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도포에 갓까지 쓴 미남자
중요한 게 아니라니!
만일에 대비해 저 큰 항아리를 들고, 아니 봇짐에 싸서 다녀야 할 수도 있는데!
─신이나 벗고 어서 들어오게.
누가 자꾸 눈앞으로 날아오는 바람에 도희는 아직 현관이었다.
“뭘 이렇게 펼쳐 놓으셨대.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시려고요.”
떠다니는 서책에 시선을 빼앗겨, 어수선한 거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거실 바닥, 활짝 펼쳐진 보자기 위엔 작아진 물건들이 마구 널브러져 있었다.
─이 집에 자네 말고 대도(大盜)가 따로 있겠는가.
“지금 저보고 도둑…….”
─농일세. 농.
도희는 쭉 찢어진 눈으로 이리저리 떠다니는 서책을 쫓았다.
─내 보에 있는 것들을 확인도 할 겸.
보자기 위에 놓여 있던 손가락만 한 곰방대가 둥둥 떠오르더니, 본래의 크기로 변했다.
─자네의 궁금증도 해결해 줄 겸.
‘웬일. 요물에 손도 대지 말라던 양반이.’
─네게 필요한 것이 몇 개 있어 말해 줄 참이었거늘.
‘줄 것도 아니면서.’
─주려고 하였네.
“도사님, 소녀 무엇을 하면 되나이까. 하명만 하십시오.”
태세 전환이 빠른 도희였다.
“근데 또 혹시 저번처럼…….”
도희의 표정이 다시 급변했다.
도사가 요물을 준다면, 분명 두 손 두 발 들고 환영할 일인데 웬일인지 못마땅한 표정의 도희였다.
“피부 고와지는 옥가락지, 향기 나는 옥팔찌 같은 건 아니죠?”
그것들을 받고 처음엔 얼마나 기뻐했는지.
‘미용 가락지’라 길래 끼면 연예인이라도 되는 줄 알고 밤새도록 반질 나게 닦았었다.
막상 끼니까 얼굴에 광이 좀 더 나는 정도? 기름 같기도 하고.
며칠 끼고 다니다가 별 효과를 느끼지 못해 고이 모셔 둔 상태였다.
‘한마디로 아무짝에도 쓸모 없…….’
─뭐라? 이놈이!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이의 것인데!
고래고래 호통 치는 도사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쯔쯧, 주인을 잘못 만나도 한참 잘못 만난 게지.
도사는 마음 상했는지, 획 돌아서선 도희에게서 멀어졌다.
“또 무슨 말씀을 그리 섭하게! 아이고, 소녀의 피부가 본디 조금 곱다 보니 그 요물들은 필요가… 허나 다른 요물이라면!”
─쯧쯧, 대체 겸손과 겸양은 어디다 팔아먹었을꼬.
“필요하시다면 만들어 오겠나이다. 하명만 하십시오.”
도희의 저 온화한 미소 뒤에 똬리 틀고 있는 흙 구렁이는 도사만 알았다.
─진심인 것에 더 소름이 돋는구나.
“무슨 소름까지 돋아요! 또 말 섭섭하게 하시네.”
─옳지, 너답게 하거라. 너답게.
또다시 도희의 앙칼진 눈매가 서책을 쫓았다.
─흐음~ 뭐부터 설명해야 좋을꼬.
‘와, 딴청은.’
“저거 설명해 주시려고 띄운 거 아니에요?”
도희의 손이 여전히 공중에 떠 있는 곰방대를 가리켰다.
─옳지! 저 곰방대로 말할 것 같으면…….
* * *
콧김을 내뿜는 도희의 이가 악물었다.
─크흠…….
방금 전, 도사가 붓을 도희 머리에 닿게 했는데, 순간 도희는 지각이라며 급히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도사가 다시 붓으로 도희의 머리를 치자 다행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진짜 지각인 줄 알았잖아요!”
그 순간 느낀 긴박함은 여전히 심장을 콩콩 뛰게 하고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일세.
‘아오.’
틀린 말은 아니니 넘어가고.
“자, 그럼 정리해 보자면!”
면왕산에 잠들어 있던 요물의 수는 적지 않았다.
잠시 기억을 되짚은 도희는 붓부터 집어 들었다.
“이 붓은 기억을 조작 또는 착각하게 만들고.”
