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화 이건 비밀인데…….
이들에게 다가온 검은 정장의 남자는 우주에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중앙초등학교 앞 교통사고로 실려 오신 분 맞습니까?”
“예. 접니다.”
남자가 내민 명함에는 [비산]이란 두 글자와 [장석현]이라는 이름만 쓰여 있었다.
비산 그룹은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기업이다.
지금 이들이 있는 곳도 비산 병원이었다.
‘비산이라…….’
“드릴 말씀도 있고 도련님 구해 주신 감사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도련님? 비산가 아들이라도 되나 보네.’
사고가 나고 길 건너편에서 급히 뛰어온 남자가 이 남자였나 보다.
“감사는 괜찮습니다. 더 잘 살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사고가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한 우주는 진심을 담아 허리 숙여 사과했다.
“아닙니다. 저도 도련님 부탁 들어드리느라 부주의했습니다. 학교 앞에서 기다리시는 걸 워낙 싫어하셔서…….”
“아이는요? 괜찮나요?”
성격 급한 강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직 의식은 없으십니다.”
“…큰일이네요.”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치신 모양입니다. 심각한 건 아니지만 며칠 지켜봐야 한다네요.”
“…….”
“…….”
마음이 무거워진 우주는 얼굴을 감싸며 고갤 숙였고, 강아는 차마 뒤이을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였다.
심각한 건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의식이 없으니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그 어떤 말도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우주와 강아가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건 약소하지만 답례입니다.”
남자는 이들에게 하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의 말에 우주의 시선이 흰 봉투에 닿았다.
“답례는 사양하겠습니다.”
고민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받아 두세요.”
그 순간, 이들의 뒤에서 앙칼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엔 깔끔한 오피스룩의 여성이 올곧이 서 있다.
“자리를 옮길까요?”
그녀를 본 남자의 얼굴엔 어둠이 짙게 깔렸다.
* * *
VIP 병실은 문도 자동문이었다.
문이 열리자, 호화롭게 꾸며진 휴게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이 호텔인지, 병실인지 헷갈릴 정도의 인테리어였다.
“앉으시죠.”
여자가 가리킨 의자에 우주와 강아는 나란히 앉았다.
‘병실 맞아? 환자는?’
강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자 반쯤 가려진 가벽 사이로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는 아이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
누워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속에서 괜한 불편함이 꿈틀거렸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오늘 일에 대해 어떠한 문제가 있었더라도 문제 삼을 생각 없습니다.”
뜨끔한 강아였다.
분명 빨간 불에 난 사고였다할지라도, 자신과 우주가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살폈다면 나지 않을 사고였다.
물론 법적 책임을 물긴 힘들겠지만, 도의적 책임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주도 같은 생각인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쉽게 가시죠.”
여자는 테이블 위에 서류와 볼펜을 꺼내 올려놓았다.
“이게 뭐죠?”
“직접 읽어 보시죠.”
그녀는 서류를 이들 앞으로 더 가까이 밀어 넣었다.
‘동의서?’
잠시 후, 종이 한 장을 들고 읽는 강아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희가 나중에 돈 요구라도 할까 봐 걱정되니, 여기에 싸인하라는 말씀이시죠?”
“뭐, 그렇게 해석하실 수도 있겠지만.”
비즈니스 미소가 익숙한 여자였다.
“그것보단 이 일로 서로 다신 볼 일 없으면 좋겠다는 뜻이지요.”
“이런 동의서에 제가 왜 서명을 해야 되죠?”
“향후 이번 일에 관한 어떠한 발언이나 요구를 하지 않으실 거라면, 동의서에 서명 못 하실 이유가 없지 않나요?”
여자의 말이 끝나자, 펜을 집어 든 우주는 아무 말 없이 종이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여성은 강아 앞에 있던 서류를 강아에게 한 뼘 더 가까이 밀어 넣는다.
가지런히 펜까지 놓아 주며.
