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그럼 나도 이판사판이야, 누굴 건드려.
우주는 지금의 황당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도희씨 괜찮아요? 다친 곳은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격양된 목소리의 우주가 도희의 어깨를 붙잡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쉼 없이 몰아치는 우주의 물음에 도희도 딱히 설명 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 도술 부려 잠재웠다고 어떻게 말해.’
용의자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을 본 도희는 무작정 서책에 손을 올렸다.
내려치라는 도사님의 외침을 듣자마자 서책으로 내려쳤을 뿐.
“이분이 보기보다 허약하신가 봐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걸로 내려친 건데, 하하…….”
본인이 말하고도 민망한지 도희의 말끝이 흐려졌다.
‘약하다고? 이 남자가?’
놀란 마음에 도희를 붙잡고 이리저리 살피던 우주의 입에서 떨떠름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아하하… 도희씨 힘이…….”
“하하… 네… 제가 좀…….”
힘은 개뿔.
‘가끔 물 뚜껑도 못 땁니다.’
떨떠름하게 웃던 우주는 대자로 뻗어 누운 용의자를 보곤 웃음기를 싹 걷었다.
곧바로 그를 돌려 눕히고 수갑을 채우더니, 영화에서 보던 형사처럼 체포 사유와 미란다 원칙을 읊었다.
“도희씨 용감한 시민상 받으시겠어요.”
그는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듯,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민망해진 도희가 당장 택시를 불러 집에 가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에 지원 병력들이 도착했다.
도착한 다른 경찰들과 상황 이야기를 마친 우주가 도희에게 다가왔다.
“도희씨 일단 서에 같이 가 주셔야겠는데…….”
“네, 그나저나 우주씨 차는요?”
상황이 워낙 긴박한 탓에 조금 전에 난 사고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경미한 추돌 사고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경찰 뱃지 보여드리니 공무 중인 걸 아셨나 봐요. 빨리 아가씨 쫓아가라고, 보험사 알아서 부르신다고…….”
“아이구, 그분들도 놀라셨겠다. 빨리 가서 마저 정리하셔야겠네요.”
“도희씨는 정말 괜찮아요?”
“괜찮아요. 살짝 부딪혔잖아요. 멀쩡해요.”
도희가 생긋 웃어 보였지만, 그녀를 보는 우주의 표정은 어딘가 어두웠다.
“그 일 말고요. 도망치던지, 피하셨어야죠. 무슨 배짱으로 막아서셨어요.”
우주의 눈빛은 꽤나 차가웠다.
그의 입장에서 도희의 행동은 너무도 무모했다.
자칫하면 도희가 두 번째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
“형사들도 칼 든 용의자를 상대할 땐 조심, 또 조심합니다.”
칼 든 용의자에게 덤비는 아가씨라니.
게다가 완벽하게 제압하며 칼 든 이가 되려 누워 있는 상황이었다.
기가 차고 코가 찰 노릇이다.
상황을 전해들은 다른 형사들도 황당해하는데, 당사자만 아주 천하태평이었다.
“제가 보기보다 좀 세요. 하하.”
도희는 괜히 팔을 들어 힘주는 척을 해 보였지만, 우주의 눈엔 힘주면 톡 하고 부러질 듯한 가느다란 팔만 보였다.
“우 경위님 서로 이동하시랍니다.”
“네에!”
명랑한 대답과 함께 우주의 황당한 눈빛을 외면한 도희가 경찰차에 올라탔다.
“진짜 이상하다니까.”
홀로 고개를 내젓는 우주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도희가 조서 작성을 거의 끝낼 무렵, 기절해 있던 용의자가 깨어났다.
“예? 살인이라니요… 사기가 아니라 살인이요?”
“김현철씨 당신은 김길동씨 살인 혐의로 긴급 체포된 겁니다. 아까 고지 못 들으셨어요?”
기절한 김현철이 우주가 읊은 내용을 들었을 리 없었다.
김현철이 수갑 채워진 손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쾅!
