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14)화 (14/120)

013화 왜 찾아오신 건가요?

전 상무는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도희를 일단 그저 지켜봤다.

곧 그녀는 뭔가 결심한 듯 전 상무의 눈을 곧게 응시했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전 상무도 그 눈빛을 곧이 받아냈다.

수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먼저 입을 뗀 것은 전 상무였다.

그의 입가엔 뜻 모를 미소가 걸려 있었다.

“대화의 진행을 위해선 솔직하게 말씀드려야겠네요. 이번 일로 회사가 입은 이미지 타격이 꽤 큽니다.”

‘타격? 무슨 타격?’

“도희씨도 아시다시피 회사는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이런 사건에 이름이 거론된 것만으로도 대중들에겐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기 마련입니다.”

도희는 전 상무 말에 어폐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내 모임 중 일어난 일이다 보니 회사가 거론되긴 했지만, 회사에 큰 타격이랄 게 없어 보였다.

“상무님 말씀대로 이번 일과 회사는 전혀 관련 없기에, 마 부장 징계 소식만 전해져도 상무님이 생각하시는 부정적 시선은 금방 거두어질 텐데요.”

마 부장 해고만으로도 회사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저희 사장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시나 봅니다.”

여기서 사장님이 왜 나와?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그 젊은 사장?’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사에서도 정치와 라인이 존재하는 거 아시죠?”

어느 회사든 사내 정치와 줄타기가 존재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든, 직간접적으로 사내 정치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 회사엔 대표적으로 부사장 라인과 장 전무 라인이 있다.

그중 마 부장은 노골적인 부사장 라인이었다.

마 부장과 사이가 좋지 않은 차 부장은 장 전무 라인.

평사원들이야, 부서 상사에게만 잘 보이면 그만이지만, 팀장급만 되어도 라인이 중요했다.

사내 정치 관심 없는 도희마저 ‘누구는 누구 라인이다’ 알 정도이니, 회사 내에 부사장과 장 전무의 알력 싸움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네. 알고는 있습니다.”

도희가 조심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사장님은 우리 회사에 뿌리 깊은 부적절한 유착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 하십니다.”

새로 부임한 사장이 ‘전문 경영인’이라 들었다.

동안이라 생각했는데 진짜 젊은 거였나?

경험이 많이 없어?

‘사내 정치를 어떻게 뿌리 뽑겠단 말이지.’

눈에 보이는 나무뿌리라면 천 년 고목이라도 어떻게든 뽑을 수 있다.

한데 보이지 않는 알력 싸움을 어떻게 정리한단 말인가?

많든 적든 몇 명 이상의 사람이 모이는 곳엔, 그들 간 모종의 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주축들을 뿌리 뽑는다 한들 그 또한 일시적인 해결책일 뿐.

그 자리엔 새로운 이들의 새로운 관계가 자리 내릴 것이다.

“상무님은 아실 텐데요? 사내 정치는 외부 개입으로 정리하기 힘들다는 걸요.”

불가능이란 말을 싫어하는 그녀지만, 이건 정말 불가능했다.

“뿌리 뽑는다는 건 더더욱 힘들죠. 물론 대장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겠지만요.”

“사장님도 아십니다. 사내 정치를 뿌리 뽑아 없애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사내 정치는 회사 경영의 한 축이기도 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회사에 피해가 되는 ‘부적절한 유착 관계’만을 정리하고 싶어 하십니다.”

“마 부장 일로 드러난 게 많은가 보죠?”

“컥…….”

물 한 모금 들이켜다 사레가 들린 전 상무가 헛기침을 해댔다.

“아, 솔직하게 대화하자고 말씀하시길래.”

도희 손에 들린 커피잔이 천천히 그녀의 선분홍 입술에 닿았다.

그녀 입가에 옅게 띤 미소를 본 전 상무의 커진 눈은 작아질 기미가 없었다.

‘너무 솔직했나?’

“좀 더 솔직하게 여쭤볼게요. 절 왜 찾아오신 거죠?”

그녀의 무해한 미소와는 다른 뼈 있는 질문이었다.

보통의 사원과 이사의 관계였다면 다소 무례하다 느낄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도희에게 전 상무는 그저 낯선 이었다.

낯선 이가 찾아와 자꾸 빙빙 둘러말하며 시간만 뺏고 있지 않은가.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강도희씨의 사표 수리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건 또 무슨…….’

딱히 홧김에 사직서를 내던지고 나온 건 아니었다.

너무 쉼 없이 달려온 탓에 휴식기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도희는 성인이 된 후로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쉬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찾아보고 싶기도 했다.

당분간은 쉬며 놀 생각에 신났었는데…… 사표를 수리하지 않겠다니?

‘무엇보다 도사님이 말한 요물도 찾아야 하는…….’

탐탁지 않은 도희의 표정을 읽은 전 상무가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을 겪으셨으니 많이 힘드실 테지요. 강도희씨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람들에게 실망도 하셨겠지요.”

사람들에게 실망할 게 있나?

잘못은 마 부장이랑 서 대리가 했는데.

“물론 도희씨 입장 고려해서 근무 환경을 바꿔드릴 생각입니다. 부서 이동 어떠세요?”

“굳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는 이유가 있나요?”

“도희씨 같은 분이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회사를 떠나게 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도희보다 더 열성적으로 회사에 뼈 묻을 각오로 일하는 사원들은 널리고 널렸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다만 저는 조금 쉬고 싶어요. 사표는 수리된 걸로 알겠습니다.”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선 도희가 인사를 하려 허리를 숙였다.

“저, 저 강도희씨. 개선부서! 도희씨를 팀장으로 한 개선부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도희를 잡으려 어정쩡하게 따라 일어난 전 상무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개선부요? 팀장이요?”

