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27)화 (27/120)

026화 저도 남자입니다.

웬만하면 당황하지 않는 도희였다.

하지만 지금 도하의 발언은 그녀의 이해 범주를 넘어선 말이었다.

보고 싶어서 봤다니.

별 뜻 없이 한 말인가?

‘말 그대로 그저 눈으로 보고 싶어서……?’

도희의 고개가 거듭 갸웃거려졌다.

‘혹시 날…….’

아닌데, 그건 아닌데.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남 이야기하는 것을 즐겨 하지 않는 도희였지만, 도하 대리 이야기는 듣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다들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그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행동은 사내 여사원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어느 부서 누가 연락했더니 답장도 없다더라.

또 누가 고백했다 거절당했다더라.

거절당한 여사원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쌓여 가더니 나중엔 명단을 이뤘다.

별명이 오죽하면 미인이겠나.

‘미남 인형.’

몹시 유치하지만 잘생긴 게, 그저 걸어만 다닌다고 붙은 변명이었다.

너무 유치하기에 도희는 입에 담아본 적 없지만, 공감은 가는 별명이었다.

고고한 자태와 준수한 외모.

한눈에 띄는 큰 키에 다부진 몸매는 사내 여성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여성들의 구애에도 차가운 태도로 별명 값 거뜬히 해내는 그가 남자들에겐 유난히 살가웠다.

그래서 난 소문이 남자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는…….

‘역시 회사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나…….’

지금 도희를 바라보는 도하의 모습은 그녀에게 고백하던 다른 남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곧은 눈빛과 굳게 다물어진 입술, 크게 내쉬지 못하는 숨과 미약하게 떨리는 호흡까지.

“…….”

세상이 그대로 멈춘 듯 어색한 적막이 둘 사이를 갈랐다.

“저도 남자입니다.”

흐르는 적막을 먼저 깬 건 도하였다.

도하의 말에 허공을 헤매던 도희의 불안한 눈길은 도하에게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

“아… 네…….”

그리고 그 눈길은 책상에 쌓인 애먼 서류에 닿았다.

가까이 있는 서류에 써진 글자보다 그 시야 너머 끝자락, 흐릿하게 담긴 그의 잔상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장난스럽게 넘어가야 할까.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할까.

그녀가 보아 온 사내 연애 중 해피엔딩은 없었다.

그녀 역시 그랬듯이.

‘문지혁 개새…….’

불쑥 떠오른 전 남친과의 불쾌한 기억들로 도희의 얼굴에 싸늘함이 깃들었다.

입 안 가득 고인 욕을 겨우 삼켜낸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선을 긋는 것이 앞으로 관계에 있어 득이라 판단한 도희가 운을 떼었다.

“도하씨.”

‘어? 근데 나한테 고백한 것도 아니잖아?’

“아… 난 또 도하씨, 오해…….”

‘하, 이게 아닌데.’

말은 이미 던져졌고 머릿속은 뒤엉켜 완전 엉뚱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오해요?”

“아, 그게…….”

그녀답지 않게 말끝이 자꾸 흐려졌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오해했다는 건지.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했다는 건지.

둘 중 어느 것도 쉽게 내놓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사실 중요한 건 오해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도희도 도하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어떤 것이 사실이든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

마지막 결론이 떠오른 순간, 도희의 얼굴에 뜨거운 열기가 올랐다.

그와 도희 사이에 모든 공기가 바뀐 듯,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에게 내놓을 한마디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원래 하려 했던 말은 자꾸만 입 안에 고여 맴돌았다.

‘도하씨, 계속 같이 일해야 하는데 서로 불편해질 오해 발언은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딱 한 마디면 된다.

그럼 똑똑한 이 남자는 더 이상 오해를 부를 말도,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한 마디면 또다시 남자에게 휘둘리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

몇 번이고 도희의 입술이 달싹였다.

끝내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진 않았지만.

머릿속을 헤집은 뒤엉킨 수많은 생각들은 결국 답을 내놓지 않고 고스란히 사라졌다.

도희의 머릿속이 새하얘진 이 순간.

“다녀왔습니다.”

“팀장님, 저희 다녀왔습니다!”

때마침 회사 구경에 나섰던 팀원들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반가운 기색이 담긴 도희의 눈이 어색한 곡선을 만들어 냈다.

“자, 그럼 밥부터 먹을까요?”

또 그녀답지 않게 도하의 뜨거운 시선을 애써 외면한 도희였다.

*     *     *

개선부의 첫 회의는 우려와 달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도희가 미리 짜놓은 향후 부서의 업무 방향과 진행 순서 설명을 시작으로 자유로운 이견들이 오고 갔다.

회의를 이끌어 가는 건 도희였지만, 대부분 의견을 내는 것은 도하와 진명이었다.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부서이기에, 어떠한 체계나 기본안도 없어 꽤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최대한 팀원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업무 체계에 대한 기본 정립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진짜 회의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개선부가 어떤 부서인지 모르고 오셨다고 한들, 방금 회의를 통해 대충 감 잡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도희의 말에 모두가 수긍하는 고갯짓을 보였다.

“혹시 회사를 확 뒤엎어 버리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가지고 오셨다면.”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다소 불순한 의도로 볼 수도 있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주 잘 오셨어요.”

