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화 누가 절 찾는다고요?
어느 텅 빈 사무실의 유리문이 벌컥 열리며 보기 드문 미모의 여성이 들어선다.
와인색 세미 정장을 잘 차려입은 그녀의 왼손에는 우아한 푸른빛의 옥반지와 옥팔찌가 끼워져 있다.
그 물건들은 밤을 새워 닦았는지, 반질반질하니 어제와는 다른 빛깔을 내고 있었다.
“음~ 흐흠~ 음~”
기분이 좋은 일이 있는지, 콧노랠 흥얼거리는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다.
가방을 내려놓은 도희는 들뜬 마음으로 사무실을 쓰윽 훑었다.
“흐음, 비품이 하나도 없네.”
이곳은 오늘부터 개선부 사무실로 쓰일 공간이었다.
감사부의 특성상, 훤히 트인 사무실이 아닌 독립된 공간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도희가 개선부 사무실로 배정받은 곳도 팀 회의실로 사용되던 독립된 작은 공간이다.
팀장 자리인 긴 1인용 책상을 중심으로 좌우 끝에 2인용 책상이 디귿자로 붙어 있는 구조였다.
좌측 2명, 우측 2명.
도희까지 포함해 딱 5명의 자리였다.
각각의 자리마다 컴퓨터와 전화기만 덜렁 놓여 있었다.
‘비품 신청부터 하고, 청소는 따로 안 해도 되겠네.’
—하기 싫은 게 아니더냐.
“뭐, 이 정도면 깨끗하지 않아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게지.
“아직도 삐지신 거예요?”
‘도사라는 양반이 속이 이렇게 좁아서야.’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거늘.
‘참나, 누가 누굴 거둔 건지.’
—아이고오!! 이게 다 내 죄지, 내 죄야!
“아니, 사람이 정신이 없으면 가방 놓고 내릴 수도 있는 거죠! 바로 찾았는데 뭐가 문제예요?”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갔으면 어쩔 셈이더냐!
“제가 다시 찾아왔겠죠! 지갑이랑 휴대폰까지 다 가방 안에 있었다구요!”
—일각이나 걸렸지! 참 잘했구나, 잘했어!
“하아, 도사님 죄송해요.”
—끄응…….
“앞으로 더 주의할게요. 약속!”
도희가 가방을 보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도사니임~”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악! 깜짝이야.”
대답 없던 도사를 부르려던 찰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도희가 뒤를 돌다 책상에 허벅지를 부딪쳤다.
“아오! 아파.”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너무 아팠다.
연신 허벅지를 문지르는 도희 앞엔 대역 죄인의 얼굴을 한 도하가 있었다.
“어? 도하씨?”
“죄송합니다. 노크하고 들어왔어야 했는데… 유리문이라…….”
양손 가득 박스를 들고 있는 도하가 노크할 손이 어디 있겠냐마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근데 여긴 어떻게……?”
‘이게 아니지.’
도하는 새로 발령받은 개선부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여기 있어도 이상할 거 하나 없지만.
“오늘 어떻게 오셨어요? 발령일은 내일 아닌가요?”
“팀장님이 보고 싶어서요.”
“네에?”
뭐지, 이 뜬금없는 멘트는.
내가 보고 싶었다고? 그건 아닌 거 같고.
‘아……!’
고갤 갸웃거린 도희는 바로 답을 찾은 듯,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하하… 도하씨, 개선부 팀장이 전 줄 모르셨구나! 반가워요. 어쨌든 잘 오셨어요!”
‘설마 팀장이 누군 줄 모르고 지원한 거야?’
—‘쯧, 멍청한 건지. 모르는 척하는 겐지.’
분명 지원 요청 메일을 도희 이름으로 보냈지만…….
‘뭐 모를 수도 있지! 그럴 수 있어!’
얼마 전까지 같은 대리 직급이었는데 지금은 평사원과 팀장으로 만났다.
