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소문대로 미인은 미인이군.
“오늘 예상에서 빗나가는 게 하나도 없네요.”
한 부장은 여전히 영문 모르겠단 표정이다.
“물론 보안 팀장님도 불렀습니다.”
도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찰 안 부르고 보안 팀장에게 걸렸으면.”
천천히 한 부장에게 다가가는 도희.
“부장님은 경찰 안 부르실 거예요?”
“아니, 그 말이 아니잖나…….”
“그럼 어쩌실 건데요?”
“…….”
한 부장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이럴 줄 알고 불렀어요, 경찰.”
“무슨 말이지?”
“또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실 거 같아서.”
‘특히나 감사부원이면 더더욱 조용히 넘어가려 했겠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연히 범죄가 확실하면 경찰을 불렀겠지!”
“확실한 걸 누가 조사하는데요?”
“그건 감사부가…….”
“감사부가요? 경찰처럼 조사하신다고요?”
“그럼! 철저히 조사해서……”
“경찰보다 확실하게요? 현행범인데 경찰 조사 맡기는 게 더 확실하지 않을까요?”
“박 대리가 억울할 수도 있지 않나! 다짜고짜 경찰부터 부르면…….”
“억울하게 잡혀간 거면 곧 풀려나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한 부장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며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다.
‘홍당무야 뭐야, 맨날 빨개져.’
“강 팀장. 왜 자꾸 사람 말 끊어먹나.”
“말 같지 않으니까요.”
도희도 참을 만큼 참았다.
웃으면서 말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범죄자는 따로 있는데 지금 누가 누굴 탓하는 건가.
경찰에 불려갈 짓을 한 이가 잘못인가.
그 경찰을 부른 이가 잘못인가.
경찰을 불렀더라도 그에게서 소형 카메라만 발견되지 않았다면 문제없이 넘어갈 일이었다.
“뭐라?”
노기 섞인 한 부장의 고함이 터져 나오기 직전.
“그만.”
한 부장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의 남성이 끼어들었다.
“한 부장, 강 팀장 말이 다 맞네요.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 하세요.”
“……!”
활짝 열린 유리문 사이로 진한 눈매 때문인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중년 남성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아주 환한 미소를 보이며.
그의 큰 키는 가뜩이나 큰 그의 덩치를 더 커 보이게 했다.
남자가 등장하자 사무실엔 무거운 정적이 내리깔렸다.
“반가워요. 강도희씨.”
그가 도희에게 손을 내민다.
“네, 반갑습니다. 근데 누구신지……?”
도희는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듯, 남자는 옅게 코웃음 치더니 입을 뗐다.
“황이재입니다.”
도희는 대꾸 없이 이재를 빤히 쳐다봤다.
한 부장이 막 나서려는데 마침내 도희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 결재 서류에서만 보던 이름이라 당황했네요. 반갑습니다. 강도희 팀장입니다.”
은근 돌려 까는 거였다.
평소 전혀 볼 일 없는 분이 왜 찾아오셨냐고.
“어쩌다 보니 밖에서 다 들어버렸네요. 잘하셨습니다. 강도희 팀장.”
“뭘요. 당연한 일을 한 겁니다.”
도희를 처음 본 부사장은 그동안의 악감정이 살짝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소문대로 미인은 미인이군.’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겉모습만 본다면, 남자 꽤나 홀렸던 박 비서보다 예뻤다.
“부사장님 어쩐 일로 여기까지…….”
한 부장은 부사장의 등장 후로,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가만있질 못했다.
“강도희씨랑 볼 일이 있는데.”
부사장의 무심한 눈길이 한 부장과 팀원 모두를 차례로 훑는다.
마치 불편하다는 듯이.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재빨리 허리 숙여 대답한 한 부장이 사무실을 나서려 했다.
“한 부장.”
“예. 부사장님.”
“강 팀장이 신고한 사원 감사부에서도 철저히 조사하세요. 다른 특이 사항은 없는지.”
“예. 보고드리겠습니다.”
부사장이 손짓하자 한 부장은 과하게 허리를 꺾으며 인사하더니, 팀원들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어…….”
그중 한 부장에게 붙잡혀 억지로 끌려 나가던 두산과 진명이 도희의 눈치를 살폈다.
“휴게실 가서 쉬고 계세요.”
도하는 도희의 말이 끝나자 그녀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사무실을 나선다.
뒤이어 다른 팀원들도 그를 따라 나갔다.
“허. 벌써 돈독해지셨네.”
부사장은 습관적으로 비꼬아진 본심을 내뱉었다.
“예?”
“아, 팀원 간에 사이가 좋아 보여서 한 말입니다.”
팀원들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시선은 내내 도희를 향해 있었다.
한 부장과 팀원들이 사무실을 나서고 도희와 부사장 둘만 남았다.
“회사 모든 인원이 강 팀장 팀처럼 사이가 돈독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요?”
부사장이 책상을 한 손으로 쓸며 걸음을 느리게 옮긴다.
“서로를 못 믿고.”
눈으로는 사무실 구석구석을 담으며.
“의심하고.”
그의 발이 차츰 도희와 가까워졌다.
“헐뜯고.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요?”
‘이 자식 봐라?’
한 부장에게 하는 말인지, 도희에게 하는 말인지.
방금 대화를 듣고 한 말인 건 분명했다.