붓은 내려놓은 그녀는 옆에 놓인 곰방대를 가리켰다.
“이건 잠드는 연기를 내뿜는 곰방대고.”
불면증 환자들이 알면 환장할 물건이었다.
“어? 근데 담배를 못 피우면 어떡해요?”
─상관없네. 입에 물고 불면 자연히 연기가 나올 걸세.
용도는 물론, 사용법마저 색달랐다.
“말만 곰방대네요.”
곧이어 도희의 손이 큼직한 갈색 항아리를 가리켰다.
“저건 물 대신 정기가 들어찬 항아리.”
도희의 시선이 편안히 공중에 떠 있는 서책을 향한다.
“도사님은 저 항아리의 정기를 빌려 쓸 수 있다.”
‘하루 종일 날고 계신 걸 보면 빌려 쓸 수 있는 기운이 상당하다는 말인데.’
─이 서책 하나 띄우는 건 어렵지 않네. 정확한 양은 알 수 없지만, 거리와 비례하는 듯 허이.
“오케이. 정확한 건 나중에 확인하고.”
도희는 다시 보자기 위에 물건들을 훑었다.
“이거는 입으면 투명해지는 도포.”
옥빛을 띠는 도포의 옷감은 아주 고급져 보였다.
순간 도희의 머릿속에 이 도포에 갓까지 쓴 미남자가 그려진다.
‘헐. 미쳤어. 얘가 왜 떠올라!’
황급히 고개를 털어 생각을 떨쳐낸 그녀였다.
─여인이 연모하는 이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일세. 부끄러워 말게.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때, 도희의 눈에 갓이 들어왔다.
“갓은…….”
갓의 용도를 떠올린 도희의 안색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절대 사용할 일 없으니 없는 셈 치고.”
─세상이 네 뜻대로 되면 좋으련만.
“도사님 빨리 ‘퉤퉤퉤’ 하세요.”
─뭐, 뭘 해?
“도사님 때문에 재수 옴 붙어서 쓸 일 생길지도 모르니까 빨리 ‘퉤퉤퉤’ 하세요.”
도희의 등쌀에 못 이긴 도사는 침 뱉는 흉내를 내며 ‘퉤퉤퉤’를 외쳤다.
“근데 이건 뭐예요? 저번에 말씀 안 해주셨잖아요.”
도희가 계룡산에서 가져온 반달 모양의 나무 빗을 주워들었다.
─그… 그건…….
“뭔데요?”
─빗으면 머리가 길어지는 참빗일세.
“머리가 길어져요?”
그런 쓸모없는 걸 왜…….
‘혹시.’
“대머리가 빗으면 어떻게 돼요?”
‘아니지. 대머리는 빗을 수가 없네?’
─나오네. 봄의 새싹처럼.
도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 진짜요? 근데 도사님 대머리 아니잖아?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해보았네. 땡중에게.
“헐.”
‘와! 금덩이가 여기 있었네!’
“도사님 저 다 필요 없어요.”
‘전 세계 탈모인들이여!’
“전 이거 하나면 돼요.”
흥분한 도희가 빗을 꼭 쥔 채로 거실을 빙빙 돌았다.
‘탈모 병원을 차려? 아니지. 기술 설명이 안 되잖아… 어? 특허라고 하면… 하, 특허를 어떻게 내. 이것도 아닌데.’
그렇게 도희가 엄청난 발견을 한 거처럼 눈을 빛내고 있을 때였다.
─또, 또 저놈의 돈 욕심. 언젠가 그놈의 돈이 네 발목을 크게 잡을 게야.
“하, 우리 도사님 또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시네.”
─그래, 그럼 그걸 잠시 빌려주겠네. 이것은 도로 넣어 두지.
“뭘 넣어 둬요?”
도희의 눈앞으로 작은 물체가 튀어 올랐다.
“설마…….”
─맞네. 그것일세.
‘은가락지!!’
“도사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셨지요.”
빨리도 배우는 도희였다.
도희는 재빨리 은반지를 제 손에 꼈다.
“도사님 손이 작으셨네.”
반지는 마치 도희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내 것이 아닐세.
‘어쩐지. 옥반지, 옥팔찌도 이상하다 했어.’
“도사님 연인 꺼?”
‘어? 근데 도사도 결혼을…….’
─혼인을 할 순 있네.
‘도사님은 못 했단 말 같은데…….’
