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16)화 (16/120)

015화 몸으로 때우는 건 어떠세요?

‘뭔데요?’

—저 술병에 담은 액체를 마시면 필시 취한다네. 물이든, 술이든.

물을 넣어 마셔도 무조건 취한다니…….

무한 공짜 술이야?

‘풍류를 즐길 줄 아시는 도사님이셨네.’

—풍류는 무슨. 쓸데없는 호승심과 아집(我執)의 결과지.

‘저 병으로 술내기라도 하셨나.’

—자넨 몰라도 되네. 이곳을 나라에서 관리한다고 하였는가? 윗사람을 만나 저 물건을 꼭 회수해야 한다고 부탁해 보자꾸나.

곤란한 표정의 도희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부탁한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책임자 만나서 뭐라 말해요? 죄송하지만, 이건 제가 아는 도사님이 사용하시던 물건입니다. 돌려받고 싶습니다. 이래요?’

—방법이 없다면 없애 버리는 수밖에.

“잠깐만요! 잠깐만!”

미련 없어 보이는 도사의 말투에 다급해진 도희의 입에서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 방법이 없나?’

도술 써서 몰래 이거 하나만 들고 나가면 티가 날까?

‘관리인들이 하나하나 다 기억할 거 같진 않은데.’

“흐음…….”

티가 날 거 같다.

도자기 하나만 사라져도 빈 공간이 너무 넓어진다.

‘아니면 환각? 환술로 여기 막 도자기 있는 것처럼…….’

아니야, 그걸 어떻게 유지 시켜.

‘골동품 가게에서 비슷하게 생긴 도자기 사 와서 바꿔치기해? 도사님이 그 정도 도술은 부리실 수 있겠지.’

“쯔읏.”

도희의 입에서 짧게 혀 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슷한 도자기를 어떻게 찾아. 하, 불법은 저지르기 싫은데… 대놓고 달라고 할 수도 없고.’

팔짱을 낀 도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빠져 있는데.

—비슷한 술병이 몇 병 더 있긴 하네.

‘더 있다고요? 구할 수 있어요?’

—다른 이에게 발견이 안 되었다면 아직 그곳에 있겠지.

‘아니, 그걸 왜 이제…….’

도희가 눈을 감더니 입술을 꽉 깨물었다.

—허!

‘너무 좋아서 그러죠. 갑시다.’

거기가 어딘가요.

*     *     *

산을 내려오는 도희의 등엔 얼기설기 묶인 봇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오, 내려갈 때 도술을 썼어야죠!’

—쯔쯧, 젊은 처녀 기가 이리 약해서야.

“아니!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 중인데!”

—허허. 네가 기가 허해지니 못 할 말이 없나 보구나.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도사의 비밀 거처가 있다는 말을 들은 직후, 박물관에서 나와 계룡산 주차장까지 운전만 3시간을 했다.

도사를 만난 오악산 폭포 뒤 동굴을 떠올려 보면, 계룡산 거처도 범상치 않은 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했었다.

어떻게 찾아가냐는 도희의 물음에 서책에 손을 올려 보라는 도사의 화답까지도 완벽했다.

손을 올리니 서책에서 붉디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 한번 깜빡이니 스산한 기운이 맴도는 어두컴컴한 동굴 안.

말하는 서책도 적응한 도희였지만, 마법같이 요상한 도술들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 그녀였다.

들뜬 것도 잠시, 어둠이 짙게 깔린 동굴 안은 뚜렷한 사물 분간이 힘들었다.

그나마 어렴풋이 시야가 잡히는 곳으로 고갤 돌리니 구부러져 꺾인 공간이 보였다.

꺾인 저 너머의 입구에서 빛이 옅게 스며드는 듯했는데, 거리가 꽤 멀어 보였다.

어둠 속에 발을 옮기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한 번 더 서책에 손을 올려 보라는 도사님의 말이 들렸다.

손을 올리자 서책에서 뿜어져 나온 주황빛이 공간을 희미하게 밝혔다.

딱 촛불 정도의 밝기였다.

성에 차지 않는 도희가 휴대전화를 꺼내 손전등 모드를 켰다.