강아도 마지못해 펜을 들었다.
“봉투는 넣어 두시죠. 그게 저희도 편해서요.”
서류를 챙긴 여자는 다시 테이블 위에 봉투 두 개를 올려놓았다.
봉투를 본 우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돈은 많아서요.”
처음으로 입을 연 우주였다.
여자의 눈빛에 의아함이 서렸다.
그녀는 느릿한 동작으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더니 등을 뒤로 기댄 채로 우주를 바라본다.
“그럼, 그러세요.”
이때, 장 기사가 급히 뛰어나왔다.
“천 변호사님, 도련님이 깨어나셨습니다!”
* * *
며칠은 있어야 의식을 회복할 거라던 아이는 금세 의식을 되찾았다.
의사는 말도 안 되는 회복 속도라고 했다.
아이가 깨어나자 천 변호사와 그 일행들은 사라졌다.
병실에는 장 기사와 우주, 강아만 남게 되었다.
“제가 여기 있을 겁니다. 두 분은 이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아이 보호자는 안 오시나요?”
강아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안 오실 거예요. 전 내놓은 자식이거든요.”
우주의 말에 대답한 건 누워서 책을 보던 아이였다.
“…도련님.”
장 기사의 표정이 안쓰러움으로 물들었다.
강아가 아이에게 다가갔다.
“꼬마야 부모님이 듣고 상처받으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제가 말한 게 아닌데요?”
“…….”
“괜찮아요. 틀린 말도 아니니까.”
‘얘는 무슨 애가 이런 말을.’
아이는 읽던 책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전 꼬마가 아니라 모세예요. 손모세.”
“몸은 괜찮니?”
“괜찮아요. 아줌마는요?”
‘아… 아줌마… 후.’
다친 아이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응, 누나는 괜찮아. 저 아저씨가 아주 쬐끔 다쳤어.”
똘망한 눈빛의 아이는 우주를 빤히 쳐다봤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
“허… 허…….”
허탈한 웃음을 내뱉은 강아는 둘을 번갈아 봤다.
* * *
모세와 대화를 나눈 우주가 급히 찾은 곳은 도로 교통센터였다.
“오늘 중앙초등학교 사거리 오후 2시부터 3시경… 어! 형사님 찾았습니다.”
영상 속엔 신호등 옆에서 대화하는 강아와 우주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엔 여러 명의 아이들이 서 있다.
잠시 후, 무리 중 한 아이가 홀로 횡단보도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분명 빨간불이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귓가에 길 건너라고 속삭였다고 했는데…….’
근처에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 근처로 다가간 사람도 없었다.
호루라기는 가지고 있던 사람은 우주와 강아뿐이었다.
* * *
다시 모세의 병실을 찾아온 우주를 맞이한 건 강아였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보면 몰라요. 일하잖아요.”
아이는 이미 잠든 상태였고, 장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여기서 일하십니까.”
“아이들은 어른들이 지켜야 한다면서요.”
“장 기사님은요?”
“식사하시라고 억지로 내보냈어요. 병실에 외부음식 반입 안 된다고 굶는다잖아요.”
“제가 있을 테니 들어가 쉬십시오.”
“형사님이나 쉬세요. 전 이것만 마무리하면 내일 종일 쉬어도 돼요.”
“둘이 여기 같이 있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들어가서 쉬십시오.”
“강도희 부를까요? 셋이 있을래요?”
“…….”
“어라? 왜 고민하시지. 고민할 게 뭐 있어요. 바로 전화…….”
강아가 도희에게 전화를 걸려는 찰나, 순식간에 다가온 우주가 강아의 전화를 낚아챘다.
“뭐야, 날아왔어요? 뭐가 이렇게 빨라.”
“안 부르셔도 됩니다.”
“누가 부른대요? 나는 그냥 친구한테 전화하는 건데?”
“아무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뭘요?”
“오늘 일 말입니다.”
