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푸른 옥빛 도포
“헉, 헉… 헉.”
미행을 따돌리는데 성공한 도희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눕고 싶은 그녀는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겨우 서 있는 상태였다.
“후… 하… 후…….”
아무리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뱉어도 가빠진 심장은 느려질 줄 몰랐다.
“아니… 후… 그래도 어릴 적엔 달리기… 좀 했는데… 후…….”
비탈진 산길을 뛴다는 건 보통 고된 일이 아니었다.
백 실장과 가드가 어찌나 빨리 쫓아오는지, 결국 적당히 달리다 큰 나무 뒤에 숨어 도술을 사용해서 겨우 따돌렸다.
“아이고. 나는 못 간다. 못 가. 배 째.”
혼잣말인지 들으라고 한 말인지, 도희는 못 간다는 말을 반복하며 나무 기둥에 등을 대고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쉬었다 가자꾸나.
도사는 황당했지만, 굳이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매사 제멋대로인 이 여인을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희 방금 합이 엄청 잘 맞았죠? 이런 게 바로 현대어로 팀워크예요. 팀워크!”
도희의 입가가 한껏 올라가더니, 뿌듯한 함박 미소가 걸렸다.
─그게 네가 한 것이더냐. 내가 한 것이지.
“에이~ 내가 어! 기둥 뒤에 딱! 서책에 손 딱!”
보는 사람 없지만 허공을 보며 열심히 재연하는 도희였다.
“우리 둘의 합작품이죠!”
─허허, 그래. 그렇다고 하게나.
도사는 들뜬 도희를 보며 적당히 맞장구쳐 줬다.
굳이 찬물 끼얹을 필요 뭐 있겠는가.
이 여인이 잘해 주고 있는 것도 맞았으니, 적당한 당근도 필요한 때였다.
“도사님 웃는 거 처음 듣네요.”
─허허허, 그러냐?
“도사님은 실체가 없으니까 제가 표정을 볼 수가 없잖아요.”
가끔 도사가 말할 때 어떤 표정으로 말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었다.
‘그래야 눈치껏 잘… 크흠.’
도희가 아무리 딴청 해봐야 이미 생각한 것을 지울 방법은 없었다.
─이러면 되겠느냐?
그 순간, 가방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온다.
‘엥?’
빛을 발견한 도희가 가방을 열어 서책을 꺼내는데…….
“꺄악!!!”
양피지 서책 겉면에 입체적인 백발 할아버지의 얼굴이 둥둥 띄어져 있었다.
“이건 좀 징그럽잖아요. 도사니이이임!”
─에잉. 이건 어떠냐.
저만치 돌려져 있던 도희의 고개가 슬며시 다시 가방 속으로 향했다.
굵고 곧은 하얀 눈썹, 부리부리한 눈매, 까만 눈동자, 큼지막한 입까지.
붓으로 그려진 듯한 검은 선의 평면적인 얼굴은 전과 달리 징그럽지 않았다.
─어디가 징그럽다는 게냐. 끄응… 망둥이 같은 것.
도희는 공손히 서책을 집어 들었다.
도사가 말할 때마다 눈썹과 입이 씰룩씰룩 움직였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부리부리 빛나는 눈빛이, 딱 심술 난 할배 같았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들지만…….”
귀에 소리만 들리는 것보단 나았다.
‘만화 보는 거 같기도 하고. 풉.’
─회복 좀 하거라. 갈 길이 머니.
“예? 이제 그냥 도술 쓰면…….”
─네 기운이 차야 이동할 거 아니냐.
“도사님 근데… 심술 나신 거예요? 표정이 원래 그러신 거예요?”
─아이고… 내 살다 살다.
“신기해서 그래요. 신기해서.”
나직이 피어나는 도희의 미소에 도사도 별말 없이 옅게 미소 지어 보였다.
속과 겉이 같은, 보기 드물게 솔직한 사람이 바로 도희였다.
“얼마나 쉬어야 도술로 이동 가능할까요?”
