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이 남자 진짜 선수네.
눈을 동그랗게 부릅뜬 도희를 본 우주가 내내 참았던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곧이어 차가 멈춰 선다.
“도착했습니다. 도희씨.”
‘꼭 이름 부를 땐 빤히 쳐다보네.’
다분히 고의적이다.
조금은 억울한 표정을 짓던 도희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차에서 내려야 했다.
몸을 돌리기 위해 또 한 번 낑낑거리던 도희를 위해서인지, 우주의 고개는 아예 반대편을 향해 있었다.
그의 어깨가 살짝 들썩거리는 거 같기도.
옷을 갈아입고 돌아오니 그는 태연하게 도희를 맞이했다.
도희는 마치 몸이 아주 가볍다는 듯, 사뿐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한결 편해 보이시네요.”
여전히 장난스러운 표정의 우주 얼굴이 도희에게 성큼 다가왔다.
한 뼘 사이로 가까워진 얼굴.
화들짝 놀란 도희가 문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자 우주가 더 놀란다.
“아, 죄송해요. 이거 해드리려고…….”
우주의 왼손에는 조수석 안전벨트가 들려 있었다.
“아하하…….”
이 행동도 분명 고의적이었다.
‘이 남자 진짜 선수네.’
어색한 도희의 웃음과 함께 정적이 찾아온 차 안.
‘하, 강도희 감 다 잃었네.’
그 자식이랑 헤어지고 연애 공백 기간이 너무 길었나.
‘이런 일로 당황하다니.’
도희는 우주의 행동이 설레기는커녕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도희의 상황에 연애가 낄 틈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 남자.
여자 꽤나 고생시킬 얼굴과 행동.
‘문지혁 그 자식도 처음에 딱 이랬지.’
이럴 땐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한다.
“오늘 태워 주셔서 감사해요. 저번 인터뷰 일도 너무 감사합니다.”
양손 가지런히 배에 모은 도희가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안전벨트 때문에 시늉에 가까웠지만 고마운 마음은 전해졌으리라.
“말로 때우고 끝내실 거예요?”
“오늘 몸으로 때운 걸요?”
물론 도희도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형사님 어느 서에 계세요? 요즘 스테이크도 배달되니까 내일 점심때 어떠세요? 형사님들 같이 드시게 배달시켜드릴게요.”
“오늘 제가 신세 졌으니 제가 사 드릴게요. 도희씨, 시간 언제가 괜찮으세요?”
“신세라니요. 자발적 봉사활동으로 정리할까요? 식사 약속은 제가 내일부터 출근이라 당분간은 힘들 거 같아요.”
“그럼 도희씨 점심시간에 제가 회사 근처로 찾아뵐까요?”
“제가 부서가 옮겨져서 당분간은 팀원들과 먹어야 할 거 같네요.”
평소 약속 거절은 단호히 하는 그녀였기에 일말의 틈도 남겨 두지 않았다.
약간 묘한 공기가 흐르려는 찰나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삐용— 삐용—
차량 내비게이션 화면에 [서 팀장]에게 걸려온 수신 전화 알림이 띄워졌다.
“여보세…….”
—야, 우 경위! 너 무전 꺼놨어? 왜 이렇게 연락이…….
블루투스 덕분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도희에게까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그나저나 형사라고 벨소리가 사이렌 소리야? 풉.’
당황한 우주가 무선 연결을 끊고 전화를 직접 받고 나서는 더 이상의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예, 예. 확인했습니다.”
곧 굳은 표정의 우주가 전화를 끊었다.
안 좋은 소식인 게 분명했다.
부, 부아앙—!
우주가 엑셀을 세게 밟았는지, 차가 무서운 속도로 도로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치지직… 김길동 살인사건 용의자 김현철, 서남2길, 서남2길에서 서남 사거리 방향으로 도주 중. 김길동 살인…….
‘살인사건?!’
그때, 방금 켜진 무전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창문을 연 우주는 손을 뻗어 붉은 경광등을 차 위에 올렸다.