“형사님, 제가 사기는 쳐도 살인은 못 하는 놈이에요. 생긴 건 이래도 얼마나 여린데요, 제가.”
빡!!!
옆에서 듣고 있던 박 경위가 파일철로 그의 옆통수를 후려쳤다.
“여린 놈이 칼 들고 여자한테 덤비냐, 새끼야?”
“그건 단순 위협용이었다고요! 잡혀갈 게 뻔한데 나 잡아가라 할 순 없잖아요!”
“살인과 관련이 없다면 김현철씨를 왜 잡아간다는 거죠?”
교통사고를 정리한 후 이제 막 서에 도착한 우주가 일침을 날렸다.
“어… 그게…….”
“이놈 사기 전과만 9범이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화개장터냐? 아주 그냥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셨어. 어?”
“제가 한 곳에 오래 못 살아서… 금방 싫증내는 타입이라… 하하…….”
“이런 짓거리를 쳐하고 다니니까 못 살지요, 이 양반아.”
용의자와 박 경위의 티격태격 대화를 듣던 우주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소란스러운 형사들 사이로 서 팀장이 끼어들었다.
“목격자가 있는데 어디서 발뺌이신가요. 김현철씨.”
* * *
—저 자는 살인을 하지 않았네.
다 쓴 조서를 느릿느릿 훑으며, 대화를 엿듣고 있던 도희에게 도사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럼 진짜 살인범은요?’
—그건 모르네만, 저 자는 아닐세. 지금 저자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니까.
허허, 당연히 그러시겠죠.
‘속마음을 읽으시는 분인데.’
도희가 칼 든 용의자의 머리를 서책으로 내려치면서 닿은 탓에, 도사는 용의자의 속마음을 훤히 듣고 있었다.
‘그나저나 살인범이 아니라면 생사람 잡는 건데, 이걸 어떻게 알려 주지?’
목격자까지 있다는 거 보니 빼박인데…….
아니, 잠깐만.
목격자?
‘살인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목격했다는 거지?’
도희가 고민에 빠진 사이, 우주가 도희에게 다가왔다.
“도희씨, 이번엔 진짜 집으로 모셔다드릴게요.”
거절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할 말도 있는 도희는 마지못해 우주의 차에 올라탔다.
막상 말을 하자니 서두를 어찌 꺼내야 하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짜고짜 ‘저 사람 살인범이 아니에요.’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어떻게 알아요?’ 물으면.
‘제 서책이 속마음을 듣거든요.’
잘도, 아주 잘도 믿겠다.
‘어쩌지?’
……하, 방법이 없을 땐 정공법이다!
“형사님.”
“네, 도희씨.”
“방금 잡힌 그 살인 용의자요. 이제 어떻게 되나요?”
“곧 검찰에 송치될 거고 재판에 넘겨질 거예요. 목격자가 있으니 증거도 나올 테고 그럼 감옥에 가겠죠?”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 그 사람 범인이 아닌 거 같아요.”
운전하던 우주가 놀란 토끼 눈으로 도희를 바라본다.
“왜 놀라세요?”
“엄청 확신에 차 계시네요?”
“제가 촉이 아주아주 좋거든요? 또 제가 범죄 심리, 행동 분석 책을 자주 읽는데 거짓말하는 행동이 아니었어요.”
여전히 놀란 눈을 한 우주는 앞만 보고 운전 중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한쪽 입가가 살짝 올라간 우주가 입을 뗐다.
“저도 행동 분석이나 범죄 심리 책 좋아합니다. 저흰 취향이 같네요.”
“지금 놀리시는 거예요?”
하, 이 남자, 진짜 얄밉다.
“풉, 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지 않다면 막 잡아넣을 순 없어요.”
* * *
“부서 이동 유임이라니요? 발령이 취소되었단 말씀이신가요?”
말투에서도 느껴지듯, 한껏 삐딱하게 고개 돌아간 도희가 감사부장에게 물었다.
“각 부서에서 인수인계 받을 사람이 없다네? 당분간 발령은 연기해 달란 메일이 왔어요~ 그렇게 알어~”
감사부장의 말투가 조금 특이했다.