─숨 좀 돌리고 바로 가자꾸나. 또 쓰러질까 염려되이.
“좋아요. 산 공기가 좋긴 좋네요.”
잠깐 쉬었다고 또 살 만해졌다.
다시 뛰라고 해도 뛸 수 있을 것만 같다.
─산에선 기운을 받아들이기 쉽네.
─‘특히 이 아이처럼 도가(道家)의 기운을 가진 아이는…….’
“자, 가서 쉬어도 되니까 그만 가 볼까요?”
서책은 이미 도희 손에 쥐어 있었다.
도사 할배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일더니, 곧 얼굴에 차가운 공기가 확 와 닿았다.
“어!”
분명 공간이 달라졌다.
여전히 숲속이었지만, 이곳의 바닥은 평평했다.
‘이런 곳에 동굴이 있을 거 같진 않은데.’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우거진 나무숲 한가운데였다.
─저곳일세.
도사의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쏠렸다.
“저, 저긴 절벽이잖아요?”
‘왜 한 번에 안 가시고…….’
─시야에 들어온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쉽네.
“절벽 속에 있어요? 도사님 동굴이?”
─저기 보이는가? 향나무 군락이.
높게 솟아 있는 절벽 위의 나무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 눈앞에 보이는 이 절벽에서 나무가 모여 있는 단 한 곳.
깎아지른 절벽의 한 중간.
─입구는 저곳에 있네.
“절묘하네요. 어떻게 나무가 저기만 모여 있지.”
─그야 물론, 이 몸이 친히 심었네.
“허…….”
의기양양한 표정 뭐야.
코는 왜 높아지는데.
─내가 또 조경에도 조예가 깊으이.
‘어련하시겠어요.’
어쩐지 저런 곳이 아니라면, 하루에도 수백 명이 찾는 왕래가 잦은 이 산에 있는 동굴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등산로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라 한들, 그 오랜 시간 발견되지 않음은 이상했다.
절벽 한중간 나무 틈 사이에 동굴 입구가 있을 거라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사실 저곳은 알아도 못 간다.
도사가 아니고서야 저곳을 어떻게 가겠나.
─어서 가게나. 저곳은 나에게도 추억이 많으이.
도희의 손끝이 조심스레 서책에 닿았다.
화아아아─
요사스러운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도희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찬 공기가 온몸을 덮치며,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앗!”
이어 도희의 발이 땅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방금 공중으로 이동한 거 같은데?”
─크흠, 소소한 차(差)가 있을 수도 있네. 이 정도면 훌륭허이!
도희가 서 있는 공간은 성인 두 명이 겨우 서 있을 만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입구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
등 뒤에 있는 좁은 입구를 보니, 우거진 향나무들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든다.
동굴을 밝히기엔 무리였다.
도희가 손을 머리 위로 뻗었다.
동굴 천장은 손을 길게 뻗고 폴짝 뛰면 닿을 듯 가까웠다.
“이런 곳은 어떻게 발견하신 거예요?”
─내가 만들었네.
“아…….”
‘제집도 하나 만들어 주시면…….’
도사의 도술만 있다면 산에 거처를 마련해도 괜찮겠다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도희였다.
도사의 눈이 가늘게 찢어진다.
─그래서 여기서 잘게냐?
‘하여튼, 비꼬시기는!’
도사의 재촉에 도희의 발이 움직였다.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시야가 어두워졌다.
계룡산에서의 일이 떠오른 도희는 얼른 휴대 전화로 꺼내 들었다.
휴대 전화 불빛에 의지해 걸어 들어가기를 한참, 동굴 속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은 점점 넓어졌다.
옆으로는 다섯 사람이 서도 넉넉할 만큼 넓어졌고, 천장은 아무리 뛰어도 닿지 않을 만큼 높아졌다.
‘와… 보기보다 엄청 깊네.’
어느덧 끝에 다다랐다.
“왜 아무것도 없어요?”
주변을 둘러보니 돌벽만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곳에 석고(石庫)가 있네. 벽으로 가까이 가 보게나.
“석고?!”