위용— 위용— 위용—
쉴 새 없이 회전하며 반짝이는 붉은 경광등은 빠른 템포의 사이렌 소리를 마구 뿜어냈다.
“도희씨, 죄송한데 일이 생겨서 여기 내려드려도 될까요?”
“진짜 살인범 잡으러 가세요?”
도희도 살인사건 어쩌고 하는 무전을 들은 터라 달리 생각할 길이 없었다.
“말 그대로 용의자예요. 진범인지는 잡아서 조사해 봐야죠.”
“실종 수사하시는 줄 알았는데 살인범도 잡으세요?”
“원래 강력팀입니다.”
“아, 강력팀…….”
사건 출동 중이기 때문인지 눈빛이 변한 우주는 다소 낯설어 보였다.
표정이 어떻게 이리 돌변하는지.
심각해진 그의 표정은 흡사 영화에서나 보던 진짜 형사 같았다.
‘하긴 이 남자를 본 게 오늘을 합쳐 고작 두 번이지.’
이래서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거다.
—김길동 살인사건 용의자 김현철, 서남2길, 서남2길에서 서남 사거리 방향으로 도주 중. 김길동…….
다시 한 번 같은 무전이 흘러나왔다.
무전을 들은 도희가 급히 휴대전화를 꺼내 서남 사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우주는 차 깜빡이를 켰다.
“도희씨! 여기서 내려드릴게요.”
“형사님 다음 신호등에서 우회전! 우회전해 보세요.”
“예?”
“손 하나 더 보태면 쉽게 잡을 수도 있잖아요.”
“위험합니다. 내리세요.”
‘정색도 할 줄 아네.’
“길 찾는 것만 도와드릴게요.”
“도희씨.”
“형사님 여기! 우회전!”
다급한 도희의 목소리에 우주가 저도 모르게 핸들을 꺾었다.
다소 당황한 듯한 그에게 도희가 휴대전화를 내밀어 보였다.
“이 길이 더 빠르다고 떠서요.”
도희의 휴대전화에는 실시간 교통 상황을 반영한 길 안내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넋 놓고 도희를 바라보는 우주.
무표정하던 그의 표정이 점차 풀리더니, 이내 뜻 모를 미소를 짓는다.
“또, 또! 운전할 땐 앞을 보셔야죠.”
도희의 손가락이 앞을 가리켰다.
“그럼 도희씨가 제 앞으로 오실래요?”
“뭐라구요?”
‘이 능구렁이가?’
그의 표정엔 어느새 장난기가 가득했다.
삐용— 삐용—
[ 소녀 ♥ ]
차량 내비게이션 화면에 또 수신 전화 알림이 띄워졌다.
‘소녀?’
도희의 눈길이 화면과 우주를 번갈아 오간다.
그녀 눈에 서린 의아함을 느낀 우주가 헛기침을 하더니, 수신 거절을 눌렀다.
도희는 이젠 대놓고 우주를 쳐다봤다.
“혹시 제가 생각하는 소녀는 아니겠죠?”
‘아니, 이게 아니지.’
진짜 소녀인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 소녀와 이상한 관계는 아니겠죠?”
‘이것도 아니지!’
“아니, 제 말은 혹시 미성년자거나…….”
“푸흡.”
짧게 터진 웃음을 시작으로 우주는 미친 듯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곧 울려대던 사이렌을 끄더니.
띠링—
[ 소녀♥ 발신 중……. ]
대답 없이 소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아들 바빠?
기품이 느껴지는 느릿하고 우아한 목소리.
목소리만 들어도 고상한 중년 여성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아니요. 어머니 식사는 하셨어요?”
—먹었지이. 아들 집에 정말 안 올 거니? 네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 그 얘긴 그만…….”
—네 아빠 그러는 거 하루 이틀이니? 네가 이해 좀…….
“어머니 출동 중이라 저녁에 전화드릴게요.”
—그놈의 위험한 형사 짓, 제발 그만할 수…….