새하얀 불빛에 캄캄하던 시야가 밝아지며 동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도사는 세상 참 좋아졌다며 머쓱해 했다.

넓지 않은 동굴 안 공간의 끄트머리.

척 봐도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은 흔적이 느껴지는 고가구들이 모여 있었다.

오른쪽 구석에는 꽤 높은 삼 층 책장 하나가 보였고, 그 옆으로는 책장 반쯤 오는 궤짝 하나.

또 그 옆에는 그보다 좀 더 작지만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궤짝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맞은편 벽에는 좌식 책상으로 보이는 가구도 하나 보였다.

—땅은 좀 파봤는가?

도희가 본래의 목적인 술병을 찾으려 발을 떼자, 뜬금없이 땅을 파야 된다는 도사.

도희의 기운이 이미 바닥나 도술은 쓸 수 없단다.

도사는 말 한마디 툭 던지면 끝이었지만, 몸을 쓰는 도희는 죽을 판이었다.

그렇게 도희는 궤짝과 궤짝 사이의 빈 공간을 한 시간 넘게 죽도록 파재꼈다.

‘미리 말해 줬으면 삽이라도 챙겨 왔지!’

평생 삽질 한 번 안 해본 도희가 삽이 있었다고 크게 다를까 싶지만.

‘손 보단 낫겠지! 손 보다! 아오.’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직전, 도희의 손에 돌과 흙이 아닌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이게 뭐야…….’

분명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지는데, 그 색이 흙색과 같은 갈색이었다.

‘항아리 뚜껑?’

윗부분만 파내서 열어 보니, 큰 독 안에 세 병의 술병이 담겨 있었다.

도희가 병들을 꺼내려는데, 닿은 손끝에 얼음장 같이 차가운 기운이 스몄다.

‘아오! 놓칠 뻔했네.’

도사님이 찬기를 유지하는 도법을 걸어 두셨단다.

아주 애주가 나셨다.

술병에 그려진 물고기 무늬를 보니, 박물관에서 본 도자기와 비슷했다.

‘그 시대에 유행한 흔한 무늬인가?’

물음도 잠시, 목적을 이루고 나니 책장과 궤짝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궁금해졌다.

삼 층 책장은 층마다 양쪽으로 열리는 문이 두 개씩 달려 있었다.

제일 아래 책장 문을 여니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와 흑빛 자개 보석함 하나가 보였다.

“도사님, 이 보자기는 뭐예요?”

—직접 풀어 보시게.

도희는 쭈그리고 앉아 조심스럽게 보자기의 매듭을 풀었다.

펼쳐진 보자기 위엔 작은 천 쪼가리가 놓여 있었다.

‘뭐야 이건?’

도희가 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팔 전체를 감싸는 포근한 감촉과 함께 두꺼운 이불이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도희가 소릴 지르며 팔을 뒤로 내뺐다.

—허허허. 이불보를 보고도 놀라는 게냐.

알고 보니 보자기도 요물이란다.

어떠한 물건이든 보자기로 감싸면 작아진다고.

도희는 횡재했다며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 기뻐하면서 눈에 보이는 족족 꾸역꾸역 모조리 보자기에 담아 챙기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도희의 입에 걸린 미소는 떠날 줄 몰랐다.

문제는 마지막에 터졌다.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했는데, 도희의 남은 기운으로는 도술 사용이 불가능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도희가 봇짐을 직접 메고 내려가야 했다.

투덜거리며 하산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니는 등산로가 아니라 애 좀 먹었다.

구르고 넘어지길 몇 번이나 반복해도 험악한 산길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되었다.

‘그나마 위치 확인은 가능하니 다행이지!’

지금은 휴대전화 지도를 보고 겨우 주차장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아오, 그놈의 기를 늘리던가 해야지!’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겪은 도희의 입은 댓 발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도사님 도술 부릴 땐 미리 어떤 도술인지 말 좀 해주시면 안 돼요?’

그녀는 말 한마디 할 힘도 없었다.

‘아까도 어? 괜히 쓸데없이 기만 날리고!’

손전등 일을 생각하니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주 작고 귀여운 빛을 내는 서책을 봤을 땐 이게 뭔가 했다.

‘굳이 도술을 쓰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구요!’