커질 대로 커진 도희의 눈이 급히 벽을 훑는다.
벽을 두드리는 손에 닿는 느낌은 거칠고 딱딱하다.
특별할 거 없는 돌벽이었다.
─붓은 좀 들어봤느냐?
“예? 붓이요?”
‘갑자기 웬 붓?’
─어려울 거 없네. 그저 따라 그리면 되네.
도희의 한 손에 고이 들려 있던 서책이 빛을 뿜더니 자동으로 펼쳐졌다.
이내 허공에 작은 붓 하나가 나타나더니, 글인지 그림인지 모를 선들을 펼쳐진 누런 종이 위에 그려 낸다.
“어디에 따라 그리면 돼요? 저 벽에?”
역시 눈치 하난 빠른 도희였다.
도희는 걷어붙일 옷도 없으면서 괜히 팔을 걷어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정확히 십 분 후.
─내 자네에게 도화서(圖畵署) 화공(畫工) 만큼의 실력을 바란 게 아니거늘. 하이고, 어찌 이리 천치같이 그린단 말이냐.
“도사님이 휘갈긴 걸 한 번에 쫙 따라 그리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게다가 한 손엔 서책을 들고 다른 손으로 서책과 벽을 번갈아 보며 그리다 보니, 잘 그리고 있는지 못 그리는지 확인이 힘들었다.
똑같이 그리면 문이 열릴 거라고 했으니, 십 분 동안 제대로 그려낸 거 없다는 말이었다.
“도사님이 아까 그 붓으로 그릴 순 없나요?”
‘슉슉, 몇 초 만에 잘만 그리시더만!’
손가락으로 벽에 그림을 그리는 도희도 지문이 다 까져 아려오고 있었다.
─그건 그저 환영(幻影)일세. 벽에 닿을 리 없는.
직접 닿지 않으면 의미 없다는 말이었다.
‘어? 그릴 순 있다는 거잖아?’
순간 도희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
─호오…! 내 그 생각을 못 하였구나.
‘머리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더니!’
─뭐라?! 네 지금…….
“저 말이에요. 저.”
커진 도사의 목소리에 도희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곧이어 허공에 나타난 붓이 벽에 또 한 번 휘갈겨지고, 붓이 남긴 환영을 따라 도희는 손을 움직였다.
도희의 손길이 마지막 한 획마저 채우자,
쿠우우우웅─
벽이 진동하더니 딛고 선 바닥이 흔들린다.
“어? 어… 무너지는 거 아니에요?”
드륵, 드르륵, 드드드.
소란스러운 상황에 도희는 서책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쿠웅!!
드르, 드르르르르륵.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막혀 있던 묵직한 석벽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이내 오랜 시간 쌓인 하얀 먼지 폭풍이 도희를 덮쳐 왔다.
“어푸… 푸… 푸.”
연신 손사래 치던 그녀가 손동작을 멈추니, 살짝은 쾨쾨한 공기가 코를 찔러왔다.
도희의 인상은 잔뜩 찡그려졌다.
드륵! 쿵!
석문(石門)이 온전히 다 열리고, 도희는 잠시 흙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먼지 장난 아니네요.”
─들어가 보자꾸나.
도희의 발이 석문을 지나치자, ‘타탁’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방의 등불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허얼.”
석고는 단정히 정돈된 옛 방의 모습이었다.
먼지들이 소복이 쌓인 나무 바닥은 오랜 시간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듯, 도희의 발이 스친 곳에만 옅은 발자국이 남았다.
도희는 짧은 탄성을 지르며, 오른쪽 벽으로 달려들었다.
“와! 이거 도사님이 입던 거예요? 이게 어떻게 멀쩡하지?”
벽에 걸린 푸른 옥빚 도포는 마치 스스로 빛을 내듯 범상치 않아 보였다.
옆에는 빳빳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갓도 가지런히 걸려 있다.
─그럴 수밖에.
도희의 손이 옥빛 도포에 닿았다.
─이곳에 온전한 물건들은 죄다 요물(妖物)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