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35)화 (35/120)

034화 낭패불감(狼狽不堪)

면왕산 등산로 입구.

아리따운 흑발의 여인이 서 있다.

고운 몸 선을 가진 여인이었다.

‘하, 아침부터 등산이라니.’

내리쬐는 햇살에 남은 잠은 이미 달아났다.

산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엔 좌측에 있는 조그마한 산봉우리가 가득 담겼다.

‘저기란 말이지…….’

묘한 설렘이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가 봅시다!’

여인이 가방끈을 다 잡고 힘찬 첫걸음을 내딛는 찰나.

─아이고, 왔네. 왔어. 결국 왔구만…….

‘아, 설마…….’

도희는 고개를 돌려 사방팔방을 훑었다.

‘여기까지 쫓아왔어요?’

─끄응. 어째 두 놈 다 쫓아 왔누.

물기 머금은 도희의 머릿결이 윤기 나듯 햇빛에 반짝였다.

‘아오, 이러면 급하게 나온 의미가 없잖아!’

누군가 자신을 뒤쫓는 걸 알지만, 신고할 수도 없었다.

‘모습이 보여야 신고할 거 아닌가. 보여야!’

부사장이 미행 붙인 ‘백 실장’은커녕 전 상무가 걱정 끝에 따라 붙였다는 ‘가드’도 본 적이 없다.

그들도 도술을 쓰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리 능력이 좋은지.

그나마 도희가 그들의 미행을 알아챈 것도 도사 덕분이었다.

며칠 동안, 같은 기운을 가진 사람들이 도희의 행방을 쫓는다니까 그들이 분명했다.

‘근데 설마 산까지 따라 오르겠어요?’

─끄응, 일단 가 보세.

면왕산은 도심 끝에 위치한 산으로 그다지 험한 산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주관적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도희에겐 이야기가 달랐다.

“헉… 헉… 허헉…….”

‘아직도 쫓아와요?!’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 가빠진 호흡이 그녀의 저질 체력을 말해 줬다.

─고작 반 시진 오르고 헐떡이는 게냐.

“후… 하… 후…….”

등산로 모퉁이에 멈춰 선 도희는 고갤 땅에 박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길게 늘어진 흑발이 산들바람에 흩날렸다.

“하…….”

도희는 바람에 흩날린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머리를 살짝 쓸어 올렸다.

그 모습은 마치 슬로 모션처럼 우아했는데, 지나는 이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유난히도 하얀 피부와 앵둣빛 입술에서 다 죽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고… 죽겠네! 아이고!”

도도할 법한 분위기를 가진 그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녀의 발길을 멈추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남정네들은 아쉬운 눈빛을 보내며 아주 천천히 그녀를 지나쳐갔다.

─멀지 않구나. 다가오고 있네.

‘하, 제발 적당히 일하라고, 이 사람들아!’

도희는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 이제 좀 살겠다.”

‘나쁜 놈이 책임감은 대단하네. 무슨 등산까지 쫓아와. 아오!’

산 아래를 보니 여럿이 올라오고 있다.

저들 중 ‘백 실장’과 ‘가드’가 있겠지.

‘그냥 여기서 쉬다가 저 사람들이 먼저 오르길 기다릴까요?’

─저들이 잘도 비켜가겠구나.

‘쟤들도 눈치가 있을 텐데, 따라서 쉬겠어요? 훤히 다 보이는데?’

─끄응… 그래. 기다려 보자꾸나.

벌떡 일어선 도희는 산 아래가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를 찾았다.

“아이코.”

짧은 신음을 뱉으며 주저앉은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산 아래를 향해 있었다.

“흐흡…….”

숨을 크게 들이켰다.

청량한 풀 내음이 폐 속 깊숙이 차 들어왔다.

귓가에 맴도는 새 소리를 들으며 멍해질 무렵.

도희의 시야에 막 들어온 한 남자가 그녈 발견하더니 발길을 멈춘다.

남자와 도희의 시선이 맞닿았다.

아니, 맞닿은 듯했다.

멀찍이 멈춰 선 시커먼 사내.

