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30)화 (30/120)

029화 걔가 얼굴에 약하거든요.

초등학교 하교 시간.

어딘가 어색한 포순이가 신호등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가느다란 발목이 훤히 드러났기 때문인지, 누가 봐도 안에 키 큰 여성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삐이이이이—

초록불이 바뀐 것을 확인한 포순이는 호루라기를 불며 긴 다리로 성큼성큼 횡단보도 중앙을 향해 걸어 나간다.

반대편에서도 발목이 훤히 드러난 키가 아주 큰 포돌이가 걸어오고 있다.

“어린이 여러분 손들고 천천히 건너세요!”

포돌이는 아주 친절했다.

“안녀엉!”

눈에 보이는 아이들 모두에게 반갑게 손 인사하며 지나가는 아이들을 살뜰히도 챙겼다.

“천. 천. 히!”

그에 반해 포순이는 꽤나 시크했다.

횡단보도를 지나던 아이들이 다가와 손짓하면 같이 인사할 뿐, 그 외에는 교통봉을 열심히 흔들 뿐이었다.

‘하, 런칭이 코앞인데 나 지금 뭐하냐.’

앱 개발자인 강아는 재택근무 중 억지로 끌려온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어! 으!’

우주의 전화를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형사 전화를 무시할 배짱 좋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특히나 강아에게 도희 실종 사건 일로 엮인 우주 형사는 껄끄러운 상대였다.

도희가 거짓말은 안 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다음 날 알린 것이 못내 찝찝했다.

‘하, 갑자기 봉사활동 도우미가 연락 두절이라는데 무시할 수도 없고.’

아이들은 어른이 지켜야 하지 않냐는 한마디에 결국 넘어가 버렸다.

지이이잉—

지이잉—

런칭일이 코앞인 강아 입장에선 정말 큰마음 먹고 온 거였다.

지금도 에이스인 팀장 강아의 부재로 팀원들의 전화가 쉴 새 없이 오고 있었다.

이제는 강아도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알아서 하겠지 뭐, 이제 마무리 테스트인데 나 하나 쉰다고 막힐 것도 아니…….’

지이잉—

[팀장니임ㅠㅠㅠ. 첫 UI 화면이 갑자기 안 떠요ㅠㅠ 늦게라도 봐주세요]

“하아…….”

빠앙—!

“강아씨, …강아씨!”

우주의 목소리에 강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넋 놓고 하늘 구경하던 포순이 때문에 출발하지 못하고 있는 차들이 줄지어 빵빵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한달음에 횡단보도를 벗어난 포순이에게 포돌이가 다가왔다.

“강아씨, 괜찮아요?”

목소리마저 좋은 이 남자, 참 얄밉다.

“예에… 괜찮아요. 안 괜찮아도 괜찮아요. 아니, 괜찮아요.”

머릿속에선 이미 앱 문제를 해결하느라 반쯤 넋이 나간 그녀였다.

“일 있으신 줄 알았으면 이런 부탁드리지 않는 건데, 제가 정말 죄송합니다.”

우주는 정중하게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했다.

그 모습을 본 강아는 도리어 미안해졌다.

“에이! 몰라! 내 반 차 내가 쓰고 나왔는데 뭐가 문제예요? 그쵸?!”

“예에? 예, 그렇죠.”

떨떠름한 우주의 대답이 들려왔다.

“봉사 나와서 정신도 못 차리고, 제가 죄송해요. 이제 정신 차릴게요.”

‘풉, 친구끼린 닮는 건가.’

강아에게 도희의 모습을 본 우주였다.

“제가 왔으니 일 있으면 정말 가셔도 됩니다.”

사실 30분만 도와주면 된다고 한 우주였는데 강아가 끝까지 하겠다며 우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작했으면 끝은 봐야죠. 저도 정말 괜찮아요. 일은 이거 끝나고 가서 마무리해도 충분해요.”

급한 성격 탓에 답답한 것이었지, 업무 진행상 아무 문제없었다.

그리고 사실 강아는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강아가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너무 무리한 부탁을 드린 거 같아 죄송스럽네요.”

“에이~ 30분 도와달라는 게 무슨 무리한 부탁이에요. 아닙니다.”

그리고 거절하지 않은 건, 강아 본인이었다.

“그럼 끝나고 커피 한잔할 시간은 있으신가요?”

‘이거 지금 그린라이트인가? 좀 뜬금없네.’

지금까지 이 남자의 행동을 보아 자신에게 관심 있는 눈치는 아니었다.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녀는 이내 답을 찾았다.

‘…어쩐지 난데없이 전화가 오더라니.’

“혹시 도희한테 관심 있으세요?”

“네.”

“헐.”

예상한 답변이 아니다.

당황하며 ‘예?’ 혹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니요?’가 나올 줄 알았는데.

당당하게 ‘네’라니!

도희 때문에 비슷한 상황을 숱하게 겪었지만 이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럼 도희를 부르지, 왜 저를 부르셨죠?”

기분 나빠 한 말은 아니었다.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남자가 왜 빙 둘러 접근하는지 이해가 안 돼서 하는 말이었다.

“도희씨가 저에게 관심이 없어서요.”

보이진 않지만 포돌이 인형 탈 속 시무룩한 그의 표정이 생생히 느껴졌다.

“강도희, 얼빠인데.”

“예?”

“형사님이라면 충분하지만, 타이밍이 안 좋아서 그럴 거예요.”

“타이밍요? 도희씨에게 무슨 일 있나요?”

“전 남친한테 크게 데인 상태거든요. 뭐, 그 거머리 때매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고.”

“…….”

우주가 대답이 없자, 강아는 괜히 그가 안쓰러워 한마디 보탰다.