─크흠, 흠…….
“도사님 괜찮아요. 못 할 수도 있죠!”
‘맨날 산속에서 도 닦으신 듯 어떻게 여자를 만…….’
─…나도 연모하는 여인이 있었네.
도사의 목소리와 표정이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연 없는 사람 어디 있나요. 힘내요, 도사님.”
도사가 차인 거라 지레짐작하며 넘기는 도희였다.
─언젠가 네게 말할 날이 올 게다.
“눼에, 눼에. 암요.”
도사의 호통 소리가 들려올 줄 알았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삐지셨어요?”
─…되었다. 되었어. 내 너에게 화내서 무엇할꼬, 다 부질없는 것을.
“또, 또 인생 다 산 듯한 소리 하신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느냐. 다 살아보았지.
‘뭐, 그렇긴 하다만.’
“그래도 여기 이렇게 계시잖아요. 생각도 하실 수 있으시고, 바뀐 세상도 보시고.”
도희가 보기엔 살아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것이 어찌 산 자의 몰골이더냐. 이곳에 갇혀 벌을 받고 있는 게지.
‘멀쩡히 말까지 하시는데 딱히 죽었다고도…….’
도희가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며 혼란스러워질 무렵.
─내 죄업만 끝낸다면 미련 없이 떠날 걸세.
“무슨 죄업이요?”
─그자를 찾는 거 말일세.
‘아, 그 나쁜 도사님.’
도사는 ‘악의 도사’에 의해 서책에 갇혔다고 했다.
“그게 왜 도사님 죄업인가요. 나쁜 놈들이 한둘도 아니고.”
그리고 악한 자에게 당한 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도희였다.
피해자는 아무 죄가 없다.
─그자를 내 손으로 끝내지 못했지.
“복수하시고 싶으신 거예요?”
─그런 사사로운 이유가 아닐세. 그자는 이 세상에도 분명 큰 해가 될 게야.
“아이고, 세상사 도사님이 다 짊어지실 필요는 없어요. 도사님 없어도 세상 잘만 돌아……”
아니, 이게 아니지.
“여튼! 도사님이 아니더라도 그 나쁜 도사가 죄를 지으면 벌 줄 사람 많아요.”
─그자를?
“네! 이미 감옥 가 있을 수도 있어요.”
─나를 이곳에 가둔 그자를?
“아…….”
일반적인 악한 놈들은 잡아서 경찰에 넘기면 끝이지만.
“그 나쁜 놈이 환생했더라도 도술을 쓸 줄 알까요?”
─어찌 알겠나. 환생을 한 것인지, 아직 죽지 않은 것인지.
‘아직 죽지 않았다라… 그게 가능… 할 수도 있겠네.’
공중에 떠 있는 말하는 서책과 거실 바닥에 놓여 있는 작아진 요물과 고가구들.
이것이 현실이라면.
그 어떤 상황도 불가능이란 없었다.
─사서 걱정 말게나.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이.
“도사님이 말씀하신 악은 언제 쫓죠?”
─지금처럼만 하면 되네. 언젠간 그 자에게 닿을 걸세.
“언젠가……?”
─크흠, 그래. 일단 일 년이라 하게나.
“일단?”
─거참, 너는 어째 어느 하나 쉬이 넘어가는 것이 없구나.
“눈 뜨고 코 베이는 세상인데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죠!”
─세상 참 좋아진 줄 알 거라.
“일 년만 도와달라고 하셨잖아요!”
‘어디 어물쩍 넘어가시려고!’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옳다. 옳아.
‘계약서라도 써야 하나.’
─이놈이!
“아니이, 그냥 생각만 해 본 거예요. 생각만.”
막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근데 도사님 1년 안에 ‘악의 도사’ 못 찾으면 어떡해요?”
─그건 그때 가서 다시 고민해 봄세.
음흉한 눈빛을 한 도희의 시선이 손가락에 껴진 은반지를 향했다.
‘그럼 새 거래 조건을… 흐흐.’
─요물들은 모두 없앤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보물, 아니 이렇게 대단한 것들을 없앤다고요?”
─난 두말하지 않네.
“도사님 하나만…….”
도희가 조심스럽게 검지 하나를 내보였다.
─쯔쯧.
“하나만…….”
도사는 짧게 혀를 차더니 정기 찬 항아리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