검은 정장에 까만 선글라스까지 낀 남자의 고개는 한껏 꺾여 도희를 향해 있었다.

‘풉, 딱 봐도 저 사람이네.’

등산할 만한 옷차림새는 아니었다.

─맞네. 저자네.

온몸을 블랙으로 휘두른 사내는 몸집이 크진 않았지만, 꽤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저기서 멈춰서 기다리는 것도 너무 티 나지.’

도희가 그의 반응을 구경하듯 산을 오르는 사내를 쳐다보고 있는데, 방금 남자가 멈춰 섰던 곳에 다른 사람이 똑같이 멈춰 선다.

흰 반팔에 적당한 핏의 청바지를 입은 단발의 여인.

더웠는지, 그녀의 허리에는 베이지색 카디건이 묶여 있다.

─저자도 맞네.

‘누구요? 설마… 저 여자요?’

─저 여인일세.

“헐.”

도희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전이사님 배려가 깊네. 내가 여자라고 여자 가드를…….’

─저 자가 백 실장일세.

‘에?!’

도희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부사장 나쁜 짓 도맡아 한다는 그 ‘백 실장’이?’

당연히 남자일 거라 생각했다.

‘물론,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지만…….’

─어허, 어찌 악행을 행함에 있어 남녀가 유별하단 말인가.

‘…예, 예. 소인 자숙하여 편견 어린 시선을 버려 보겠사옵니다.’

도희의 남녀 발언을 그대로 돌려주는 도사였다.

‘도사님 은근 소심하시네.’

─이놈이!

‘욕은 못 하셔서 다행이고.’

─아이고… 내 죄지. 전부 내 죄야…….

멈칫했던 여자의 발길이 다시 움직인다.

거의 달려오다시피, 산을 뛰어오르는 여인을 보고 도희는 흠칫했다.

‘뭐, 뭐야. 왜 뛰어와!’

여인이 뛰어오르자, 느릿하던 검은 사내의 발길도 그녈 따라 급해졌다.

가까이 다가온 ‘백 실장’으로 추정되는 여인을 보고 놀란 도희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도희의 손이 가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여인은 무심한 눈길로 도희를 지나친다.

‘헐, 예뻐.’

언뜻 스쳐봤는데도 자꾸 눈길이 가는 얼굴이었다.

특히, 그녀 볼에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곱게 굴곡진 몸매는 꽤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듯 탄력 있어 보였다.

그렇게 도희를 지나친 여인은 한참을 뛰어오르더니 도희의 시선 끝에 멈춰 섰다.

‘설마 더 안 가?’

도희처럼 털썩 주저앉는 여인.

‘아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앞뒤로 ‘백 실장’과 ‘가드’ 사이에 끼게 된 도희였다.

─더 골치 아파졌구나.

여인을 따라 급히 오르던 검은 사내도 이제야 느릿하게 도희를 지나친다.

‘백 실장이 해코지하려는 줄 알고 급히 따라 오른 거 같죠?’

이렇게 보니 검은 사내는 전 상무가 붙인 ‘가드’가 확실했다.

그도 도희와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서더니, 큼지막한 돌계단 위에 주저앉는다.

‘이 사람들 감출 생각 없어 보이는데요?’

‘가드’는 도희가 자신의 존재를 안다는 걸 아는지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붙인 사람도, 도희에게 언질 해준 사람도 전 상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괜찮다고 했는데 기어코 붙였네.’

자신의 만류에도 가드를 붙인 전 상무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지, 애매한 도희였다.

옅은 숨을 내뱉는 도희의 시야에 애써 딴청 하는 백 실장이 들어왔다.

‘너도 참 열심히 일하는구나.’

그들은 저마다 자릴 잡고 앉아 도희 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닌 척 태연하게.

‘다 티 난다고 이 양반들아!’

도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쩌죠? 등산로 벗어나면 이상하게 여길 텐데.’

산 정상이 아닌 좌측 봉우리에 오르기 위해선 이쯤에서 숲길로 빠져야 한다.

일이 이 지경이 돼서야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원래 주차장에서 도술로 도사의 은신처를 가 볼까도 싶었다.

