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빼내기 전까지 내내 찝찝한 기분을 들게 하는 그런 가시.
점심시간이 끝나기 십 분 전.
아직 많은 이들이 돌아오지 않은 탓에 사무실 곳곳 빈자리가 보인다.
기획3팀 김 대리는 식곤증을 겨우 이겨 가며 업무 준비 중이었다.
“허얼, 이게 뭐야?”
그의 반쯤 감긴 눈을 단숨에 번쩍 뜨이게 만든 메일 한 통.
“하 대리, 하 대리 이거 봐봐. 이거 전사 협조 공문 봤어?”
눈은 모니터에 고정한 김 대리가 하 대리를 급히 불렀다.
“왜? 뭔데 호들갑이야. 무슨 공문?”
하 대리의 시선도 모니터로 옮겨진다.
“부서 이동 관련 변경 사항 공지? 발신처가 개선부? 여기 그 강 대리가 팀장으로 간 그 부서지?”
“개선부? 소속이 감사부네. 근데 이름이 개선팀이 아니라 왜 개선부냐?”
하 대리와 김 대리의 시선이 부딪혔다.
“그렇게 따지면 경영지원팀이 아니라 감사부 밑으로 생긴 것도 이상하지.”
“인사이동 발령일 이후 추가적 업무 인계 필요 시 2주간 전 부서 업무 대리 수행 가능?”
김 대리가 공문 메일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과도한 업무 방지를 위해 해당 기간 동안 야근 금지. 해당 기간으로 불충분 시 해당 부서 업무 일지 작성을 통해 인원 보충 여부 파악? 뭐냐? 업무 일지 작성은?”
“와, 강도희 진짜 독하네. 김 대리 못 들었어? 이번에 개선부에 지원한 사람들 부서에서 인수인계 핑계로 안 보낸다고 했다잖아~ 그래서 엿 먹이는 거 같은데.”
“엿 먹이겠다고 사장 싸인 받아서 공문 뿌린다고?”
“건들지 말라는 거지 뭐, 나 사장 빽 있다! 건들지 마! 그거지.”
흥분한 하 대리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하긴, 그때 봤지? 마 부장 얼굴에 사직서를 그렇게 던지고 나갔는데, 갑자기 팀장으로 앉히는 게 이상하긴 했어.”
“뜬금없긴 했지.”
“강 대리랑 사장이랑 뭐 있는 거 아니냐? 사장이 또 좀 젊어? 반반한 얼굴에 여자 좋아하게 생겼더만.”
“강 대리도 그렇게 철벽치고 다니더니, 사장한텐 결국 넘어간 거지. 돈 있고 능력 있으면 다 되는 더러운 세상!”
“에이~ 그게 왜 더러운 세상 탓이에요.”
“……!”
“안녕하세요. 하 대리, 김 대리님?”
언제 다가온 것인지, 어느새 도희는 그들 뒤에 서 있었다.
“어… 강, 강 대리가 여긴 어쩐 일이야? 오랜만이네…….”
“어… 그래! 강 대리, 밥은 먹었어?”
당황한 하 대리와 김 대리는 서로 번갈아 눈짓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밥 아주 잘 먹고 휴게실에서 이 주임님이랑 커피 한잔하고 있었죠. 죄송해요. 엿들으려고 엿들은 건 아닌데 들리더라고요. 휴게실까지.”
익살스러운 표정의 도희가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휴게실을 가리켰다.
도희가 그들과 같은 부서인 이 주임과 친하다는 걸 까먹고 있던 그들이었다.
알았다고 한들, 하필 그들이 이 이야기를 하는 타이밍에 도희가 근처에 있다니.
그들로선 재수가 없었다.
“아, 강 대리. 오해하진 마. 우리 이상한 소리 안 했어.”
손이며 고개며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라고 말은 하는데.
‘왜 당황하냐고…… 김 대리야.’