도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여기 모인 이들 중 도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당했던 일보다, 반강제 참석한 회사 모임에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더 큰 공분을 샀었다.

뜻하진 않았지만 회사 모임의 피해자가 됐달까.

“자 그럼, 이제 자유롭게 본인의 생각을 말씀해 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도희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업무 관련 불만 사항도 좋고, 복지 관련도 좋습니다. 전반적인 회사 관련 사항이라면 뭐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도희의 시선이 회의 내내 조용하던 소하를 향했다.

“저는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소하는 말 끝맺음을 못 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도희의 눈길은 팀원 모두를 빠르게 스쳤다.

“그럼 차…….”

“팀장님.”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올곧은 자세로 손을 뻗어 올린 도하.

‘손가락이 엄청 길구나…….’

감상하듯 도하를 바라보던 도희가 눈을 힘차게 감았다 떴다.

다행히 모두의 시선은 도하를 향해 있었다.

한 사람, 진명만 빼고.

“네, 도하씨.”

“저희 팀원이 다섯 명입니다.”

팀원들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그리 진지하게 하냐고.

“아무리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고 해도 모두의 ‘니즈’를 충족시키긴 힘들 거라 생각됩니다.”

“네, 그렇지요.”

역시나 당연한 말이라, 도희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 신문고를 만들어 전 사원의 의견을 들어 보면 어떨까요?”

바로 진명이 끼어들었다.

“의견함은 지금도 있습니다.”

“유명무실한 의견함이 아닌 개선부의 사내 신문고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의견함이나 신문고나 내용은 비슷하게 겹칠 텐데 의미가 있나요?”

“소통 없이 의견 수용만 하는 의견함과 달리 피드백을 통해 소통을 하자는 겁니다.”

“의견함도 수용된 일부 의견들의 결과를 고지하기도 합니다. 설마 전체 피드백을 하자는 건 아니죠?”

“맞습니다. 전체 피드백.”

“시답잖은 의견들도 있을 텐데 전체 피드백을 보낸다고요?”

‘진명씨는 돌격 부대구나.’

회의 땐 부정적 시선을 가진 사람도 꼭 필요한 법이다.

그 이견들을 모으고 모아 하나씩 조각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답은 가까이에 와 있기 마련이다.

도희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첫 번째 개선 안건이 나왔네요.”

일제히 고갤 돌린 팀원들의 시선 끝엔 도희가 있었다.

도희의 눈엔 뚱한 진명의 표정이 들어왔다.

“임시 사내 신문고 게시판을 운영해 보면 어떨까요. 전체 공개 답변 형식으로.”

도희의 말이 끝나고 팀원들의 대답은 제각각이었다.

“공개 답변 말씀이십니까?”

진심이냐고 되묻는 불만스러운 진명과.

“저희 인원으로 감당이 될까요……?”

걱정 가득 담은 소하의 물음.

“흐음…….”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의 두산까지.

도하는 생각에 잠겨 도희의 의견을 묵묵히 들을 뿐이다.

“사내 게시판 신설 요청해 보겠습니다. 제보는 익명을 원칙으로 2주 동안만 의견을 받아 보면 어떨까요.”

사실 개선 의견 게시판은 도희도 이미 고민해 본 사항이었다.

굳이 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게시판을 통해 익명으로 제보를 받아 공개적 답변을 달아 준다.

익명 보장만 확실하다면 누구라도 편하게 한 마디 적어볼 법도 했다.

“공개 답변이라면 팀원들만 알 수 있는 특정 부서 관련 사항은 의견 내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누군지 뻔히 드러나니까요.”

‘도하 대리, 의외로 세심하네.’

그렇게 또 도희가 도하의 매력을 발견한 사이.

“공개, 비공개 선택을 가능하게 하면 어떻습니까?”

도희가 하려던 말을 진명이 대신했다.

“좋네요. 그럼 일단 계획서는 도하씨가 맡아 주시고 게시판은 제가 요청하겠습니다.”

그 외 간단한 업무 안배를 끝으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     *     *

“아흐… 저는 회의가 제일 힘들어요.”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에 도착한 소하가 책상에 축 늘어졌다.

“회의 공포증 가진 분들 의외로 꽤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명이 부드러운 말투로 소하를 위로했다.

“저도 몇 마디 못 했습니다.”

두산도 멋쩍게 웃어 보이며 거들었다.

그때였다.

띠리리링—

개선부 사무실의 전화가 울렸다.

“와, 설마. 이 양반도 진짜 끈질기네.”

‘보나 마나 부사장 비서겠지.’

몇 년이나 회사를 다녔지만, 임원급을 만날 일은 극히 드물었다.

업무 지시가 있다면 메일이나 전화로 통보해도 될 것을.

가뜩이나 바쁘신 양반이 왜 자꾸 사무실로 부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도희였다.

설마 마 부장 일로 앙심을 품었다 한들,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도 없을 텐데.

…아닌가?

‘불러서 욕이라도 하려고 부르는 건가?’

도희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도 전화벨은 계속 울려댔다.

“제가 받을까요? 팀장님?”

“좋은 생각이에요. 도하씨가 받아서 이렇게 말해 줄래요? 강도희 팀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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