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17)화 (17/120)

016화 귀여워서 웃었어요.

삐이이이—

초록 불이던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자, 포순이 인형 옷을 입은 누군가가 급히 호루라기를 불었다.

곧, 그 포순이는 뒤뚱거리며 횡단보도 중앙으로 뛰어나간다.

그녀에게 인형 탈이 너무 컸던지, 뒤뚱거리며 뛸 때마다 인형 탈이 통통거리며 벗겨졌다, 씌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주인의 것으로 보이는 높이 묶어 올린 긴 머리의 꽁지가 살짝살짝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어린이 여러분, 손들고 천천히 건널게요. 천천히.”

한 손엔 호루라기, 다른 손엔 교통 지휘봉을 든 도희가 횡단보도 중앙에 서 있다.

“와아. 포순이다 포순이.”

“포순이 얼굴 엄청 커.”

“아니야. 얘 포돌이야. 바지 입었잖아!”

“포순이가 바지 입었을 수도 있잖아.”

‘아오. 더워죽겠네.’

“친구들, 저는 포순이에요. 호호호.”

“연기 더럽게 못 하네.”

“…….”

‘…하하하. 너 아주 솔직한 아이구나.’

인형 탈을 쓰고 있어 다행이었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떨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아이들은 거짓말을 못 한다.

고로 이건 연기를 더럽게 못 한 내 잘못.

“말 좀 예쁘게 해. 예의 없게.”

그때, 눈이 큰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쏘아보며 한마디 툭 던지더니, 획 지나쳐 가 버린다.

남자아이는 멀어져 가는 여자아이를 넋 놓고 바라본다.

어느새 아이의 눈엔 커다란 물방울이 그렁그렁 고이고 있었다.

“봉사 활동하시는 분이잖아. 연기를 못 하는 게 당연하지.”

뒤따라 걸어오던 다른 아이가 말을 보탰다.

“모세야,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예의가 없긴 했어. 괜찮아. 이제 알면 됐지.”

이목구비가 뚜렷한 바가지 머리의 모세라는 아이는 시무룩해진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위로하는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데리고 횡단보도를 마저 건넌다.

아이들이 길을 건너 검은 세단을 올라탈 때까지, 도희의 시선은 멍하니 그들을 쫓고 있었다.

고급 검은 세단 차량이 출발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시선이 거두어졌다.

‘이것이 초등학생들의 대화라니.’

우리나라 미래가 밝다고 해야 할지, 아님…….

아이들에게 ‘아이다움’을 강요하는 것도 옳진 않지만,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걸 알게 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아무것도 모른 채 즐기기만 해도 쏜살같이 지나갈 시절인데.

진정 산타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오고야 말았다.

그 시절에만 느끼고 가질 수 있는 환상과 설렘이 있는데…….

정답은 없지만 씁쓸함이 가시지 않는 건, 생각이 너무 많아진 탓일 거다.

—과한 생각은 독이 될 때도 있으니, 조금 비워 내거라.

‘도사님 저 며칠 산에 들어가서 명상도 하고, 원기 회복도 하고 올까요?’

유난히 기운이 없어 보이는 도희였다.

여러 감정이 공존하는 현재.

평소처럼 센 척할까도 싶지만, 속마음 읽는 도사님을 속일 방법 따윈 없었다.

팀장으로 근무하게 될 상황이 기대도 되지만, 막상 출근 날이 다가오니 출근이 어찌나 싫은지.

하긴 그래 봤자 직장인인데 출근을 어찌 반기리.

‘연봉 듣고 팀장직을 받아들이긴 했는데…….’

이름이 개선부지, 전 상무의 말은 썩은 줄을 도려내기 위해 들쑤시고 다녀달라는 소리였다.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길 바랄지도?’

어쩌다 정치 싸움에 끼게 되었지만, 도희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생각 따윈 없었다.

‘에휴, 그만 걱정해야지.’