“네~ 전 오해 안 해요. 다만 하 대리, 김 대리님이 오해하시는 게 있는 거 같아서요.”
“강 대리 우리 오해 안 해. 회사 소문 반은 가짜인 거 알지? 우리도 다 안 믿어. 걱정하지 마.”
‘하! 본인들이 그 소문의 근원지가 될 뻔해 놓고는 뻔뻔하게 변명은.’
이런 이들에겐 들이받는 것보다 돌려 깎는 게 데미지가 더 센 법이다.
“대리 아니고 팀장입니다. 감사부 소속이지만 개별 부서구요.”
도희가 두 사람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공문의 주목적은 불합리에 맞서는 합당한 개선 업무의 일환이었는데, 엿 먹이는 걸로 보였다니 더 성공적이네요.”
하얀 이를 내보인 도희가 해맑게 웃어 보이자, 두 대리는 넋 놓고 그녈 바라본다.
“더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개선부는 모두의 의견을 수렴해서 운영할 생각입니다.”
아이를 타이르듯, 아주 상냥하고 또렷한 말투였다.
“아 참, 그리고 제가 사장님 직접 뵌 적은 없지만, 혹시나 다음에 뵙게 된다면 꼭 전해드릴게요.”
“…….”
“얼굴 반반하시다는 소문나셨다고 하면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그럼 수고해요. 대리님들.”
생긋 웃으며 돌아서는 도희는 아주 예뻤지만, 그녀의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아주 작아 아프진 않지만, 빼내기 전까지 내내 찝찝한 기분을 들게 하는 그런 가시가.
* * *
도희가 전사에 발송한 협조 공문의 내용은 꽤 길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인사이동 관련 사항들을 재정립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관련 없는 이들은 그저 한번 읽고 넘길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꽤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공문 승인 요청을 위해 전 상무님과 통화할 때, 이사님은 예견했던 일이었다.
전사가 들썩일 거라길래, 그 정돈 아니고 관련자들은 찔릴 거라 말했는데.
많은 이들이 옆구리를 찔리다 못해 엉덩이가 들썩거릴 수준이었나 보다.
부장 몇 명은 벌써 한 부장에게 다녀갔는지, 머리끝까지 화가 난 한 부장의 전화가 몇 통이나 걸려왔다.
당장 본인에게 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기에, 화풀이 상대로 쓰실 거면 안 갈 거니 진정하시고 다시 전화해달라고 했다가 미쳤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발령 한 명 보내기 싫어서 부서원 전체 업무일지 쓰게 할 부장은 없으니, 그들도 답답할 노릇이겠지.’
그리고 업무 일지라는 게 나름 민감한 사항이었다.
한 달 동안 매일 매시간 ‘저 일하고 있습니다’를 증명해야 하는데 누가 좋아할까.
일을 하냐 안 하냐를 떠나서, 굉장히 성가시고 귀찮은 작업이다.
한 부장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진 걸 보니, 다른 부장들에게 꽤나 들들 볶인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화가 난 그가 도희를 찾아올 방법은 없었다.
설렘 가득했던 첫 출근은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출근해서 자리를 찾으니, 아직 사무실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어찌나 황당하고 당황스럽던지.
바로 부장 사무실로 찾아가니, 그는 팀원들의 발령을 연기했단 개소리나 늘어놓았다.
애초에 개선부가 만들어지는 걸, 감사부가 반길 리가 없다는 것쯤은 예상했다.
그 방법이 이토록 유치하고 치졸할 줄 몰랐던 것뿐.
어쨌든 감사부장은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꼴이다.
그가 한 가장 큰 실수는 강도희를 보이지 않는 곳에 풀어놓은 거랄까.
도희는 지금 경영지원팀 공용 회의실을 빌려 쓰고 있었다.
한 부장이 강도희를 찾는다며 전 사원에게 묻지 않는 이상 절대 찾지 못할 거다.
