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여긴 아니라고 해주세요.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바 테이블에 남자 두 명이 앉아 있다.
주변은 온통 어둡고, 머리 위 조명만이 그들 얼굴을 은은하게 비췄다.
“강도희씨 만만치 않았습니다.”
“큭, 첫 만남 소감치곤 강렬한데?”
전 상무에게 화정 그룹 이사라는 명함은 허울에 불과했다.
그는 이무혁 사장의 실질적인 비서였다.
비서인 그가 이사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이무혁이 화정 기획에 사장으로 부임할 때, 임원들을 견제하기 위해 내건 조건 중 하나였다.
“사장님은 강도희씨를 보시고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아니? 나도 듣기만 했지.”
무혁은 온더락 잔에 담긴 얼음을 바라보며 손으로 휘휘 돌려 저었다.
“멋있는 아가씨라 생각은 했어. 아주 화끈하던데?”
도희 사건을 전해 들었을 땐, 좀처럼 웃지 않는 그가 박장대소까지 터트렸었다.
아직도 웃기다는 듯, 미소를 지은 무혁이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화끈하긴 하더군요. 성격이 직진입니다. 직진. 돌려 말할 줄 모릅니다.”
“돌려 말하지 않는 거겠지.”
“만나 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럴 리가.”
지나치다 보긴 봤다.
그가 화정 기획에 첫 출근 하던 날.
누군지도 모르는 자신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던 그녀를.
그때 인상 깊었는지, 무혁은 사진을 보자마자 단박에 그녀를 알아봤다.
인사성 좋은 여성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찬 면도 있을 줄이야.’
“확실히 일은 잘할 거 같더군요. 사람이 올곧아요. 뒤가 구릴 것 같진 않습니다.”
“전 상무가 알아서 잘 챙겨줘. 지원 요청하면 최대한 도와주고.”
“뭘 하려고 할까요?”
“아무것도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놀 수 있게 도와줘.”
“하, 이제 팀장 비서 노릇까지 하게 생겼군요.”
전 상무가 자연스럽게 비워진 무혁의 술잔을 채웠다.
“명목상 감사 부서 밑으로 들어가야 할 거야. 감사부장 기분 나쁘지 않게 미리 언질해 주고.”
“기분 나쁠 게 뻔한 말을 하면서 어떻게 기분 안 나쁘게 말합니까. 저는 그런 재주는 없습니다.”
“알아서 잘 돌려 말해. 회사 이미지 단기 개선을 위한 전략적 인사이동이라고. 작은 팀 하나가 해봤자 뭘 하겠냐고.”
“거짓말도 잘하십니다.”
“틀린 말 아니잖아? 전부 말하지 않는다고 거짓은 아니지.”
“예. 그리고 강도희 팀장 일주일만 휴가 달랍니다.”
“그렇게 하라고 해.”
무혁의 시선이 지금 막 바 안으로 들어오는 젊은 여성을 위아래로 훑은 후 금방 거두어졌다.
“팀원은 지원으로 뽑겠답니다. 모든 부서에 메일 돌려서 자진 지원한 인원들 부서 이동 가능하냐고 묻더군요. 확인 후 연락 준다고 했습니다.”
‘강제 발령이 아니라 자원을 받는다라.’
어느 부서가 자기네 사원 빼간다는 메일을 좋아할까.
‘시작부터 전사를 뒤흔들 생각인가.’
“큭, 진짜 만만치 않은 아가씨네.”
‘하긴, 예고된 가시밭길에 진흙 정도 묻혀 간다고 더 힘들 것도 없겠지.’
현명한 건지, 멍청한 건지는 아직 좀 더 두고 볼 일이었다.
말없이 웃기만 하는 무혁을 전 상무가 묵묵히 바라본다.
“팀장 제외 4명. 과한 견제는 피해야겠지. 지원받은 인원 중 4명으로 구성하라고 해.”
평온하던 호수에 무언가 던져졌다.
속은 알 수 없으나 겉으론 잔물결 하나 없던 호수였다.
던져진 무언가로 인해 작은 파동이 일었고, 그 파동은 점차 제 몸집을 키워 간다.
아직은 알 수 없다.
그 파동에 무엇이 삼켜질지.
아님, 뱉어질지.
* * *
이른 아침.
화정기획 부사장실에 있는 이들 모두 숨 죽여 한 남자의 분노를 받아내고 있었다.
“개선부서? 개선부서어!?”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남색 수트 차림의 사내.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일 앞에 서 있는 빼빼 마른 중년 사내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분노에 찬 사내의 몸집은 마른 사내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죄송합니다. 막을 명분이 없었습니다.”
“감사부장, 씩이나, 되시면서, 자기 부서, 밑에, 팀, 하나 생기는 걸 못 막습니까?”
말이 끊길 때마다 부사장 황이재의 거친 손길이 중년 사내의 허리를 찔러댔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분명 존댓말인데, 그 말속에는 빈정거림이 가득했다.
잔뜩 치켜 올라간 검고 진한 눈썹, 날카로운 눈매, 비틀리며 올라간 한쪽 입술.
그의 거친 눈빛을 감사부장직을 맡고 있는 한 부장은 차마 받아내지 못했다.
부장의 고개는 한껏 꺾여, 목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한 부장의 행동은 가뜩이나 작고 마른 그의 몸집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뒤로 줄지어 서 있는 다른 직원들의 모습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였다.
삐딱하게 다릴 꼬고 책상 위에 걸터앉은 부사장 황이재.
그는 불편한 기색을 담아 서 있는 직원 모두를 천천히 훑었다.