“말하면 안 돼요? 좋은 일 하셨잖아요.”
“부끄러운 일이죠. 아이 하나 지키지 못했는데.”
“인생 복잡하게 사시네요.”
“단순하게 사시는 거 부럽습니다.”
“뭐라구요?”
강아의 쏘아붙임에도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는 우주였다.
“차암나~ 나 같으면 한 번 부끄럽고 좋아하는 사람 보고 말겠네.”
“걱정 끼치기 싫습니다.”
“허얼. 둘이 뭐 벌써 가깝나 봐? 이 기지배, 나 몰래 남자 만나고 있었네. 와!”
“마음대로 생각하십쇼.”
“근데 형사님 묘하게 달라지셨다. 원래 이런 성격이신가?”
“아, 들켰나요? 이건 비밀인데…….”
강아에게 가까이 다가간 우주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제가 원래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도희씨랑 강아씨 앞에서는 자꾸 오리지널 버전이 나오네요.”
‘뭔 소리야.’
“음… 하나는 확실하네요.”
“……?”
“제정신은 아니신 거 같아요. 도희랑 아주 잘 어울리시겠어요.”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강아였다.
* * *
인적이 드문 어느 다리 밑.
고급 차량 두 대가 나란히 정차되어 있다.
새빨간 세단에서 내린 사람의 손엔 묵직한 가방 하나가 들려 있다.
그 가방은 그대로 검은 차량 트렁크에 실린다.
가방을 실은 사람이 검은 차량의 운전석으로 다가가자, 운전석의 창문이 살짝 내려졌다.
“백 실장님, 잘하고 있는 거 맞아요?”
다가온 사람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의 박 비서였다.
“당신이 직접 하던가.”
차 안에 타고 있는 이는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아무튼 알아서 잘 처리하세요.”
“아직 처리하란 말은 없던데?”
“부사장님이랑 일 한두 번 하세요? 눈치껏 먼저 행동할 때도 되지 않았나.”
차 안의 이는 소리 없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돈값을 하시라는 말이에요.”
연이은 박 비서의 말에도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백 실장은 그녀의 말을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명함 크기의 종이 한 장을 창문 밖으로 버린 뒤 그대로 출발했다.
박 비서는 그 종이를 주워 들었다.
바뀐 대포폰의 전화번호였다.
“재수 없어, 진짜.”
* * *
“하, 오늘 도사님이 무척 필요한 날이었어요.”
—잘해 놓고는 웬 엄살이냐.
“몰카범이고 부사장이고 그냥 싹 다 도사님 만지게 해서 속마음 다 듣고 싶었다니깐요!”
‘서책에 손만 대게 하면 다 들릴 텐데. 에잉.’
도희는 제 얼굴만 한 맥주잔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야, 너 단어 선택 그게 뭐야. 도사님을 만지게 하다니. 말 좀 가려 해.”
“뭐래. 이강아, 무슨 생각한 거야. 이상하게 생각하는 네가 더 이상해.”
순간 강아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밖으로 뛰쳐나간다.
“엥? 왜 저래요?”
—끄응. 나에게 본인 생각을 들킬까 도망가는 거 같구나.
“에혀, 제정신 아니야 쟤도.”
도희는 고개를 내저으며 오징어를 마저 뜯었다.
“이강아! 그냥 들어와! 이미 틀렸어!”
도희가 소리쳐 강아를 부르자, 아직 얼굴에 붉은 기를 머금은 강아가 미적거리며 들어온다.
“너 근데 부사장이 미행 붙인 거면 위험한 거 아니야?”
“몰라아. 아직 난 보지도 못했어.”
“미행하는 사람이 보이게 미행하겠냐?”
이 일을 형사인 우주에게 살짝 알려 줘야 하나 고민하는 강아였다.
—며칠 전부터 우릴 쫓는 같은 기운이 느껴지긴 하더구나.
“악한 기운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