누워서 침 뱉는 그 짓을 한 부장이 할 리가 없지.
도희가 이제 막 일을 시작하려는데…….
그녀의 휴대전화가 또 울렸다.
* * *
“도희씨 죄송해요. 바쁘신데 제가 괜히 찾아왔나요.”
회사 1층 카페 창가 자리.
도희와 우주가 나란히 앉아있다.
“아니에요. 급해 보이시던데 무슨 일 있으세요?”
사실 우주의 전화를 받고 조금 놀라긴 했다.
다짜고짜 회사 근처라며, 10분만 시간 낼 수 있냐고 묻는데 어떻게 거절하나.
“혹시 어제 만난 용의자에 대해서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뭐지? 갑자기?’
“아… 니요? 어제 말씀드린 게 전부예요.”
도희도 그를 어제 잠깐 봤다.
도사에게 듣고 살인자가 아니라는 거 말고는 아는 게 없는데, 뭘 더 말하겠는가.
“오늘 피해자 와이프를 만났습니다. 신고할 때는 살인을 직접 목격했다 진술했었는데…….”
‘했었는데?’
나중에 못 봤다고 번복했나?
“용의자도 사모님을 봤는지 여쭤보니 이번엔 소리만 들었다고 말을 바꾸더니, 나중엔 방에 있다가 거실에 나와 보니 쓰러져 있었다고, 계속 말이 바뀌더군요.”
이봐, 이봐.
‘그래, 하지도 않은 살인을 어떻게 봐.’
애초에 거짓일 수밖에 없는 목격자였다.
“계속 말이 바뀌다니 신빙성이 떨어지는 진술이네요.”
“그분 대화하는 내내 떨고 계셨습니다. 다른 의심 가는 이는 없냐고 물어보니, 범인도 잡았으면서 왜 그러냐 화를 내셨어요.”
‘적반하장이구만.’
“화낼 일은 아닌데 역시나 수상하네요.”
“범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우주는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다는 듯, 비틀린 입꼬리로 커피 잔을 들어올렸다.
“뭐가 이럴 줄 알았다는 거예요?”
“솔직하게 말씀하시라니까, 그제야 진범을 말하더라고요. 내연남이었습니다.”
“허, 내연남?”
살인사건은 보통 가까운 사람이 범인이라더니.
가깝긴 가까운…….
“막상 남편 김길동씨가 죽고 나니, 그 내연남이 재산 갈취하려고 협박까지 한 모양이에요.”
‘그놈의 돈, 돈, 돈.’
도희의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혔다.
“그 재산은 이미 김현철에게 사기당한 상태였습니다. 내연남은 체포 완료했고, 김현철도 사기죄로 재판받을 거 같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목격자 말만 믿고 현장 조사가 소홀했던 모양입니다. 워낙 구석진 주택가라서 보안 카메라나 현장 증거도 많이 부족했고요.”
‘참나, 사람 하나 살인범 만들기 쉽네.’
“사망 시간이 김현철이 피해자 만난 직후라, 사건 시간도 겹쳐서 진술에 많이 의존한 모양이에요.”
나름 잘 짜인 계획 범죄였다.
누명 상대는 사기꾼, 부족한 현장 증거.
딱 목격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환경이었다.
“내연남이란 증거는 확실한가요?”
“내연남 동선 따서 범행 흉기 버린 거 회수했습니다. 누명 씌우려니 흉기를 현장에 버릴 수도 없어서 딴 곳에 버렸더라고요.”
“근데 솔직하게 말하라니까 진짜 그렇게 솔직하게 다 분 거예요?”
“어서 잡아가라고 주소까지 말해 주던데요?”
내연남이 재산으로 협박했다더니, 정말 지긋지긋했던 모양이다.
“자, 도희씨도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네? 뭘……?”
“도희씨 어떻게 알았어요? 김현철이 범인이 아니라는 거.”
우주의 싸늘한 눈빛에 도희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