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난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가 한 이야기 다 들었으면 어떡해.”
“다 못 들은 거 같던데, 들었어도 괜찮아. 지가 뭐 어쩔 거야.”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그녀들의 불편한 심기는 표정에 드러났다.
선미는 충격을 받았는지, 식당에서 돌아온 후로 입 한 번 열지 않았다.
“야 이제 너희들도 그만해. 할 말 있으면 앞에 가서 하던가.”
“선진경, 너는 남 욕한 적 없는 거처럼 말한다?”
“됐다. 나 먼저 간다.”
진경이 먼저 사무실로 돌아가고, 휴게실엔 선미와 친구 둘이 남았다.
“근데 도하 대리 표정 바뀌는 거 봤어?”
“나도 좀 놀랬음. 이 대리 표정이 그렇게 다양할 줄이야.”
“강 팀장 웃음이 끊이질 않더라. 좋아죽던데? 둘이 회사에서 뭐 하는 거야.”
선미는 여전히 대꾸 없이 커피잔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도하 나쁜 새끼.’
그녀는 가뜩이나 갑작스러운 도하의 부서 이동으로 심란해 죽을 지경이었다.
선미는 도하가 말을 그렇게 길게 하는 것도 처음 봤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것 따윈 상관없었다.
‘내가 몇 년을 따라다녔는데…….’
선미의 붉고 굵은 아랫입술이 질끈 깨물렸다.
아무리 다가가도 곁을 내주지 않던 그가 곁을 준 사람이 하필 강도희라니.
그녀는 자신의 바로 뒤로 입사한 강도희를 처음부터 싫어했다.
신입 땐 ‘예쁜 신입’이라는 타이틀로 유명하더니, 시간이 흐르니 일까지 잘하는 예쁜 사원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녀보다 늦게 입사한 도희가 조기 진급으로 대리란 직급을 더 빨리 달았을 땐, 몇 날 며칠 욕해도 화가 풀리지 않았었다.
자신이 받아야 할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매번 강도희에게 빼앗겼다 여기는 선미였다.
오늘 도하가 강도희 옆에 있는 것만 봐도, 속이 뒤집혀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여우같은 년, 분명 이도하랑도 가까워질 텐데…….’
“하아…….”
‘떨어트릴 방법이 없나?’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던 선미의 표정에 속보다 더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 * *
도희는 오늘 회사를 둘러보며 떠오른 개선안들을 정리하며 문서화 작업 중이었다.
다른 부원들도 출근하면 첫 번째 업무로 회사 둘러보기를 시킬 예정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뭘 알아야 문제를 찾아낼 것 아닌가.
개선부 업무의 시작은 문제의 발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 일단 해결할 문제들을 선정해야 하는데,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없던 문제가 생길 거 같지 않아 생각해 낸 방법이다.
사실 어디든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들 문제 삼지 않는 것뿐이지.
도처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지만,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라고 인지하지 못한다.
오늘 그것을 실감한 도희였다.
몇 년을 다닌 회사지만, 근무하던 층과 사무실만 잘 알 뿐이지.
평소 다니지 않던 다른 장소와 교류가 없던 타 부서의 모습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오늘 다녀 보니까 우리 사무실은 분위기가 좋은 거였어요. 도하씨네는 어땠어요?”
모든 사무실이 각각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들어서면 숨이 탁 막히는, 공기마저 다른 사무실도 있었다.
도희와 도하는 같은 층의 사무실을 사용했지만, 끝과 끝이어서 출퇴근 빼고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저희 팀은 그냥 그랬던 거 같습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거 같네요.”
도희는 오늘 특히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곳을 떠올렸다.
휴게실에서 회의하던 어떤 팀.
그 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휴게실도 눈치를 보며 사용하고 있었다.
왜 남들 불편하게 휴게실에서 회의를 할까.
‘떡 하니 회의실이 있는데 말이지.’
“오늘 지원1팀 이상하지 않으셨나요?”
“경영 지원1팀요?”
‘거긴 그냥 조용했던 거 같은데?’
“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푸흐.”
도희가 작게 소리 내어 웃자, 도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했어요? 전부?”
“아니요. 그건 아닌데.”
“일하다 쉴 수도 있죠. 회사에서 근무시간 내내 어떻게 일만 해요.”
“팀원 전원이요?”
‘그건 좀 이상하긴 하네.’
“지원팀이 한가한가? 이상하긴 하네요.”
띠리리— 띠리리—
도희의 시선이 책상 위 전화기로 향했다.
‘아, 느낌 싸한데…….’
“여보세요. 개선부 강도희 팀장입니다.”
전화를 받지 않는 도희의 다른 손이 이마 위로 얹어진다.
“회의 중입니다. 용건이 급하시면 저희 사무실로 오시라고 전해주세요.”
도하는 도희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까 분명 오후 회의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찾아뵙기 힘들다고 전해주세요.”
‘팀장님 아침에 부사장실 다녀오셨는데 또 찾으시나? 왜 자꾸 찾는 거지…….’
도하의 표정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여. 보. 세. 요. 저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나요? 제 말은 전혀 안 들리시나요?”
이내 참지 못한 도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 * *
“…강도희 팀장, 조퇴했다고 합니다.”
보고하는 박 비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조퇴?”
황이재는 어이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어쩐지 밖이 소란스럽더라니.’
