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40)화 (40/120)

039화 샤워가운 걸친 남자의 물기 머금은 머리카락

“도희씨!”

“아… 도하씨.”

도하가 청량한 미소를 보이며 다가왔다.

“아우… 오늘 날씨가 좋네요.”

괜히 딴청 피우는 도희였다.

자신의 꼴이 생각난 도희는 차마 도하를 마주 보지 못했다.

고개 숙인 도희의 눈에 도하 손에 들린 쓰레기봉투가 들어왔다.

“이 동네 사세요?”

“어제 이사 왔습니다. 여기 오션으로.”

그의 뒤로 고급스러운 외관을 가진 오피스텔이 보인다.

도희 집 창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고층 건물이었다.

‘우리 집이랑 엄청 가깝네.’

“도희씨는 어디 가세요?”

“아… 쩌어기 헬스장요. 운동하러… 아하하…….”

목을 긁적이며 얼렁뚱땅 대답하는 도희였다.

물론 오늘 처음 가지만 설명은 생략하고.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도희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슬그머니 발을 옮겼다.

“어디 헬스장 다니세요?”

“어… 그… 사거리에 있는 거요.”

사실 아직 그녀도 정하지 못했다.

사거리에 있는 헬스장이 최소 두세 개는 넘었으니 그중 하나겠지.

“음… 네. 도희씨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햇살이 눈부신 건지,

그의 미소가 눈부신 건지.

‘왜 너만 빛나니.’

“네. 도하씨 짐 정리 잘하세요.”

그렇게 도희는 쏜살같이 거리를 벗어났다.

*     *     *

도희는 헬스장 등록을 마치고 내친김에 오늘 몫의 운동까지 해버렸다.

반팔, 반바지의 헬스복은 도희의 깡마른 팔다리를 여실 없이 드러나게 했다.

“회원님 바디선은 예쁘신데… 음… 근력 위주로 하시면 좋겠네요. 이리 와보세요.”

차마 부실하단 말은 내뱉지 못하는 착한 트레이너였다.

*     *     *

어느 구석진 비즈니스 BAR.

이곳엔 회원들만 찾는 VIP룸이 있다.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인테리어로 나름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다.

지금 열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커다란 VIP룸에 사람은 달랑 네 명만이 앉아 있었는데, 테이블 위 가득 차려진 안주와 고급 양주는 이곳에서 가장 비싼 것들이었다.

“뭐?”

상석에 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분위기는 한껏 가라앉았다.

‘그게 뭔 헛소리냐’하는 표정으로 백 실장을 쏘아보는 부사장 황이재였다.

“산에서 불법적인 활동을 하는 게 분명합니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캐주얼한 복장의 여자, 백 실장의 고개는 바닥을 향해 있었다.

모자에다 고개까지 숙인 탓에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실루엣만 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분명히 미행하는 걸 알고도 일부러 저를 따돌렸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확신이 묻어났다.

“산을 오를 때 가방과 내려올 때 가방이 달랐습니다. 산속에서 무언가 거래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재는 여전히 영문 모르겠단 표정이다.

“무슨 거래?”

“그건 제가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만. 넌 이제 빠지라고 했지.”

황이재는 잔에 담긴 술을 천천히 들이켰다.

“얼굴 다 탄로 난 애가 미행은 무슨.”

고개 숙인 백 실장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

“그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왜, 친구라도 되려고?”

그의 말엔 조롱이 가득했다.

“같은 여자니 그 방법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재의 시선이 백 실장의 깁스한 다리를 스쳤다.

“예정대로 입금할 테니까 이번엔 넌 빠져.”

“그럼 강도희 이대로 두시는 겁니까?”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알 수 없는 분노가 이글거렸다.

왜 백 실장이 강도희에게 악감정을 가졌는지, 이재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애 붙였으니까 넌 다시 부를 때까지 쉬어.”

“예.”

백 실장은 절뚝거리며 룸을 나섰다.

방 안엔 잠시 동안 묵직한 침묵이 고였다.

한 부장은 이재의 눈치를 보며 안주 하나 제대로 집어 먹지 못하고 있다.

“자,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다들 한잔하지.”

이재가 운을 떼자 모두 잔을 들었다.

한 부장이 옆에 있는 이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참 말이 없습니다.”

한 부장의 말을 들은 젊은 사내 한 명이 입을 뗀다.

“부사장님 뵙고 싶었습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젊은 친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쯔.”

황이재는 짧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난 입바른 소리 안 좋아해.”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젊은 사내는 벌떡 일어서더니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황이재는 문뜩 강도희와의 만남이 떠올렸다.

‘강도희…….’

그가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도희 같은 강단이 없었다.

‘그런 애 하나 어디 없나.’

“아쉽네.”

“예?”

“아니야. 마셔.”

황이재의 한마디에 모두가 술잔을 비워 냈다.

“크으…….”

“크…….”

“큽.”

순간, 이재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꽂혔다.

모두가 황이재의 비위를 맞추는 이곳에서.

양주를 처음 마시는지, 아니면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인지 연신 표정을 구기는 젊은이가 있다.

“술을 못하나?”

“즐겨 마시진 않습니다.”

아까부터 말이 없던 그 젊은 이었다.

‘호오…….’

안절부절못하는 한 부장과 달리 그를 보며 눈을 반짝이는 이재였다.

“부사장님. 저 친구가 이번에 개선부에 들어간…….”

황이재의 손짓을 본 한 부장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기소개는 직접.”

부사장에게 지목당한 젊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     *     *

띵동─ 띵동─

띵동─

띠리리─

현관문이 열리고, 우주는 말문이 턱 막혔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빛을 발산하는 사내가 튀어나와 놀란 우주였다.