한 톤 높아진 목소리의 도희가 다시 자리에 앉자, 전 상무는 안심하듯 말을 이었다.

“마 부장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건 빈말이 아닙니다. 다만 모든 회사에 존재하는 애매한 알력 관계들과 부적절한 관계들을 묻어 넘기려 했었습니다.”

그랬겠지.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남들 다 그렇게 넘어가니까.

문제를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완전히 없앨 수도 없을뿐더러,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요.”

“…….”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못 본 척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역시… 마 부장만 문제가 아니었구나.’

까도 까도 양파 같은 문제들이 계속해서 나왔겠지.

묻혀 버린 성추행 사건이 사실이라면 감사팀과도 연관 있겠네.

감사부장도 마 부장과 같은 부사장 라인이니 도운 건가.

친해 보이진 않던데.

“그 관계들을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원래는 감사 부서의 역할 같은데.”

“사람들 간의 관계를 정리시키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하죠.”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면 가능은 하죠. 애초에 누군가와 가깝다는 이유로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니까요.”

전 상무는 물끄러미 도희를 쳐다볼 뿐이다.

“회사는 회사잖아요? 일하기 위해 모인 곳이지, 편 가르기 하려 모인 곳은 아니죠.”

“근본적 문제 해결이라… 사장님과 비슷한 말씀을 하시네요.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심드렁한 전 상무의 표정을 본 도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포상이 내려지고, 그들이 예쁨 받는 건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해요.”

전 상무의 표정을 살핀 도희가 더 열성적으로 말을 이었다.

“월급 이외에도 동기 부여될 만한 보상은 필요하니까요. 이런 경우 서로 상부상조겠죠. 사원은 열심히 일하고 상사는 상을 내려주고.”

도희의 커피잔이 그녀의 입가에 짧게 닿았다가 떨어진다.

“열 손가락이 어떻게 똑같이 예쁘고 똑같이 아프겠어요. 개개인의 관계까지 컨트롤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도희의 말을 듣는 전 상무의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하지만 하나는 할 수 있죠. 그 관계들을 건강한 관계로 만들 순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힘들지 않을까요?”

“그럼 전 왜 찾아오신 건가요?”

회사 분위기라는 것은 중요하다.

사람들은 분위기에 휩쓸린다.

애초에 일 못 해도 줄만 잘 타면 승진도 하고 회사 생활이 펼 거라는 분위기가 문제였다.

편을 가르고, 내 편은 무조건 잘했고, 상대편은 무조건 잘못했다며 으르렁거리는 분위기 말이다.

실수하면 어!

부장이고 팀장이고 책임져야지!

책임지라고 책임자 자리에 앉힌 사람들이 부하직원들에게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니.

직급 높으면 아주 장땡이지!

‘아, 마 부장 생각했더니 갑자기 열 뻗치네.’

잠깐 무거운 정적이 둘 사이를 갈랐다.

전 상무의 시선이 카페 창밖을 향했다 다시 도희에게로 옮겨진다.

“……사실 이대로 도희씨가 그만두면, 회사 이미지에 타격 있을까 싶어 급히 제안한 거였습니다.”

“제 발로 나가는 거였는데요?”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내 문제는 가해자가 그만둔다고 한들 피해자도 그만두면 같이 처분 받았다 생각하죠. 설명해도 압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다수일 겁니다.”

회사 입장은 생각해 본 적 없는 도희였다.

“더불어 도희씨 이미지에 편승 좀 하려고 했습니다. 할 말 다 하는 당돌한 여성이 이끄는 개선부, 마치 돌격 부대 같지 않습니까?”

“제 이미지요?”

‘내 이미지랄 게 있나?’

“인터넷에 유명합니다. 도희씨.”

휴대전화는 꺼두고 인터넷상 글들은 강아에게 맡겨 뒀었다.

세상과 단절됐던 도희가 뭘 알겠는가.

“이번 사건 관련 기사가 내일 나갈 겁니다. 해당 사건 책임자인 마 부장 해고부터 도희씨 개선부 팀장 임명까지.”

산 넘어 산이다.

도희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불의에 맞서는 당찬 젊은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업고, 문제점을 개선하고 보완해서, 더 좋은 회사가 되겠다는 회사의 강력한 의지 표현.”

‘내가 무슨 불의에 맞서?’

엿 먹인 놈들에게 엿 돌려줬을 뿐인데…….

‘여튼 개선부 팀장이란 명함은 감투란 말이네.’

이번에 사장이 바뀐 것도 전임 사장 갑질 사건 영향이 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사장이 술집에서 진상 부리는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한동안 그 사건으로 도희 회사뿐 아니라 그룹 자체의 이미지도 많이 나빠졌었다.

전 상무 말대로라면 도희를 개선부서에 앉혀 놓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겐 파격적인 행보였다.

사고 친 부장 얼굴에 사직서 던지고 나간 여자가 이끄는 개선 부서라니.

무언가 바뀔 거라 기대할 법도 했다.

“도희씨는 부담 갖지 마시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되고, 뭐든 하셔도 됩니다. 전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말을 끝낸 전 상무가 도희를 빤히 바라봤지만, 도희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커피잔에 꽂혀 있다.

“저기 근데 하나 궁금한 게…….”

한참이 흐른 후 드디어 닫혀 있던 그녀의 입술이 떨어졌다.

“네. 말씀하십시오. 뭐든 솔직하게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연봉은……?”

어느새 사무용 미소를 장착한 도희가 고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발그레 웃어 보인다.

‘명색에 팀장인데… 많이 주세요. 많이.’

일렁이며 빛나는 도희의 눈빛을 받은 전 상무의 입가엔 떨떠름한 웃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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