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더니.
“크읍, 크하하하.”
창가에 서 있던 무혁의 대찬 웃음소리가 화정 기획 사장실을 메웠다.
“웃음이 나십니까.”
그걸 지켜보는 전 상무의 눈이 쭉 찢어졌다.
“크… 내가 직접 만났어야 했는데!”
그가 직접 가야 하는 중요한 출장이었다.
“직접 들으시면 더 재밌을 거 같으십니까?”
“사내 만족도 조사라니, 너무 웃기지 않아?”
만족도 조사는 매년 행해져 왔다.
다만 도희가 말한 것엔 상사에 대한 업무 만족 평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도 사원들이 직접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웃음을 그친 무혁은 도도한 표정으로 긴 다리를 꼬며 소파에 앉았다.
“전혀 웃기지 않습니다.”
전 상무도 무혁을 따라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참 당찬 여자야. 그렇지 않아?”
무혁은 도희가 마음에 쏙 들었다.
딱 그가 찾던 사람이랄까.
‘적으로 만났으면 골치 좀 아팠겠어.’
“아주 마음에 드는 여자야.”
“안 됩니다. 강도희씨는.”
이무혁, 그가 울린 여자가 어디 한둘인가.
물론 전 상무도 도희가 무혁 때문에 울 것 같아서 튀어 나온 말은 아니었다.
“뭐가 안 된다는 건데?”
“사장님을 위해서 한 말입니다. 사장님이 보통 여성분들께 하신 것처럼 행동하시면 강도희씨가 가만히 있겠어요?”
“나 업무 관계자는 안 만나는 거 몰라?”
“그래서 홍콩 바이어 만나셨어요?”
아주 예뻤다.
집착은 심했지만.
“계약 안 할 거였어.”
“아이고, 아주 철저하십니다. 관계의 선이.”
전 상무의 비꼼에 무혁이 옅은 한숨을 내뱉는다.
“또 뭐에 뿔 난 건데.”
“사장님이 잠수 타셔서 저한테 전화가 몇 통이 왔는지, 업무 폰하며 개인 폰까지 전부 마비 상태였습니다. 그 여자가 제 집 앞에 감시까지 붙였잖습니까. 그것 뿐입니…….”
“그마안.”
무혁이 전 상무에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만해, 전 상무. 잘못했어.”
“으휴, 내가 이사인지 비서인지. 하여튼 한국에선 절대 안 됩니다. 사장님 꼬투리 하나라도 잡으려고 다들 혈안인 거 아시죠.”
“하아, 그래서 요즘 내가 인생이 재미없잖냐.”
무혁은 커다란 소파 옆으로 다리를 마저 올리더니, 천장을 보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리고 백 실장이 다시 움직입니다.”
“뭐?!”
백 실장은 부사장이 시키는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그의 수족 같은 자다.
이야기를 듣고 벌떡 일어났던 무혁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시 드러누웠다.
“행동 주시해.”
‘또 뭔 짓을 꾸미려고.’
부사장이 이사였던 시절, 라이벌이었던 장 이사의 사람들이 연이어 갑작스러운 사고나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조사해 보니 전부 백 실장의 짓이었다는데, 심증과 정황은 확실하나,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강 팀장한테도 미리 언질 주고.”
“괜찮을까요? 겁먹을 스타일은 아닌 거 같지만 그 반대일 거 같아서.”
“벌써 강 팀장이랑 친해졌네? 아주 잘 아나 봐?”
“아시잖습니까.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혹시 모르니 가드 붙이겠습니다.”
전 상무는 도희가 부사장을 찾아가서 ‘당신이 나한테 미행 붙였냐! 무슨 꿍꿍이냐!’ 따지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도대체 행동이 감이 안 잡히는 아가씨니…….’
그렇게 도희에겐 혹이 두 개나 생겼다.
“그리고 알아보란 건 알아봤어?”
“아, 개선부. 그게 문제가 좀 생겼는데요…….”
전 상무는 무혁에게 다가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확실해?”
전 상무가 내민 서류를 훑은 무혁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뇨. 대략 99%.”
대답하는 전 상무의 표정은 퉁명스러웠다.
“확실하단 말이네.”
무혁의 악 물린 입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1%의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무혁이 입술을 비틀며 ‘헤헤’ 웃는 전 상무를 쏘아보았다.
“왜 웃지?”
전 상무의 말이 사실이라면 전혀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근데… 너무 허술하지 않아?”
‘마치 함정처럼.’
“제 정보력이 좋은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무혁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간다.
“아님, 부사장의 소문이 과장이었거나.”
“뭐, 팀원 선정을 강 팀장이 했으니 한 번 찔러나 본 거겠죠. 진짜 뽑힐 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근데 한 수만 깔아 두지는 않았을 거야.”
“강 팀장한테 미리 언질 주겠습니다.”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녀를 지켜본 시간은 짧았지만, 무혁이 본 그녀라면 기어코 달려들어 결판내려 할 것이었다.
“아니. 그쪽에서 행동할 때까지 지켜봐.”
도려내 봤자, 그들이 다시 파고들 게 분명했다.
“예. 상황 주시하겠습니다.”
“그래, 일단 확실한 건 없으니까.”
무혁이 먼저 상황을 알게 된 이상 불리한 건 그들이었다.
* * *
사무실로 돌아온 도희가 이제 막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진동이 울린다.
지이잉—
[도희씨, 통화 가능하신가요?]
우주 형사에게 온 문자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도희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장을 보냈다.
[무슨 일 있나요?]
지이잉—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허… 푸훗.”
문자를 본 도희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 남자 진짜 위험하네.”