끝없는 생각 꼬리잡기의 답은 없었다.

멍해졌던 도희가 제 머리를 털어냈다.

막상 일이 닥치면 자신이 잘해 낼 거라는 것을 도희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네 마음 가는 대로 행하거라.

‘그 말씀 후회하실 걸요.’

마음 같아선 며칠간 집에만 박혀 잠이나 자고 싶었다.

—그러거라. 쉼은 중하니.

‘저도 그러고 싶지만 이미 자본주의의 노예라서요.’

—노비도 아닌 것이 노비짓을 자처하는구나. 신분제가 폐지된 것도 아닌 듯허이.

도사님께 이미 많이 변해 버린 이 시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드렸었다.

물론, 띄엄띄엄 조각난 조선 역사에 대해 아는 대로 스르륵 떠올린 거뿐이지만.

‘자발적 노예라고 할까요. 돈맛을 알아버려서요.’

—쯔쯧, 물욕 넘치는 여인네 같으니.

모든 게 자급자족인 도희가 돈을 어찌 싫어하겠나.

학창 시절부터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하느라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는 도희였다.

하지만 이토록 휴식이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오죽하면 그토록 원하던 팀장직을 괜히 맡았나, 살짝 후회가 밀려올까.

근래 몰아닥친 여러 일 들로 겹겹이 피곤이 쌓인 상태였다.

‘출근하면 또 골치 아픈 일들 천지일 텐데.’

개인적인 시간을 침해받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그녀기에, 슬슬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회사 일을 병행하며 도사님을 도울 수 있을까.’

—크흠, 과한 생각은…….

도희는 문뜩, 아직 제대로 풀지도 못한 계룡산 봇짐이 생각났다.

‘도사님.’

—아직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니 욕심내지 말거라.

‘참나, 누가 욕심 난데요. 궁금해서 여쭤보려 한 거예요. 궁금해서.’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도희가 입술을 샐쭉 내민다.

꽤나 귀여웠지만, 도사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도사는 계룡산에서 내려 온 뒤로 도희가 봇짐에 ‘봇’ 자만 꺼내도 그녀를 타일렀다.

애초에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도 없던 도희는 괜히 오기가 생길 지경이었다.

무릇 사람 심리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지 않은가?

꼭 도희가 청개구리 심보를 가져서만은 아니었다.

‘참나, 구경한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도사의 강경한 태도에, 도희의 궁금증은 계속 커져만 갔다.

구경만 하겠다며 우길까도 싶었지만 사실 그럴 틈도 없었다.

‘에휴… 일단 큰불부터 꺼야지.’

틈틈이 회사 업무까지 보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전 상무와 만난 다음 날, 이야기한 대로 부서 이동 관련 전사 메일을 발송했다.

도희가 회사에서 보여 준 파격적인 행보 덕분인지 예상보다 젊은 지원자가 많았다.

팀원 선정에 대한 전적인 권리를 일임 받은 터라 인원을 선정한 뒤, 인사 발령 승인 메일을 기다리는 중이다.

인사 발령 후 업무 승계까지 감안하면 일주일은 더 소요될 게 뻔했다.

도희의 출근일은 이틀 뒤.

‘팀원도 없이 혼자 덜렁 출근하게 생겼네.’

신설팀이라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을 순 없지!’

개선부라는 이름값을 하기 위해선 앞으로의 업무 방향과 순서 등 기본적인 체계 확립이 필요했다.

도희도 덥석 팀장이라는 직함을 받고 나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군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무조건 하고 보는 그녀였다.

그렇게 도희가 새로운 시작에 대한 다부진 다짐을 하고 있을 때.

띠리리—

휴대전화 액정에 오늘 도희를 쉬지 못하게 한 주범인 우주 형사의 이름이 띄워졌다.

사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봉사활동이란 말에 마음 약해진 도희였다.

“여보세요.”

