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28)화 (28/120)

027화 절 그렇게나 믿으세요?

“어딜 불려가?”

박 비서를 쏘아보는 부사장의 말투에는 언짢음이 가득했다.

“이무혁 사장에게 불려갔다고 합니다.”

이무혁은 출장 중이었다.

‘망할 전 상무인가…….’

때때로 사장보다 전 상무가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

대놓고 정색하는 이무혁과 달리 전 상무는 무해한 미소로 무장해 어두운 속내를 감추는 이였다.

강도희가 스스로 찾아갔든, 그 자가 직접 강도희를 불렀든.

‘둘 다 문젠데…….’

그들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부사장에겐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어젠 한 부장이 자신에게 개선부 결제권이 없다는 황당한 소리를 늘어놨다.

그 말은 감사부 소속으로 넣은 건 속임수고, 추후 개선 부장을 따로 앉히겠다는 말과 같았다.

물론, 중대 안건은 부사장인 본인에게까지 결제가 올라오니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저 팀장년이 뭔가 해 보겠다고 설치는 꼴은 결국 봐야 할 테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여자가 이리 싫어질 줄이야.

‘강도희가 사내를 헤집고 다닐수록, 이무혁은 본인의 뜻대로 되어 간다 생각할 텐데.’

“흐음…….”

황이재가 크게 숨을 들이쉬자 박 비서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일단 강도희부터 도려내야겠군.’

이미 백 실장을 시켜 강도희에게 미행을 붙여 놨다.

“박 비서.”

“네. 부사장님.”

“개선부 사무실로 가서 강도희씨, 돌아오는 대로 데리고 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박 비서의 대답 뒤로 날카롭게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울려 퍼진다.

도희의 회사 생활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     *

사장 없는 사장실에 도희와 전 상무가 마주 앉아 있다.

사무실이 어찌나 넓은지, 입구에서 접객용 소파까지 한참을 걸어야 했다.

창가 앞에는 연보라색 널따란 소파 두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왼쪽에 ‘ㄴ’자, 오른쪽엔 ‘ㄱ’자로 고급 벨벳 재질이었다.

상석은 마치 왕좌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1인용 소파의 차지였다.

도희는 창가가 잘 보이는 왼쪽 소파에 앉았다.

창가를 통해 들어온 햇빛이 도희에게 내리쬐자, 그녀의 티 없이 맑은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가 한층 더 돋보였다.

‘와… 여기서 일이 돼?’

푹신한 소파에 앉은 도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한쪽 벽면을 차지한 유리벽이었다.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통유리창.

‘크으, 난 여기서 경치 구경만 해도 하루 다 가겠네.’

건물 최상층에 위치한 덕에 탁 트인 하늘, 그 아래로는 빽빽한 빌딩 숲이 깔려 있었다.

앞 건물들로 꽉 막혀 보이는 도희 사무실 전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하늘 구경을 좋아하는 도희에겐 이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이래서 다들 성공에 목매는 거구나.’

숨이 탁 트이는 창밖 풍경에 시선을 빼앗겨 있던 도희는 불현듯 느껴지는 전 상무의 시선에 정신을 다잡았다.

“죄송해요. 전 상무님. 제가 좀 급해서…….”

도희는 전 상무에게 전화를 걸어, 대뜸 사장님을 뵐 수 있냐고 물었다.

“‘사장 나와라, 이사 나와라’ 하는 건 전사에 도희씨가 유일할 겁니다.”

퉁명스러운 말과 다르게 전 상무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다.

전 상무도 이 상황이 어이는 없었지만, 또 화는 나지 않았다.

“어머, 이사님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나요! 저는 사장님을 뵐 수 있는지 아주 공손히…….”

한껏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은 도희가 열변을 토했다.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진정하세요.”

뭐가 웃긴지, 전 상무는 소리까지 내며 크게 웃었다.

“진짜 비상 상황이었다고요. 부사장이 하루 종일 저를 부르는데 심상치 않았어요.”

부사장이란 단어가 등장하자, 전 상무의 입가에 머물던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저도 대비는 하고 가야죠.”

도희도 처음 부사장실 연락이 왔을 땐, 별 생각 없이 찾아갔었지만 이젠 달랐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결코 좋은 의미로 부른 게 아닐 텐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장님과 담판(?)을 짓고, 앞으로의 행동거지에 대해 방향을 정해야 했다.

부사장에게 들이받아도 눈감아 주실 건지.

아니면 일단 ‘전 아무것도 몰라용.’ 버전으로 나가야 하는지.

부사장이 자꾸 도희를 찾는 걸 보면, 그도 뭔가 생각이 있기에 부른 걸 텐데.

속절없이 당하고 싶지만은 않은 도희였다.

“사장님과 부사장님 사이가 어느 정도로 안 좋으신 거예요?”

“음…….”

“…그 정도인가요?”

“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사님 미간만 봐도 어렴풋이 짐작은 가네요.”

“사장님은 체면을 아주 중시하시는 분입니다.”

그럴 테지.

“게다가 사람들 앞에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사장 취임식 날, 무혁과 부사장의 대화를 떠올린 전 상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사장님이 부사장을 마주할 땐 으르렁거린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마주칠 때마다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이는 둘이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냉기에 주변인들이 눈치 보기 바쁜 탓에, 그 둘이 참석하는 회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부사장은 본인이 사장 자리에 오를 줄 알았나 보죠?”