“뭐, 나에게 죄송할 게 뭐 있나. 당신들이 힘들어지는 거지.”
부사장은 감사부를 주무르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다.
그를 부사장 자리에 오르게 한 일등 공신도 감사부로부터 나온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사 시절부터 감사부를 자신의 이들로 채우려고 얼마나 노력해 왔는가.
‘보나 마나 이무혁 사장 짓이겠지. 저번 회의 이후로 조용하더니 뒤에서 이런 짓을 벌여?’
입을 떼려던 감사부장은 일그러지는 부사장의 표정을 발견하곤,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뭣도 모르는 놈이 사장 자리도 거저 얻더니…….’
부사장은 처음부터 이무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의 자리를 꿰차더니, 이젠 진짜 주인 행세하는 꼴이라니.
‘껍데기뿐인 사장 자리라도 유지하려면 조용히 지내라고 그리 경고했는데.’
“팀장이 이번에 사고 친 그 아가씨라고?”
“예. 기획팀에 있던 강도희 대리입니다.”
기껏 공들여 키워 놓은 마 부장을 쳐냈을 때부터 도희와 부사장의 대립은 예고된 것이었다.
받은 대로 돌려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였다.
‘벌은 줘야겠지.’
자라나는 싹은 미리 잘라 내야 한다.
애초에 그의 공간에선 그의 것이 아니라면 싹을 틔울 수조차 없었다.
“잡아내. 이전 업무상 과실은 없는지, 사우들과 문제는 없는지, 없으면 개인적인 문제라도 꼬투리 잡을 거 있나 파봐.”
“예. 보고드리겠습니다.”
“없으면 알아서 만들어. 알지?”
“예. 착오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나가.”
고갯짓 하나로 홀로 남게 된 부사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상대에게 그의 미소가 보일 리가 없을진대, 부사장은 미소까지 지으며 친절 가득한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내 방으로 올라오세요.”
전화 받은 이의 대답은 상관없다는 듯, 통화를 바로 끊은 그는 지그시 창밖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 한가득 담기는 발아래 빌딩 숲.
그는 그가 가진 무엇 하나 다른 이에게 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까.”
홀로 남겨진 사무실에 그의 서늘한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무혁을 뭘로 보내야 하나.’
몹쓸 음모를 꾸미는 속마음과 달리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 * *
‘도사님 잘못 찾아온 거라고.’
도희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아니라고 해주세요.’
—기운이 점점 강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여기가 확실하네.
도희가 지금 서 있는 곳은 국립 박물관 앞이었다.
전날 전 상무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사는 요물의 기운을 감지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 다음날 찾기로 하고, 오늘 도사의 말대로 기운을 따라 찾아왔는데…….
‘미쳐버리겠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애초에 도사님이 살던 시대와 현시대 사이에 시간의 간극이 상당할 텐데.
무슨 배짱으로 고시대 유물을 쉽게 찾으리라 생각했던 걸까.
‘도사님 살던 시대가 언제쯤일까요?’
—육체를 잃어버렸을 때가 정덕(正德) 15년쯤 됐을 거네.
도희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검색에 들어갔다.
정덕 17년.
조선 11대 중종, 1522년.
‘허어!’
도희의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오, 오백 년…….’
무려 500년이다, 500년.
그저 어림짐작으로 오랜 시간이겠거니 한 시간의 차가 500년이란다.
‘도사님 그 물건들 너무 오래돼서 사용이나 가능할까요?’
—평범한 방법으로 파훼할 수 없는 물건들이네.
‘……요물(妖物)은 요물이란 말이네요.’
—친히 가서 확인해 보세.
‘잠깐만요! 도사님 여긴 박물관이라는 곳이에요. 나라에서 옛날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는 곳인데, 여기 있는 건 포기하시는 게 어떨까요?’
—예끼! 이놈아! 기필코 모두 회수해야 한다 하지 않았느냐!
‘박물관이라니요! 그것도 국립 박물관이라니. 무슨 수로 물건을 되찾아요. 손대는 순간 쫓겨날 걸요!’
그리고 놈이 아니라 년이라니까.
도희가 가방 속에 있는 서책을 힐끗 째려봤다.
박물관 안에 있는 유물을 무슨 수로 가지고 나온단 말인가.
그것도 무려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립 박물관이었다.
—가 보세! 여기서 날 샐 겐가?
‘아오!’
망설임이 잔뜩 묻은 도희의 발걸음은 쉬이 떨어질 줄 몰랐다.
‘궁금하긴 하니까 일단 가긴 하겠는데, 절대! 절대 이상한 짓 하시면 안 돼요!’
도사를 사고뭉치 취급하는 도희였다.
—아래로 내려가게.
—좌측이네. 좌측, 좌!
—앞으로 계속 걸어가게나. 여기서 우측.
—흐음… 이곳이 아닌데… 안으로 더 들어가 보게나.
—그래, 그래. 여기! 이곳이네!
도사의 말에 이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도희의 발이 어느 유리 벽 앞에 멈춰 선다.
그녀의 눈앞에는 물고기 그림이 그려진 길쭉한 물병 모양의 도자기가 있었다.
“분청사기, 물고기 무늬 병, 16세기.”
도자기 앞에 세워진 팻말을 읽어 내려가던 도희가 유심히 도자기를 살폈다.
‘도사님, 이 도자기가 맞아요?’
겉으로는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하얀색 호리병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다른 도자기들과 비교해 보아도 딱히 특별한 구석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맞긴 하네만, 하필… 끄응.
‘왜요? 이 도자기는 어떤 도술이 걸려 있어요?’
—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