“그러게요. 왜 그러는지.”
“살기 참 각박한 세상이야. 도대체 누굴 믿고 일해야 하는지.”
부사장이 의연한 표정으로 책상에 걸터앉았다.
“왜 누굴 믿고 일해야 하나요?”
도희의 말에 부사장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어졌다.
매우 의문스럽단 표정으로.
“당연히 남을 믿고 일해야지요. 강 팀장은 혼자 일합니까?”
“그냥 각자 자기 할 일하는 거죠.”
책상에 걸터앉은 부사장 앞으로 다가간 도희는 그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부사장님은 믿음이 필요한 일을 많이 시키시나 보죠?”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도희를 본 황이재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든 일엔 믿음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글쎄요. 못하면 가르쳐 주면 되니, 믿고 말고 할 거 없이 일단 시켜 보는 거죠.”
“난 믿음이 없으면 일 못 시키는데.”
‘갑자기 왜 반말이야.’
“시키시는 일이 업무적인 일이 아닌가요?”
아까 전 상무에게 백 실장에 대해 들었다.
‘뭐? 미행?’
“혹시 불법적인 거? 엄청난 믿음이 필요한?”
‘제 정신이 아닌 거지.’
도희의 밝은 표정과 뱉은 말의 괴리가 상당했다.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부사장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어떤 믿음인지 궁금해서요. 일을 잘할지 못할지에 대한 믿음인지, 아니면…….”
도희가 말끝을 흐리자, 이재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도희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보였다.
“내 말을 잘 듣는지, 안 듣는지에 대한 믿음인지.”
“…흐음.”
“그것도 아니면…….”
“아니면?”
“입이 가벼운지, 무거운지에 대한 믿음?”
“재밌네요.”
저렇게 살벌한 표정으로 재밌다니.
하지만 곧 정말 재밌는 듯 그의 입꼬리가 한껏 치솟았다.
“농담입니다.”
“강도희씨가 이렇게 재밌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워, 비꼼은 세상 최강자네.’
“다행이네요. 재밌으시라고 드린 말씀입니다.”
도희는 웃는 게 예쁜 여자였다.
영혼 없는 사무용 미소조차 부사장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아깝네.’
“강도희씨는 어느 쪽인가요?”
“무슨 말씀이시죠?”
“말씀하신 믿음 중 어느 믿음을 주실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음… 제가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합니다.”
“마음에 드네요.”
황이재의 시선이 도희의 얼굴로 꽂혔다.
뚫어질 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도희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부사장님이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네요.”
“커피는 없나요?”
‘주고 싶을 리가.’
“아, 오래 계실 건가요?”
이재의 짙은 눈썹이 티 나게 꿈틀거리더니, 그의 입에선 작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
‘표정 관리는 못 하는 타입이네.’
참을성 없는 그가 지금 얼마나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인지, 도희만 몰랐다.
“글쎄요. 길 수도… 짧을 수도…….”
부사장은 무언가를 생각하며 중얼거리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도희도 솔직한 속마음을 내뱉었다.
“짧았으면 좋겠는데.”
배시시 웃는 그녀를 보며, 이재는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했다.
‘허…….’
이재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희는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할 말 없으면 빨리 가, 그냥.’
부사장은 불편한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묘한 불편함을 만들어 내는 사람.
꿈틀거리던 그의 눈썹이 제자리를 찾더니, 책상에서 일어선다.
“궁금해서 왔습니다. 강도희 팀장이.”
“궁금증 해결은 되셨나요?”
“아주 확실히.”
느릿느릿 대답하며 도희를 바라보는 부사장의 눈빛을 도희도 그대로 받아 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밝게 미소 지어 보이지만, 이제는 빨리 가라고 등 떠미는 도희였다.
이제 도희의 고운 얼굴은 이재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백 실장 하나로 안 되겠군.’
반드시 치워야 할 존재.
그렇게 도희와 부사장은 절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로 서로에게 각인되었다.
* * *
비산병원 응급실.
침상 하나를 차지하고 앉은 강아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료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사고 이후로 병원까지 어떻게 온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공중에 붕 뜬 포돌이가 잔상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후…….”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강아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아씨.”
바닥으로 내리깔린 강아의 시야에 양말만 신고 있는 두 발이 나타났다.
어느새 치료를 마치고 나타난 우주였다.
“괜찮아요? 뼈 부러진 곳은 없대요?”
우주는 걱정스레 묻는 강아에게 치료받은 양쪽 팔꿈치를 내보였다.
심하게 다쳤는지 하얀 거즈는 벌써 피로 물들어 있었다.
포돌이 옷은 어디다 버리고 온 건지, 흰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흰 티라 덕지덕지 묻은 검붉은 피가 더 눈에 띄었다.
“두툼한 인형 옷 덕분에 전 무사합니다. 엑스레이까지 찍었는데 아무 이상 없다네요.”
“다행이네요.”
“아이는요?”
“의식이 없어서 검사한다고 데려갔어요.”
우주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웃고 있을 땐 한 없이 천사 같은 인상이지만, 무표정일 땐 한 없이 어두운 남자였다.
“기다려 보죠.”
그렇게 무거운 한 시간이 지났다.
넋이 나간 강아와 표정을 잃은 우주에게 검은 정장은 입은 말끔한 인상의 사내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