—도희씨 곧 끝나시죠?

슬슬 하교하는 어린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네, 그럴 거 같아요.”

—거의 다 왔어요. 학교 건너편 신호등에 서 계세요. 모셔다드릴게요.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 안 오셔도 됩니다.”

우주는 아침에도 기어코 집 앞까지 찾아와 도희를 이곳까지 태워다 줬다.

도희가 말을 끝내자마자, 반질반질 빛나는 흰색 SUV 외제 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선다.

차 창문이 내려지더니,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짓는 훤칠한 미남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도희씨!”

‘저 얼굴로 돈도 많아?’

세상 불공평하네.

“저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커다란 포순이 얼굴 탈을 옆구리에 낀 도희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겐 너무 커 보이는 인형 탈과 볼록 튀어나온 인형 배.

그 모습은 퍽 귀여웠다.

“아침에 옷 갈아입은 곳으로 태워드릴게요. 일단 타세요.”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뒷좌석에 인형 탈을 구겨 넣은 도희가 우주 옆 좌석에 낑낑거리며 올라탔다.

푸짐한 형태의 인형 옷을 입은 터라 조수석이 빈틈없이 꽉 들어찼다.

“푸…….”

끙끙대며 힘겹게 올라타는 도희를 보며, 우주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켰다.

억지로 웃음을 참는 우주의 모습이 느껴진 도희가 새초롬하게 우주를 바라봤다.

“그냥 웃으세요. 참는 게 더 이상해요.”

“크흡, 아니에요. 죄송해요.”

옅게 새어 나오는 우주의 웃음소리에 민망해진 도희는 고갤 돌려 시선을 창밖으로 내보냈다.

“웃겨서 웃는 거 아닙니다. 귀여워서 웃었어요, 귀여워서.”

티 나게 움찔한 도희의 눈길이 우주를 향했다 다시 급히 창밖을 향한다.

“뭘 그렇게 당황하세요.”

운전하며 힐끔힐끔 도희를 바라보는 우주.

“앞 보세요. 앞.”

도희와 눈이 마주친 우주는 웃어 보이더니,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아니, 형사님이 이런 성격이셨나?’

도희의 고개가 한껏 갸우뚱 기울어졌다.

한없이 순수하고 자상한 목소리로 저렇게 능글맞은 대사를 읊다니.

‘알수록 반전의 반전이네.’

그리고.

‘이렇게 잘생겼었어?’

첫 만남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그저 말끔한 형사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유난히 잘생겨 보이는 게…….

도희는 도둑고양이처럼 자꾸 우주를 훔쳐보게 되어, 시선을 아예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도희씨는 운전 안 하니까 편하게 보셔도 되는데.”

‘설마…….’

지금 자기 편하게 보라는 거야?

“허!”

도희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생각보다 능글맞으시네요.”

“생각은 어떠셨어요?”

“형사님이요?”

“네. ‘생각보다’라고 하시니 궁금해서요.”

고개를 돌려 빤히 도희를 보는 우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봐봐, 저 돌직구 같은 말과 다른 선한 미소.’

“앞 좀 보세요. 운전 집중 안 하시면 대답안 할 거예요.”

“정직한 것 봐. 역시 내 스타일.”

황당한 표정의 도희가 우주를 빤히 봤다.

“저 지금 앞만 보고 운전하고 있는데 대답 안 해 줄 거예요?”

우주는 도희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앞만 보는 중이었다.

“엄청 순수한 복돌인 줄 알았는데.”

“복돌이요?”

“음, 그 한번 사랑에 빠진 소녀를 평생 사랑하는 순수한 시골 청년 느낌이랄까요.”

“제가 일편단심이긴 하죠.”

“그런 말하는 사람치고 일편단심인 사람 없던데.”

“경험담이세요?”

‘이 남자가?’

그녀 마음속에 경보음이 울리고 있다.

이 남자 위험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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