전화가 꺼져 있어 불가피하게 집까지 찾아오셨단다.
다소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도희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왜 찾아온 거지?’
그녀를 찾아온 이는 화정그룹의 상무이사였다.
도희가 다닌 화정기획은 계열사를 몇 개나 가지고 있는 오너 그룹가의 자회사였다.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사원이 그만둔다고 이사들이 찾아오진 않는다.
도희가 다닌 대기업에선 더더욱 일개 사원이 퇴사했다고 이사가 찾아오진 않았다.
물론 도희는 그냥 그만둔 사원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지만.
‘내가 사고를 너무 크게 쳤나?’
아니 근데 뭐 어쩔 거야.
이미 퇴사한 사람 징계할 수도 없잖아?
마땅한 징계 사유도 없다.
‘……없나?’
마지막에 마 부장 얼굴에 사직서 던진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한데…….
“강도희씨?”
“네.”
‘당당하게 어깨 펴 강도희!’
도희의 입가에는 자연스러운 사무용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회사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네?”
갑자기요?
그걸 왜 저에게 물으시나요…….
‘뭐야? 사칭인가?’
도희의 시선이 아까 받아 둔 테이블 위의 명함으로 향했다.
[ 화정그룹 상무이사 전기석 ]
‘명함이 가짜 같진 않은데…….’
눈가에 주름 하나 없는 것이, 이사라는 직함을 갖기엔 너무 젊어 보였다.
‘관리를 잘했나?’
순간 구겨질 뻔한 표정을 겨우 관리한 도희가 되물었다.
“외람되지만 왜 물어보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말 그대로입니다. 강도희씨가 생각하는 회사의 문제점,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전 상무에 말에 도희는 피식 웃어 보였다.
“아니요. 저는 그 문제를 왜 물어보시는지 여쭤보는 거예요.”
난데없는 도희의 웃음에 전 상무의 얼굴에 황당함이 들어찼다.
잠시 멈칫하던 그는 침묵을 유지하더니,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상무님의 의도에 따라서 제 대답이 달라질 테니까요.”
‘솔직하게 깔 건 까고 가자고요.’
전 상무는 몰랐다.
원래도 무서울 게 없는 그녀지만, 퇴사한 도희는 더 무서울 게 없다는 것을.
대화의 주도권이 도희에게 넘어갔다.
전 상무가 의도대로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선 승기를 이끌어와야만 했다.
고민에 빠진 그는 애꿎은 커피잔을 만져댔다.
‘뒷조사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일개 대리란 이유로 그녀를 만만하게 본 것이 크나큰 착오였다.
“마형석 부장은 해고 조치되었습니다.”
마 부장 붙잡고 회사에서 난리 친 게 오늘 오전인데… 벌써 해고라니.
‘이렇게 빨리?’
“도희씨 일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럼요?”
“회사 감사팀도 마 부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다수의 폭언, 성희롱 이력과 직권 남용, 업무 갈취 등으로 조사 중이었습니다.”
‘허… 조사 중이었다니? 너무 뻔한 거짓말을 하시네.’
그래, 조사는 했겠지.
다만 터트릴 생각이 없었겠지.
‘진상 상사’ 깡그리 끌어모은 그 이력들이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닐 텐데!
‘근데 왜……? 내 일 때문에?’
아니라곤 하지만 타이밍이 절묘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도희를 보던 전 상무는 말을 이었다.
“강도희씨 일은 개인적으로 정말 유감입니다. 이런 사건으로 강도희씨 같은 인재를 잃는 것 같아 회사 입장으로 보아도 많이 아쉽습니다.”
‘개인적으로만 유감이다?’
전 상무의 말은 이번 사건과 회사의 사이에 확실한 선을 긋고 있었다.
하긴 엄밀히 따지자면 회사는 이 사건과 관계없었다.
‘근데 마 부장은 다르지.’
“인터넷에 마 부장 성추행 관련 글이 올라왔던데 보셨나요?”
당시 성추행 사건을 막은 것이 마 부장 혼자만의 요행은 아닐 거다.
‘그룹 내 계열사 이직까지 한달음에 이어진 걸 보면 회사의 동조가 있었을 텐데.’
“감사팀에서 정리한 사건이지만 재조사 중입니다. 피해자 분께서 원하신다면 법적 처벌까지 저희 법무팀에서 도와드릴 생각입니다.”
도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켰다.
이미 도려낸 마 부장 다시 한 번 칼질하는 것이 뭐 어려울까.
‘피해자니, 법적 처벌이니 운운하는 걸 보니 다 알고 있었네.’
“이미 회사 감사팀에서 정리한 사건을 들추신다는 건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처벌하시겠다는 건가요?”
“당시 부적절한 조치가 있었다면 관련자들도 징계 조치 내릴 예정입니다. 당연한 처사입니다.”
“그래요. 그 당연한 처사를 이제야 실행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그야 말씀드렸다시피…….”
“감사팀도 마 부장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뻔한 거짓말은 빼고요.”
다소 놀란 표정의 전 상무가 침묵을 유지하며 도희를 빤히 바라봤다.
“사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쎄하다. 어째 말투가 딱…….’
“강도희씨에게 부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