‘근데 계룡산에서 내려올 때 한 고생이 떠오른 걸 어떡해!’

도사와 고민 끝에 걸어 오르고 도술로 내려오는 걸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

결국 이 꼴이지만.

‘하… 진짜 방법이 없나.’

이제 서야 도술로 오른다고 한들 그들이 도희만을 주시하고 있기에 도술을 쓸 수도 없다.

─낭패불감(狼狽不堪)일세.

‘후, 이럴 때 방법은 하나에요.’

무언가 결심한 듯 굳게 다물어진 입술.

벌떡 일어난 도희는 등산로를 벗어나더니, 숲길로 미친 듯 달리기 시작했다.

*     *     *

“박 대리! 이럴수록 자네만 곤란해지는 걸 왜 모르나 이 사람아.”

“제가 곤란할 게 뭐 있습니까. 어차피 다 걸린 마당에.”

철제 의자에 삐딱하게 등을 기대고 앉은 자세와 비틀리며 올라간 입꼬리.

현행범으로 잡혀 온 박현일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다 같이 죽자고?”

“에이~”

주먹을 꽉 쥔 한 부장은 올라오는 화를 겨우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현일아. 내가 도와준다니까? 그래서 변호사도 붙여 줬잖아.”

“부장님.”

한 부장이 콧바람을 불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래, 현일아.”

“진짜 방법이 없으시다고요?”

물론, 한 부장도 진심으로 돕고 싶었다.

하지만 불법 카메라 설치 현행범으로 잡혀 온 그를 무슨 수로 빼낸단 말인가.

그것도 사내 화장실에!

한 부장은 옆에 앉은 변호사에게 눈짓했다.

“최소 형량 받도록 최대한 지원하겠습니다. 초범이니 벌금이나 집행유예까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본인도 본인의 죄를 아는지, 박현일은 영 못 미더운 눈치로 되물었다.

“추가로 발견된 카메라는 절대 본인이 설치한 게 아니라고 우기십시오. 영상도 누가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본인이 넣은 게 아니라고 하셔야 합니다.”

“흐음… 재판 전까지 보석으론 못 나가나?”

그는 지금 구치소에 수감 중이었다.

“증거 인멸 우려가 있어 힘들 거 같습니다.”

박현일은 변호사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뒤.

박현일은 뭔가 결심이 선 듯 탁자를 탁! 내려치고는 입을 열었다.

“징역은 절대 못 살아요. 나, 절대 혼자 안 죽습니다.”

이를 악다물고 말하는 그의 말에 한 부장의 눈은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었다.

“에이~ 자네가 죽긴 왜 죽나. 같이 살아야지.”

과연 진심일까, 의심되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벌금도 부담해 주시는 걸로. 오케이?”

이를 환히 드러낸 박현일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걸렸다.

“…….”

표정 관리가 힘든 한 부장은 깊은숨을 내쉬며 제 얼굴을 쓸었다.

“아님 뭐, 같이 죽…….”

“오케이!”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걸린 현일을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한 부장이었다.

“대신.”

“……?”

“여기까지다. 네 협박이 먹히는 건.”

“당연하지요. 부장님 제가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그리고 그 일들 파헤쳐 봤자 저도 같이 나락입니다. 이미 같은 배 탄 거예요.”

성질 같아선 헤벌쭉 웃는 현일에게 뭐가 웃기냐고 욕이라도 퍼붓고 싶지만.

부들거리는 손을 애써 주먹 쥐어 보이며 참아 내는 한 부장이었다.

“그럼 이만 가 보지.”

“한 부장님.”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일어선 한 부장을 박현일이 잡아 세웠다.

“그년이 강도희죠?”

한 부장이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왜? 복수라도 하려고?”

“에이, 무슨 그리 무서운 말씀을.”

한 부장이 아는 박현일은 절대 그냥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강도희랑 박현일이라… 볼 만하겠네.’

미소 지은 입과 달리 박현일의 눈에선 섬뜩함이 번뜩였다.

그의 기괴한 표정을 본 한 부장은 고개를 저으며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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