띠링—
전화가 끊기고 차 안엔 정적이 찾아왔다.
‘하필 스피커로 통화해서…….’
도희도 통화 내용을 다 들어버렸다.
“……어머님 목소리가 참 예쁘세요.”
자동차 핸들을 잡은 우주가 손에 힘을 준 듯 핏줄이 바짝 올라왔다.
‘딱 봐도 아버지랑 다툰 듯한데.’
있을 때 잘하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주제 넘는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벌써 어머님이에요? 너무 빠른데.”
‘아오. 진지한 게 1초가 안 가냐.’
“칭찬이 나오려다 쏙 들어가네요.”
“무슨 칭찬인데요? 하려던 거 해주세요.”
“안 할 거예요.”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이러기 있습니까?”
“다음에 해드릴게요.”
“또 보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쭉 찢어진 눈을 한 도희가 우주를 째려봤다.
“싫으세요?”
“네.”
“제가 싫으시다고요?”
‘속 쌍꺼풀인데… 눈 엄청 크네.’
태어나 처음 듣는 말인 듯 잔뜩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물론, 티 나게 꾸민 표정이었지만.
“형사님 직진하시다가 다음 블록에서 좌회전하셔야 해요.”
“왜 대답 안 하십니까?”
“뭐가요?”
도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치지직—
—김길동 살인 사건 용의자 김현철, 서남 사거리 방향으로 도주 후 위치 파악 불가. 김길동 살인…….
‘위치 파악 불가?’
“놓쳤다는 건가요?”
“멀리 못 갔을 겁니다.”
—그자의 용모파기를 물어보거라.
평소보다 더 낮게 깔린 중저음의 목소리.
사실 도희가 우주의 차에서 내리지 않은 건 도사님의 만류 때문이었다.
살인사건이란 무전을 듣자마자 ‘살인은 절대 좌시할 수 없네.’라며 쫓아가라는 걸 어쩌겠나.
“형사님 혹시 살인범 사진이나 인상착의를 아시나요?”
“잠시만요. 용의자 특정된 이상 신상 정보 문자 왔을 겁니다.”
차 내비게이션 화면에 험악한 인상의 남자 사진이 띄어졌다.
얼굴형은 네모나고, 눈은 실눈 뜬 듯 아주 작고, 덩치가 엄청 커 보이는 사내.
‘사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건 아는데…….’
볼에 길게 난 흉터가 험상궂게 느껴지는 것이 사진만 봐도 흉악범의 냄새가 확 풍겨왔다.
—이제 이곳에서 내리게.
“형사님 저 여기서 내려도 될까요?”
우주의 차가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저 멀리 앞서 걸어가던 사내가 사이렌 소리를 듣고 놀란 듯 뒤를 돌아보더니, 냅다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 앞에 저 사람! 도망가는데요?”
위용— 위용—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는 마치 저 자에게 어서 도망치라 외치는 듯했다.
우주도 헐레벌떡 뛰어가는 이를 발견한 듯 속력을 높였다.
도망치던 남자는 돌연 골목으로 사라졌다.
우주가 그를 따라 핸들을 꺽는 순간, 골목에서 차 한 대가 튀어나왔다.
쿠웅!!!
골목을 나오던 차와 우주의 차가 부딪히며, 도희와 우주에게 약간의 충격이 전해졌다.
“도희씨 괜찮아요?!”
“전 괜찮아요!”
사라진 도망자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 도희가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형사님 제가 위치 파악만 할게요!”
“도희씨, 잠깐만요!”
정신없이 뛰쳐나가는 도희에게 우주의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도사님 달리기 빨라지는 도술은 없어요?’
—손을 대보거라!
어느새 수상한 자가 사라진 골목으로 달리던 도희의 오른손이 옆으로 멘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도희의 손이 가방 속 서책에 닿자, 그녀의 다리에서 평생 느껴 본 적 없는 단단한 힘이 솟아났다.
도희가 힘차게 땅을 박차자, 그녀의 몸은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 달려 나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