‘실제 업무적 교류는 없었는데… 그래도 혹시 팀장으로 인정 못 한다며 지원 취소한다고 하면 어쩌지?’
얼마 전 들었던 하 대리와 김 대리의 대화가 은근 신경 쓰이는 도희였다.
그들도 갑작스레 팀장으로 오른 도희를 무시하지 않았는가.
이럴 땐 번갯불 콩 볶아 먹듯이 스리슬쩍 빨리 넘겨야 한다!
“도하씨 일단 짐부터 풀까요?”
도희는 도하의 짐 박스를 얼른 뺏어 들어 책상 위에 올려 버렸다.
“짐 푸는 거 도와드릴까요?”
박스에 손을 올린 채 도하의 대답만 기다리고 도희.
그녀는 당장이라도 박스 속 물건을 모조리 빼낼 태세였다.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팀장님.”
“아, 네.”
예전부터 마주칠 때마다 느꼈지만, 이 남자…….
‘완전 FM이네.’
큰 키에 꼿꼿하게 세운 허리와 다부진 어깨 때문인지.
말에도 각이 느껴지고, 행동도 칼로 잰 듯 반듯하게만 움직인다.
‘고작 짐 정리하는 모습까지 절도 있게 느껴지니 말 다 했지, 뭐.’
띠리리― 띠리리―
그때, 빈 책상을 홀로 차지하고 있던 전화가 울린다.
‘엥? 전화?’
넋 놓고 도하를 바라보고 있던 도희는 정신을 번뜩 차렸다.
“여보세요. 개선부 팀장 강도희입니다.”
도희 입에서 상냥하게 꾸며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네. 맞습니다.”
몇 초 지나자, 수화기를 든 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던 도희의 눈이 한없이 커다래졌다
“네?!”
불편한 듯 꿈틀거리는 그녀의 눈썹.
“누가 절 찾는다고요?”
—부사장님이 찾으십니다. 당장 올라오세요.
뚜뚜뚜…….
순간 혈압이 오른 도희는 감긴 눈으로 머릴 짚었다.
‘당장 올라오세요?’
“와아아.”
딱딱한 명령조로 본인 할 말만 하더니 뚝 끊겨 버린 전화.
‘하, 누가 전화를 이렇게 매너 없이 해?’
전화를 건 본인에 누군지, 어느 소속인지 말도 하지 않고, 강도희가 맞냐고 묻더니, 대뜸 부사장이 찾는다며 당장 올라오란다.
‘아, 물론 부사장이 찾는다니까 부사장 비서실이겠지!’
그걸 서로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나.
거긴 전화 매너를 발로 배웠대?
상냥한 말씨는 바라지도 않는다.
‘기본은 해야 할 것 아냐, 기본은!’
보통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곱다.
이토록 불쾌한 전화는 받아 본 적 없는 도희였다.
아오!
‘너어, 이씨, 내가 지금 올라간다!’
* * *
“네에?”
“부사장님 외출 중이십니다. 오후에 다시 오세요.”
‘아 진짜 장난하냐, 뭔 잡소리야 진짜.’
두 눈 튀어나올 듯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도희였다.
아니, 할 생각 없는 도희였다.
그런 도희를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부사장의 비서는 모니터에만 시선을 둔 채 마우스를 만지작거린다.
‘얘 지금 나 두고 인터넷 서핑하는 거야?’
하, 미쳐버리겠네.
“방금 전화 주셨잖아요? 전화 받고 바로 올라왔는데 외출하셨다고요? 당장 올라오라고 하셨잖아요?”
입가엔 사무용 미소가 걸려 있지만, 부릅뜬 눈마저 감출 생각은 없었다.
‘네가 당장 올라오라면서어!!’
소리치고 싶은 것도 꿋꿋이 삼켜 냈다.
“방금 급한 일이 생겨 나가셨습니다.”
그러시겠죠.