방금 전, 한 톤 높아진 박 비서의 목소리가 부사장실 안까지 들려왔다.
‘감정 동요도 드문 사람이…….’
터질 듯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본 부사장은 쓴 입맛을 다셨다.
‘강도희… 생각보다 더 제정신이 아니군.’
“알았으니까 나가 봐.”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한 듯 보였다.
책상에 닿은 그의 손끝만 아니라면.
탁탁탁탁.
탁탁.
책상과 손톱이 부딪치며 날 선 소리를 냈다.
그의 불편한 심기를 대신하며.
탁탁탁.
탁탁탁탁.
탁!
‘물 한번 먹였다고 바로 반항을 해?’
그는 강도희에게 살짝 겁만 줄 생각이었다.
난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네가 나랑 척을 지고도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 거 같냐는.
그러니 부디 알아서 잘하라는 일종의 작은 경고.
물론 쉽게 겁먹을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예상했지만.
‘다시 불러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탐색 좀 해볼 요량이었는데.’
탁탁탁.
황이재의 손끝이 또 다시 책상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헛걸음 한 번 시켰다고, 바로 걸음을 끊는 인간이라니…….’
탁탁탁탁.
‘절대 두 번은 당하지 못하겠단 건가.’
탁!
‘고작 제까짓 게.’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비틀린 입술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죽어도 굽히고는 못 산다는 거지?’
자신에게 반항하는 이는 철저히 짓밟는 것이 그의 철칙이다.
생각을 마친 그는 책상 끝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네, 말씀하세요. 부사장님.
“박 비서, 백 실장한테 연락 넣어.”
—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곧이어 책상 밑 서랍에 쌓여 있는 여러 개의 휴대전화 중 하나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황이재는 백 실장에게 도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 지시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그의 사전에서는.
* * *
가랑비가 내리더니 계절이 지나갔다.
급격히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지, 도희는 평소 잘 마시지도 않는 뜨거운 커피가 땡겼다.
“어제 내린 비가 계절을 바꾸는 비였나 봐요.”
그런 비가 있다.
그친 뒤 다음 계절을 몰고 오는 그런 비.
하루 사이로 날씨가 어찌 이리 바뀌는지, 급변한 날씨는 괜스레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옷 정리 한 번 해야겠네.’
일찍 출근한 도희는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며 업무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가지는 낯선 여유로움.
어제는 어찌나 다사다난했던지, 오후엔 부사장 비서와의 전화 혈투로 인해 조퇴까지 해야 했다.
서로 욕만 안 했을 뿐, 숱한 고성이 오고 갔다.
‘참을 걸 그랬나…….’
전화를 끊고 나니, 얼굴에 짙은 당혹감이 서린 도하가 보였다.
‘근데 아무리 예의가 없어도 정도껏 해야 넘어가지!’
예의 없는 부사장의 비서도 싫지만!
본인이 부르면 만사 제쳐놓고 당장 달려오라는 부사장의 태도가 너무 싫었다.
도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전 상무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부사장이 자신을 찾은 것과 물 먹인 것까지, 전부 다.
전 상무 말로는 상사들이 사용하는 상대방 기를 죽이기 위한 방법 중 하나란다.
‘옘병.’
자신을 불러놓고 자리를 비운 것도 고의가 확실했다.
‘부사장과 사장의 골이 생각보다 더 깊은가 본데…….’
예측 불가한 상황에서 더더욱 부사장을 먼저 만나고 싶진 않았다.
부사장실로 올라오라는 박 비서에 전화에 적당히 회의 핑계를 대며 만남을 미루려 했더니.
―당신 사정을 저희가 헤아려야 합니까? 부사장님 5시 퇴근이십니다. 퇴근 전에 알아서 들렸다 가세요.
‘…당신 사정? 그쪽이 저를 부르는 것도 당신 사정이니 알아서 하세요.’
퇴근 전에 들리고 가라기에 바로 병가 내고 조퇴했다.
‘아프다는데 어쩔 거야, 지가!’
꾀병은 아니었다.
정말 머리가 지끈거려 두통약을 먹었으니.
조퇴하지 않고 부사장 비서를 만나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둘 중 하나는 큰 사단을 냈으리라.
‘덕분에 일찍 퇴근해서 강아도 보고 좋았지, 뭐.’
비 오는 날의 막걸리는 정석이었다.
‘크으…….’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짓던 도희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자, 줄곧 도희를 지켜보던 도하가 이때다 싶어 말을 건넸다.
“팀장님, 겨울 좋아하십니까?”
“아뇨.”
고민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전 추운 게 싫더라구요. 으.”
도희는 상상만 해도 싫은지, 코를 찡긋하며 괜스레 몸을 떨어 보였다.
“싫어하시는구나… 저도 겨울이 싫습니다.”
도희가 커피잔을 들고 마시니, 도하도 그녀를 따라 커피 한 모금을 삼킨다.
이 쓴 커피를 왜 마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도희를 따라 마셔 보는 도하였다.
“아! 겨울이 좋은 이유 하나 있어요. 붕어빵!”
“저도 붕어빵 좋아합니다.”
“저는 팥은 싫고 크림 붕어빵만 먹어요.”
“아, 크림…….”
크림 붕어빵을 먹어 본 적 없는 도하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사무실 유리문이 열리며 도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