흠칫한 전 상무는 내색 없이 말을 이었다.

‘역시… 눈치가 보통은 아니네.’

“그러셨나 봅니다. 부사장이 첫 대면부터 그토록 날을 세운 걸 보면.”

“똑똑한 사람은 아닌가 보네요. 대놓고 이를 드러내다니…….”

도희의 짐작보다 부사장은 더 솔직하고 과감한 사람이었다.

“용의주도한 사람이죠. 모두가 있는 공식 석상에서 둘의 대립을 예고했으니까요.”

“허, 일부러 대놓고 편 가르기?”

전임 사장이 ‘진상 사건’으로 강제 해임 당한 뒤 그룹 내 자회사에 발령 대기를 받았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파문당한 그가 곧 화정 전자로 발령 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가족 경영의 폐해였다.

그 후 눈치가 보였는지, 공석이 된 사장 자리에 오른 이는 회사 내부에서 발탁된 것이 아닌 본사에서 툭 발령 낸 전문 경영인이었다.

‘부사장 입장에선 열 받겠지. 우리도 그가 사장 자리에 오를 줄 알았으니까.’

회사 사람들에겐 이제 갓 부임한 사장에 비해,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부사장이 더 위협적일 것이다.

사장 취임식 날, 부사장은 사장과 대놓고 대립하며 그와 사람들 사이에 선을 그었다.

만약 그 선을 넘는다면, 자신과도 대립하게 될 것이라는 선을.

“자기 사람, 그리고 아닌 사람으로 편 나누기를 좋아하는 거 같더군요.”

“전 이미 눈 밖에 났겠네요.”

“아마도?”

전 상무의 휘어진 눈이 도희에게 묻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상관있어?’ 라고.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도희씨 마음대로 하세요.”

“엥? 제가 어떤 사고를 칠 줄 아시구요?”

전 상무가 알만 하다는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어떤 사고를 치든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사고 쳐도 눈감아 주실 거예요?”

“도희씨가 사고를 친다면 반대쪽이 잘못해서겠죠.”

“어머, 절 그렇게나 믿으세요?”

“뭐, 믿는다고 말하기엔 거창하고 지금까지 봐 온 도희씨에 대한 자그마한 신뢰랄까요.”

‘전 상무님이 날 보기 시작한 게 마 부장 사건 이후인데…….’

어떤 점이 신뢰를 드렸지?

마 부장 얼굴에 사직서 던지고 나온 거?

서로 까놓고 말하자고 솔직하게 들이댄 거?

복직 안 할 거라 말했다가 팀장 시켜 준다니까 냉큼 한다고 한 거?

‘그것도 아니면…….’

“도희씨가 치는 사고는 대부분 부당함을 느끼시고 행동하시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다.

내가 쌈닭도 아니고, 다짜고짜 아무에게나 들이받진 않는다.

‘근데 회사 다니면서 그렇게 큰 사고 친 적은 없는데.’

“저… 막 그렇게 사고만 치고 다니는 사람 아닙니다.”

“네에. 압니다.”

“마 부장 일은 빼구요.”

“네에. 다 압니다.”

도희의 회사 이미지는 마 부장 사건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었다.

‘하, 내가 어떻게 만들어 놓은 강긍정 이미지인데.’

도희의 입에서 짧게 혀 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회사 사람 만나긴 글렀네, 글렀어.’

“누구든 부당한 행동을 한다 싶으면.”

전 상무는 도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희씨 뜻대로 하세요.”

“정말 제 맘대로 해도 된단 말씀이시죠?”

그녀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그러시라고 만든 부서가 개선부고, 그렇게 하시라고 팀장 자리 드린 거예요.”

이사가 대놓고 하극상을 논하는 팀장에게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란다.

뭔가 좀 이상하지만, 회사 다니면서 들었던 모든 말 중 가장 멋있는 말이었다.

개선부 팀장, 뜻대로 소신 있게 무언가 바꿔 나아갈 수 있는 자리 같았달까.

물론 옳은 방향으로만 바꿔 나가야겠지만 말이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어느덧 진지해진 표정의 전 상무는 팔짱을 풀고 도희와 눈을 맞췄다.

“뭘 도와드릴까요.”

“사실 도와주실 것도 없어요.”

“요청 사항 있으셔서 만나자고 하신 거 아닙니까?”

부사장에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은 도희가 상황 파악을 위해 만든 자리였다.

“부당하게 자르지만 마세요.”

도희 말을 들은 전 상무는 나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부당하게 해고하진 않겠습니다.”

“만약 뭐, 제가 진짜 잘못하면 저도 해고하시고요.”

“네. 그건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전 상무님이 잘못하셔도 말씀드릴 겁니다.”

“큽, 네. 그렇게 하세요. 꼬옥.”

이 모든 것이 사내 부적절한 유착 관계를 정리해 보겠다고 시작된 일이다.

그건 물론 도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도희는 이 관계를 이용해 개인적 이득을 취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전 상무가 도와줄 일은 그저 도희가 개선부 업무를 해낼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

회사에 득이 될 일들이니 그의 일이기도 했다.

“아 그리고, 이사님 저 말씀드릴 게 있는데…….”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도희의 말을 듣는 전 상무의 표정이 굳었다, 풀어졌다를 반복했다.

도희의 이야기가 끝나자, 끝내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를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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