‘우리 회사 부사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나 하나 엿 먹이려고, 굳이 발걸음을 재촉해 필요 없는 외출까지 한 건 아니시겠죠.’
도희도 부디 부사장이 그 정도 수준은 아니길 바랐다.
“오후엔 저도 긴 회의가 있어서요. 부사장님께 못 온다고 전해주세요.”
더 이상 도희의 목소리에도 상냥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말을 마친 도희가 돌아서는데 비서는 대꾸도 없다.
‘진짜 마음에 안 드네.’
부사장의 행동, 그 비서의 행동까지.
도희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꼭 저렇게 사람 기분 상하게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지.’
본인들의 행동으로 뻔히 기분 상할 다른 이를 배려하기가 그렇게나 어려운 걸까.
부사장이 외출한 뒤 전화 한 통 주는 게 그리 어렵냐는 말이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아,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마 부장과 본인의 경우를 떠올린 도희였다.
여튼!
‘오후에 내가 오나 봐라! 흥!’
* * *
“도하씨 회사 구경이나 합시다!”
사무실 유리문이 열리며, 가벼운 발걸음의 도희가 들어섰다.
어느새 기분 전환을 마쳤는지, 콧노랠 흥얼거리는 그녀였다.
“네, 팀장님”
도하는 자기도 모르게 도희를 따라 흥얼거리며, 의자를 밀어 넣고 일어섰다.
“도하씨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지금 그의 모습은 도희가 본 도하의 모습 중 가장 들뜬 모습이었다.
물론 자주 본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보이나요?”
“네, 들어올 때부터 웃고 계시던데.”
‘도희씨 보고 웃은 건데요.’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해보고 싶어, 그녀가 있는 개선부 지원까지 한 도하였다.
아침 첫 만남에 너무 설렌 나머지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와 어찌나 당황했던지.
당황하는 도희를 본 자신도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밤새 준비한 인사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방금 또 불쑥 속마음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또다시 도희를 당황시키고 싶진 않았다.
아주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조금은 느리더라도 한 걸음씩 다가갈 생각이다.
“일할 생각에 자꾸 들뜨네요. 기분이 좋아져요.”
‘같이 일할 생각에요.’
배시시 웃는 도하의 모습을 그의 팬들이 봤다면 기절했을 것이다.
‘이도하가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하며.
도하의 의도와는 달리, 도희는 도하가 회사에 불만이 많을 거라 짐작하는 중이었다.
대체 어떤 부분을 뜯어고칠 생각에 저리 신나 하는지, 개선 안건이 술술 나오겠다며.
든든한 일꾼을 얻었다 생각하는 도희였다.
“도하씨랑 같이 일하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지원해 줘서 너무 고마워요.”
사실 지원으로 뽑겠다고 큰소리 떵떵 쳤지만, 내심 아무도 지원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었다.
대면까지 하겠다고 우길 순 없어서 지원 서류만 보고 인원 선정을 해야 했는데, 도하를 뽑은 건 신의 한 수였다.
그의 깔끔한 업무 처리는 도희네 부서까지 정평이 나 있었다.
군말 없이 일만 하는 일벌레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근무 성과까지 좋았으니 어느 누가 싫어할까.
‘내 입장에선 복이 제 발로 굴러들어온… 흐흐…….’
“제가 더 감사합니다. 안 뽑아 주시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에이~ 도하씨 같은 인재가 와 주기만 한다면야, 두 손 두 발 들고 환영이죠!”
도희가 두 손을 들고, 한쪽 발까지 드는 시늉을 했다.
“자, 이제 진짜 일을 해볼까요? 회사 한 바퀴 돌고 옵시다!”
“네 팀장님!”
앞장선 도하는 도희를 지나치며 자신 있게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저… 팀장님.”
“네.”
“어디로 가나요?”
‘풉.’
“같이 갑시다.”
사내에 태풍을 몰고 올 개선부의 첫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