“예?”
고개를 든 도희가 도하와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그에게서 도도한 분위기가 폴폴 풍겨왔다.
‘이 남자도 위험하고.’
여사원들이 ‘도하 대리, 도하 대리’ 노래를 부를 땐,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던 도희였다.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더니.’
도하에게 풍겨지는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고 나니, 여사원들이 왜 그리 그를 쫓는지 알 것도 같다.
여자 홀리는 페로몬을 상시 내뿜는 사내였다.
하필 도하의 자리는 도희와 제일 가까웠다.
‘ㄷ’자 형태의 사무실 구조상 팀장인 도희의 모니터 옆으로 자꾸 도하의 옆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배시시 웃은 도희는 다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모니터 화면보다 어렴풋한 그의 옆태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지.
‘코는 또 왜 저렇게 높은 거야. 하! 정신 차려 강도희! 일이나 하자.’
애써 마음을 다잡은 그녀였다.
* * *
타다다탁, 타닥.
도희와 도하의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만 사무실을 메우고 있을 때였다.
티타임을 갖자는 소하의 말에 두산과 진명은 먼저 따라나서서 사무실엔 둘 뿐이었다.
도희와 도하도 결제안 마무리만 하고 곧 따라나설 예정이었다.
갑자기 바람 밀리는 소리가 나더니, 개선부 사무실의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벌써 왔…….’
팀원들이 돌아온 줄 안 도희가 고개를 들자, 불편한 얼굴이 사무실로 들어선다.
노크도 없이 들어 온 불청객은 박 비서였다.
“강도희씨, 따라 나오세요.”
‘뭐…? 따라 나와? 허!’
“저기요.”
본인 할 말만 하고 획 돌아서 나가려던 박 비서가 멈춰 선다.
등 돌리고 선 그녀는 고개만 돌린 채 도희를 쏘아보며 말했다.
“저기요 아니고, 박 비서.”
‘헐… 얼굴 좀 예쁘다고 부사장이 오냐오냐하나? 뭔 놈의 싸가지가……!’
키보드에서 손을 뗀 도희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통화하실 때도 본인 소개를 안 하셔서 몰랐네요.”
‘보통 전화할 때, 용건보다 어디 소속 누구인지 밝히는 게 기본 아니냐고!’
“지금 말하잖아요. 박 비서라고.”
사나운 눈빛으로 도희를 응시하는 박 비서.
‘와! 이거 싸우자는 거지?’
두 여자가 만들어 낸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 도희의 표정만 살피던 도하.
도하는 화를 억누르는 듯, 큰 숨을 내쉬며 작게 벌렁거리는 도희의 콧구멍마저 귀엽게 느껴졌다.
순간 하마터면 눈치 없이 새어 나올 뻔한 웃음을 겨우 틀어막은 그였다.
남 일에 지나치게 무감한 그가 도희를 신경 쓰기 때문인지,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인지.
분위기를 느끼는 것엔 둔한 도하마저 냉기 어린 분위기에 숨이 턱 막혀 왔다.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도하의 눈에 작은 이채가 서리더니, 그의 입술이 떨어진다.
“노크도 모르시나요? 다음부터 방문할 땐 노크 부탁드립니다.”
딱딱하게 한기 서린 도하의 목소리가 두 여자 사이를 갈랐다.
“……!”
“……!”
두 여자의 시선이 도하에게 모아졌다.
말을 끝낸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도하를 빤히 응시하는 박 비서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린다.
‘참나, 내 말엔 내상 하나 없어 보이더니. 도하 대리 말엔 타격 좀 받았나 보네.’
도하가 태어나 처음으로 남 일에 나섰다는 것을 도희가 알 길은 없었다.
“다음부턴 노크하겠습니다.”
박 비서의 고개가 공손히 숙여졌다.
도하는 대답 없이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허, 이 여자 웃기네, 진짜.’
“박 비서님.”
“예, 강도희씨.”
두 여자가 날카로운 시선을 교환한다.
“부사장님이 또 절 찾으시나요?”
“예. 같이 가시죠.”
‘거참, 끈질기게도 찾네.’
부사장이 도희를 물먹인 그때부터, 도희는 절대 숙이고 들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차피 눈 밖에 난 거, 무서울 게 뭐야.’
그리고 도희가 개선부 팀장을 맡은 이상, 그와의 대립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지고 들어갈 필요는 없지.’
“보시다시피 제가 좀 바빠서요.”
박 비서의 눈빛에 의문이 들어찼다.
‘그래서 어쩌라고’ 되묻는 눈빛이었다.
“급한 용무면 전화로 하시거나, 아니면 직접 오시라고 전해 주시겠어요?”
박 비서의 입은 살짝 벌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입매를 굳게 닫았다.
“…그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곧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만 멀어져 갔다.
‘아놔, 저 여자 문도 안 닫고 가네.’
혀를 찬 도희가 일어서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업무를 보고 있는 도하를 향했다.
* * *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댄 황이재의 귀에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부사장님.”
“말해.”
한참이고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황이재의 눈이 슬며시 뜨였다.
그의 시선이 박 비서의 얼굴로 향하자 굳게 다문 박 비서의 입이 겨우 떨어진다.
“…강도희씨.”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박 비서가 망설여?’
“안 오겠답니다.”
‘안 와?’
이재의 입에서 날 선 물음이 흘러나왔다.
“나 보기 싫대?”
상기된 표정의 박 비서는 지그시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역시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말해, 박 비서.”
황이재가 눈살을 찌푸리자, 박 비서는 못 이기는 듯 대답했다.
“직접 오시라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이재의 얼굴에 질 나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