‘말하는 내용이 얄미운 건지, 말투가 얄미운 건지 조금 헷갈리네?’
도희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오늘은 첫 출근.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상사인 감사부장과의 첫 대면이었다.
첫인상은 좋게 남기고 싶어서 참으려고 했는데…….
“부장님, 인수인계요? 며칠 전 부서 발령 공고 나고 인수인계 후임자 정해진 걸로 압니다.”
“그랬었지~”
“팀원으로 오기로 한 4명 모두 일주일 동안 인계하고 부서 이동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그랬지~ 근데 업무량이 늘어서 후임자 혼자 벅차다네? 그래서 연기해 주기로 했지~”
하루아침에 갑자기 업무량이 늘어?
그리고 그걸 믿고 발령 연기를 허락해?
‘하! 적당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들어주지.’
개선부 활동이 순탄할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부서 이동부터 막을 줄이야.
‘아니, 사장 직권으로 내려진 인사 발령인데 반기라니.’
사장을 아주 허수아비로 보는구만.
자기 코가 석 자인 마당에 사장 걱정까지 하는 도희였다.
“발령 연기 기한은 언제까지입니까?”
“응? 그거야 모르지~”
몰라? 뭘 몰라?
‘내가 했냐? 네가 했지!’
기한도 없이 무기한으로 연기해 줬다고?
이미 확정된 인사 발령을?!
감사부장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대화 내내 모니터만 보고 있다.
사무실에 도희가 들어서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도희에게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그였다.
어찌어찌 감사부에 팀장으로 들어온 도희를 못마땅해 하는 게 분명했다.
감사부장이 부사장 직속 라인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대놓고 싫은 티를 낼 줄이야.
‘나 이미 틀린 거 같은데?’
그럼 나도 이판사판이야, 누굴 건드려.
“너무 어설픈 이유를 찾으셨네요.”
“뭐라고?”
감사부장의 책상 앞으로 걸어간 도희.
모니터 위에 얼굴을 올리고, 어이없게 쳐다보는 감사부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강도희 팀장입니다, 한길수 부장님.”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걸 지독히 싫어하는 한 부장이지만 그걸 도희가 알 턱이 있나.
남 아픈 곳은 잘도 찌르는 도희였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는 부장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한 부장의 얼굴이 구겨지더니, 귀부터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엄청 다혈질이란 소문은 들었었는데.
‘얼굴에서 바로 티 나네, 이 양반.’
어차피 한 부장과는 좋게 지낼 수 없단 판단이 선 도희는 일이나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판까지 깔아 줬는데 제대로 설쳐드려야지.’
“부장님 표정을 보니 잘 아시나 보네요. 그럼 전 이만 이 일 해결하러 나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강도희 팀장. 팀원 없이 잘해봐~”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는 한 부장이었다.
발길을 돌리던 도희는 한 부장을 마주 보고 또 다시 눈을 똑바로 맞췄다.
“좋은 말씀, 아주 감사합니다아~”
한 부장을 따라 말끝을 길게 늘어뜨린 말투.
양손을 배에 공손히 올리고, 허리를 반이나 굽혀 인사하더니 뒤돌아 나가 버린 도희.
도희를 직접 만나 본 한 부장의 고민은 더없이 깊어졌다.
짧지 않은 회사 생활로 많은 일을 겪었고, 부서 특성상 많은 이를 내쳤지만, 이번 일은 뭔가 꺼림칙했다.
꼬투리 잡을 게 없는 강도희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문제 있는 이만 내쫓은 것도 아니지 않나. 없는 문제도 만들어 얼마든지 내보낼 수 있다.
문제는 강도희의 행동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이다.
‘마 부장 병X 저런 걸 끼고 있었어?’
마 부장이 당한 걸 보고, 보통내기가 아닐 거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한 년이었다.
그는 알았다.
예측 불허인 강도희와 제멋대로인 부사장 사이에서 오래 버틸수록 본인만 손해인 게임인 것을.
‘무조건 내보내야지. 아님, 내가 당해.’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도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