그리고 무작정 손을 올리라는 도사 말을 듣는 도희 입장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짐작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무리 도사라도 몰랐을 거다.

까마득하게 어린 후손에게 혼나게 될 줄을.

—끄응. 알았네, 내 참고하지.

‘기(氣)가 약하다, 모자라다 말씀하시는데 체력이랑 기(氣)는 다른 거예요?’

방금 전, 도사가 도희의 기가 약해져 도술을 부리지 못한다고 했을 때.

도희는 피곤하긴 했지만, 체력이 아예 없진 않았다.

—기(氣)는 육체의 힘만을 뜻하지 않는다네. 정신과 육체의 합이지. 한계에 다다른 상태에서 술법을 행한다면 그대의 육체를 갉아 먹었을 것이네.

‘그거나 이거나. 꼴을 보니 지금도 충분히 갉아 먹히…….’

—크흠…….

‘하. 언제 내려가냐.’

온몸이 쑤셔오는 도희였다.

*     *     *

계룡산에서 내려온 지 5일이 지났다.

며칠 동안 도희는 휴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바빴다.

사실 말만 휴가지, 쉬는 날이 없었다.

먼저 국립 박물관에 있던 술병은 무사히 바꿔치기를 끝냈다.

국보 취급받던 분청사기도 도사의 말을 듣고 나니 그저 술병에 불과했다.

그리고 술병은 어찌 바꾸나 고민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도사의 도술이 대단한 줄은 알았다.

그런데…….

‘시공간까지 멈추게 할 줄이야.’

물론 딱 10초.

술병 바꾸는 일도 겨우 성공시킨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10초 동안 도희를 제외한 온 세상이 멈춰 있었다.

술병 미션을 끝내고 나니 후폭풍이 밀려왔다.

일을 마친(?) 도희는 도사님과 함께라면 세계 제일 도둑은 따 놓았다며 농담했다가, 핀잔을 듣던 중 쓰러졌다.

또 그놈의 기(氣)를 몽땅 소진한 게 문제였다.

‘집에 도착하고 쓰러져서 천만다행이었지.’

자고 일어나니 이틀이나 지나 있었다.

도사님도 내가 쓰러질 줄은 몰랐던지, 깨어나 보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앞으론 술법을 더 신중히 쓰신다길래 그럼 ‘도둑질은 언제 하냐’ 농담했다가 또 혼이 났다.

쓰러져 있던 중 또 연락 안 되는 내가 걱정되어 강아가 찾아왔단다.

도사님이 대강 상황을 설명하니, 얼빠진 표정으로 돌아갔다고.

깨어난 후 강아에게 괜찮다는 전화를 걸었다가 ‘제발 평범하게 살 순 없냐’고 잔소리를 한 시간이나 들어야 했다.

잔소리를 듣다 못한 도희가 도사님이랑 엮었는데 어찌 평범하게 사냐니까 전화가 뚝 끊겼다.

그리고 몇 분 후 그녀의 휴대전화가 또 울렸다.

‘모르는 번혼데?’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강도희씨.

‘오, 목소리 뭐야.’

—저 인터뷰 도와드렸던 형사 우주라고 합니다. 기억하시나요?

‘아, 그 잘생긴 갈색 머리 형사?’

“네. 안녕하세요. 그때 일은 정말 감사드려요. 제가 먼저 감사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와, 진짜 고마우신 분인데.’

완전 깜빡 잊고 있었다.

—하하, 말로만요?

인터뷰가 끝나고 형사님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며 밥 한번 대접하고 싶다 했던 것이 떠올랐다.

“시간 나실 때 말씀하시면 식사 대접 한 번…….”

—돈 말고 몸으로 때우는 건 어떠세요?

“네?”

‘이 형사님 이런 컨셉 아니었는데?’

—내일 하루 시간 있으세요?

“시간은 되는데…….”

‘근데…… 몸으로 때우라니, 뭘?’

말끝을 흐리는 도희의 의중을 언뜻 알아챈 우주가 말을 이었다.

—아, 이상한 일 아닙니다! 다름이 아니라…….

우주에게 무슨 말을 듣는지, 도희 얼굴이 붉어졌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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