‘이 집 현관 조명이 밝은가?’

방금 샤워를 마친 듯, 샤워가운 걸친 남자의 물기 머금은 머리카락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다.

“누구십니까?”

섹시와 퇴폐를 오가는 그 모습은 여자 꽤나 홀릴 장면이었지만 상대는 우주였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서부서 강력팀 경위 우주라고 합니다.”

우주가 경찰 뱃지를 내보였다.

“예.”

‘아무 동요가 없어?’

“1003호로 어제 이사 오셨죠?”

“예.”

“그… 알고 오신지 모르겠지만, 이사 오시자마자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합니다.”

우주가 염려 어린 얼굴로 머뭇거렸다.

순진한 척하는 그의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얼마 전 옆집 1004호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 저희가 잠복 조사 중입니다.”

남자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살인 소리를 듣고도 침착해?’

“혹시 계시면서 수상한 자를 보시거나 이상한 점 있으시면 여기로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주가 본인의 명함을 내밀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명함을 받아 든 남자가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문을 닫았다.

“흐음…….”

생각에 잠긴 우주는 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     *     *

첫날이라 적당히 러닝이나 뛰려 했건만!

도희는 트레이너의 과한 친절과 관심에 여기저기 끌려다녀야 했다.

거의 넝마가 되어 집에 도착하니, 어디서 많이 보던 책 한 권이 거실에 둥둥 떠다닌다.

“…도사님?”

─내 예상이 맞았네!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 않다 했거늘!

누런 서책이 도희의 코앞으로 날아왔다.

흰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서책, 아니 도사에게서 처음 듣는 한껏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항아리에 적어도 몇 백 년의 정기가 들어차 있네! 저기에!

도사의 눈동자가 향한 곳엔 도희 허리 반만큼 오는 꽤 큼직한 갈색 항아리가 있었다.

면왕산 석고 제일 구석에 있던 둥근 항아리, 도사가 제일 먼저 챙기라던 그 항아리였다.

‘어쩐지, 그래서 뜬금없이…….’

운동가기 전, 도희는 도사의 요구에 따라 서책을 항아리 속에 넣고 나갔었다.

“근데 저 항아리도 도사님이 만드신 거 아니에요?”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좋아하시네.’

─본디 물을 기르지 않아도 자연히 채워지는 물동이였네. 허나 시간이 흐르며, 미세한 균열이 난 탓에 도술이 어긋나 정기가 모였나보이!

‘도술이 어긋나 물이 아닌 정기가 찼다고?’

─흐흐, 이런 횡재가 다 있나!

겉면에 갈매기 눈을 그린 서책이 ‘허허허’ 웃으며 온 집 안을 둥둥 떠다닌다.

“요물은 훼손할 수 없다 하지 않으셨어요?”

‘근데 어떻게 금이 가고 도술이 어긋나?’

순간 서책은 다시 도희의 눈앞으로 날아왔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건 나도 의문일세… 물의 음기가 계속 들어찬 상태로 오랫동안 산의 정기가 흘러 견디지 못하였나 싶은 것이…….

좌우로 굴러다니는 도사의 눈동자를 보니.

“모르신단 말씀이네요.”

─어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원래부터 금이 간 항아리에 도술을 거신 건 아니에요?”

─…….

“뭐예요. 그 표정은……?”

─아무래도 내 정신이 탁해진 듯 허이. 자네도 생각해 내는 걸 내 어찌…….

“쯔, 조심성 없으시긴.”

도희는 작게 혀를 차더니, 가늘어진 눈매로 말을 이었다.

“다른 요물도 도술 뒤틀린 거 아니에요?”

─보(褓) 안에 있던 건 다 확인했네. 더 이상 흠 있는 건 없으이.

“근데 도사님은 어떻게 떠다니는 거예요?”

이제야 온 집안을 둥둥 떠다니는 서책을 이상하다 느낀 도희였다.

‘혹시… 정기 찬 항아리라더니!’

“항아리 안에 계시면서 기운 되찾으신 거예요? 그럼 이제 도술도 혼자 부리시…….”

도사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하얀 눈썹이 축 쳐진다.

─그것이 문제일세. 극소량의 정기도 흡수되질 않네.

“엥? 도사님 지금 떠다니시는 건요?”

─내게 담기지 않을 뿐, 닿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차용하여 쓸 순 있네.

“안 닿아 있잖아요?”

서책은 지금 도희 눈앞에 둥둥 떠 있고, 항아리는 분명 거실 TV 옆에 있다.

─내 일부를 담아 뒀네.

“…예?”

‘도사님의 일부?’

─이 책자의 장지(壯紙)를 쌀 한 톨만큼 찢어 넣어 두었네. 한데 빌려 쓸 수 있는 기운이 영 시원찮아 더 넣어 둬야 할 듯싶으이.

공중에 떠 있던 서책이 반쯤 펼쳐지더니, 하얀 속지 부분이 드러났다.

“책 속지를 찢었다고요?!”

─좌측 아래 보이는가?

왼쪽 밑모서리에 정말 쌀 한 톨만큼 아주 작게 찢긴 부분이 보였다.

“아니, 막 찢고 그래도 되는 거예요? 도사님 혼이 담긴 책인데?”

─이 정도는 아무 문제없으이.

도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설령 잘못된다 한들 도희가 알 길은 없었다.

“그럼 저렇게 서책의 일부를 넣어 두면 어디서든 기운을 빌려 쓰실 수 있는 거예요?”

─…흐음… 그건…….

또 도사의 눈동자는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가만 보면 도사님도 도술만 잘 부리지…….’

은근 허당이었다.

─명일(明日) 확인해 보게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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