“다신 남자 안 만난다고 입버릇처럼 말은 하는데, 형사님 같은 분이 옆에서 들이대면 넘어갈 거예요.”

“푸흐…….”

우주의 입에서 작게 터져 나온 실소를 강아는 듣지 못했다.

“어떻게 장담하시죠?”

“걔가 얼굴에 약하거든요.”

그 순간이었다.

우주는 강아의 말을 듣지 못한 채 급히 횡단보도로 뛰쳐나갔다.

콰아아아앙—!

자동차와 무언가 부딪히는 굉음이 온 사방을 울리고, 아이를 감싸 안은 포돌이가 공중에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모세야!”

“형사니이이임!”

그 순간, 온 세상이 정지한 듯 아이와 우주를 부르는 외침만이 고요히 울려 퍼졌다.

*     *     *

박 비서가 돌아가고, 얼굴이 달아오른 것을 느낀 도희는 화장실을 찾았다.

—네 뒤편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지네. 심상치 않군.

‘엥? 제 뒤에서요?’

회사에선 웬만하면 도희에게 말을 걸지 않는 도사였다.

손을 씻던 도희는 뒤를 돌아봤다.

네 개의 화장실 칸이 보인다.

—한데 뭔가 좀 요상하구나.

‘뭐가요?’

—그것이… 기운이 그리 강하지는 않으나, 묘한 게 악한 것이…….

‘이 도사님 또 말끝 흐리시네.’

—한번 확인해 보자꾸나.

‘누가 상사한테 욕먹고 속으로 욕하나?’

도희의 시선이 네 칸의 화장실 문을 천천히 훑고 지나간다.

‘아님, 남친이 바람이라도 펴서 울면서 저주를……?’

별별 생각이 다 드는 도희였다.

이곳은 공용회의실을 쓰는 이들만 가끔 사용하는 곳이었다.

‘제일 구석진 곳에 위치한 화장실이라 짱 박히기 제일 좋긴 하지.’

도희는 다른 감사부원들 마주치기가 싫어 일부러 이곳을 사용했다.

—생각만으로 이리 기묘한 악의가 느껴질 리가 없을진대.

어쨌든 악의로 가득 찬 상황이라면 뭐든 필요할 것이다.

‘위로든, 도움이든.’

화장실 네 칸 중 사용 중인 칸은 두 개.

마침 한 사람이 나왔다.

도희는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가벼운 눈인사를 했다.

생긋, 같이 인사해 주는 걸 보니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진 않았다.

‘도사님, 아직도 느껴져요?’

—아직 그대로 느껴지네.

‘그럼 여기라는 말인데.’

화장실 제일 안쪽 칸이었다.

‘사용 중’이라고 쓰여 있는 문고리를 보니 누군가 있음이 분명했다.

똑! 똑! 똑!

“안에 누구 계세요?”

분명히 문이 잠겨 있고 자그마한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왜 대답이 없을까.’

대답하기 싫은 걸까.

하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그냥 가야겠는데요?’

그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잉—

미세하게 휴대전화 진동 소리가 들렸다.

진동 소리가 끝날 때까지 주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심각한 일인가.’

도희도 신입 때 종종 화장실에 박혀 울곤 했다.

소리 내지 않으려 입 막고 울다 보면 꺼억꺼억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가 나곤 했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면 뭐든 별일 아닌 듯 느껴졌다.

‘으긍, 부디 수월하게 털어내시길.’

도희가 안에 있는 이의 행운을 빌며 막 화장실을 나서려는 찰나.

툭!

무언가 도희의 발치를 툭 건드렸다.

도희의 시선이 향한 바닥엔 휴대전화 하나가 떨어져 있다.

대답 없는 칸 주인의 휴대전화가 바닥에 떨어지며 미끄러져 나온 듯했다.

지이이잉—

또 한 번 진동이 울렸다.

도희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휴대전화를 주워들었다.

근데 액정에 띄어지는 문구가…….

[와이프♡]

휴대전화를 살펴보니 케이스 없이 사용해 기스가 가득하다.

‘여자 물건치고 좀 투박해 보이는데…….’

이상함을 느낀 도희는 화장실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똑똑똑.

“폰 떨어트리셨어요. 문 좀 열어 보세요.”

퉁퉁퉁!

세게 두드려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쓰러지거나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괜찮으세요?”

상황 때문에 얼굴은 보이기 싫어도 목소리는 낼 수 있겠지.

“도움이 필요 없으시면 말씀 한마디만 해 보세요. 휴대폰은 올려두고 그냥 가겠습니다.”

역시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악한 기운이 더 강해졌네!

‘정신은 있다는 말이잖아?’

지이이잉—

또 한 번 ‘와이프♡’란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도희가 어제 저장한 보안 팀장님 번호로 문자를 남겼다.

[팀장님, 4층 공용회의실 끝 쪽 화장실인데 잠깐 와 주실 수 있나요?]

덜커덩, 쿵!

내내 조용하게 잠겨 있던 문에 뭔가 부딪히며 덜컹거렸다.

곧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들이 새어 나온다.

‘뭐 하는 거야, 대체.’

그때였다.

덜컹, 덜컹, 덜컹, 쿵쿵.

문이 한참을 덜컹거렸는데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뭐야 혹시?’

하나가 아니라……?

혹여 영화에서나 본 므흣한 일은 아닐지.

도희의 머릿속에서 부끄러운 상상의 피날레가 펼쳐지기 직전.

도사가 체통 없는 이 여인네에게 호통을 쳐야 하나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바로 그때!

끼이익—

오랫동안 잠겨 있던 화장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걸어 나왔다.

“……?!”

걸어 나온 이와 눈이 마주친 도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화장실엔 뜻 모를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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