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그의 핏빛 입술은 자꾸만 시선을 빼앗았다.
‘이건 좀 이상한데.’
[경영지원 2팀]
사내 구경 후 도하가 언급했던 팀이다.
바쁜 1팀에 반해, 일하는 직원이 한 명도 없었다는 그 팀.
그땐 웃어넘겼지만, 신입보다 못한 소하를 보니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든 도희였다.
‘지원팀에서 2년 동안 뭐하다 온 거야?’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대는 통에 옆자리에 앉은 두산은 제 업무도 못 보고 소하에게 붙어 대신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턴도 저 정도는 아닌데.’
모니터에 띄어진 소하의 인사 파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도희는 다가오는 인기척에 급히 문서를 닫았다.
고갤 돌리니, 오늘따라 수려한 외모는 뽐내는 도하가 서 있었다.
‘입술에 뭘 바르나? 색이 예쁘네.’
그의 핏빛 입술은 자꾸만 시선을 빼앗았다.
“팀장님 내일 바로 신문고 게시판 신설 가능하다고 합니다.”
“미팅이 벌써 끝났나요?”
‘미팅 간다고 한 게 30분 전 같은데.’
“예. 그대로 진행하면 별문제 없을 거 같답니다.”
업무 협조 요청 메일부터 실진행까지 이례적인 속도였다.
“운영팀이 예상보다 적극적이네요. 도하씨, 고생하셨어요.”
“팀장님 저녁 약속 있으십니까?”
‘갑자기?’
당황한 낯빛의 도희가 대답을 주저했다.
이내 도하 뒤로 빼꼼 고개 내민 진명과 눈이 마주쳤다.
‘확실히 해야지.’
팀장 부임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더 이상 남자들과의 염문설을 허용할 순 없었다.
‘헛소문은 만나본 적도 없는 사장 하나만으로 족하다고!’
“헬스장 갑니다.”
괜히 바쁜 척 서류를 넘기며 대답하는 도희였다.
뭐, 도사님과의 약속 때문에 운동을 가긴 가야 했으니 거짓은 아니었다.
“저녁은 안 드시나요?”
“네. 다이어트합니다.”
이것 거짓이었지만.
의도치 않게 그녀의 입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딱 잘라 말했나.’
혹여 상처받았을까 슬쩍 그의 표정을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그였다.
“운영팀 회식인데 꼭 좀 와달라기에… 죄송하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회식…….”
도희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린 건, 예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일까.
당혹감은 서서히 이유 모를 아쉬움으로 바뀌어 갔다.
“오늘 운영팀 회식이에요? 팀장니임! 저희는 언제 회식하나요?”
낭랑한 소하의 목소리에 모두의 행동이 멈춰졌다.
‘회식 싫은데…….’
부서 이동도 했고, 다들 아직 서먹한 터라 꼼짝없이 회식 한 번은 해야 했다.
“조만간 다 같이 날짜 맞춰 봐요.”
‘바쁜 일 좀 끝내놓고.’
“내일 어때요, 내일!”
“전 다 좋습니다.”
두산의 대답을 들은 소하는 내친김에 벌떡 일어나더니, 도희와 도하에게 성큼 다가왔다.
“팀장님 내일 어떠세요? 도하 대리님은요?”
“저도 내일 괜찮습니다.”
“진명 대리님 내일 어때요?”
‘이 친구 놀 땐 또 똑 부러지네.’
“저도 좋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아직 대답하지 않은 한 사람에게 모아졌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서류를 집은 도희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풀어진다.
“내일 저도 좋아요.”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도희의 고개가 결국 끄덕여졌다.
“그럼 장소 물색은 제가 할게요!”
한껏 들뜬 모습의 소하는 방긋 미소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대화가 일단락되고, 다들 업무에 집중하려는데…….
“아! 도하 대리님, 오늘 운영팀 회식 혼자 가시기 불편하시면 같이 가 드릴까요?”
소하는 마치 방금 생각났다는 투로 말했지만, 다른 이들에겐 마냥 어색한 연기로만 보였다.
“괜찮습니다.”
“에이, 부담 갖지 마세요. 제가 같이…….”
“이미 참석 못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느새 도하 모니터에 메신저 창이 띄워져 있었다.
가슴에 올려져 있던 소하의 손이 힘없이 턱 하고 떨어졌다.
“허얼. 대리님 실망이에요.”
입이 삐죽 나온 소하가 도하를 쏘아본다.
‘…뭐지?’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눈길도 주지 않고 제 할 일하는 도하였다.
소하가 도하를 한참이나 쏘아보았지만, 도하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도하 대리님, 지금 무시하시는 거예요?”
그의 동작이 멈추고, 그의 고개가 천천히 소하로 돌아갔다.
“무시한 적 없습니다.”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날 선 칼날 위를 걷는 사람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보고 싶지 않지만, 불안해 볼 수밖에 없는.
아무도 선뜻 나서 입을 열지 못했다.
분위기가 절정에 치닫기 전, 도희가 그만 상황을 정리하려 나서려는데.
“치이…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하지.”
“예. 싫습니다.”
소하의 눈에 서러움이 한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렁그렁한 눈방울의 소하가 제 자리에 주저앉는다.
벙찐 표정의 팀원들은 소하와 도하를 번갈아 볼뿐이다.
‘분위기 왜 이래.’
일하는 척, 들리는 대화들을 애써 외면하려 했던 도희가 고갤 들었다.
두산은 쭈뼛대며 뒷머리를 긁적이고, 진명은 힐끔힐끔 소하를 쳐다보고 있다.
도하는 무심한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릴 뿐이었다.
“커흠! 소하씨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보다 못한 두산이 나섰다.
‘얜 또 뭐 이렇게 착해.’
그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담당자인 도하 대리님도 없는데, 타 부서 회식에 저희 둘만 가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아… 넵.”
장시간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곧 사무실엔 키보드 타닥이는 소리만 가득 찼다.
소하는 여전히 풀 죽은 토끼마냥 축 처진 어깨로 늘어져 앉아 있었다.
‘사람 불편하게 저게 뭐 하는 짓이야.’
아까부터 한마디 하고 싶던 도희는 제 얼굴을 감싸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참아야 해, 참자, 강도희 참아!’
“후…….”
‘아니, 쟤는 일도 안 해?’
불만 가득 찬 도희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오, 팀장이고 뭐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네!’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행동하던 대리 시절과는 상황이 달랐다.
‘팀장이 아니라 족쇄네, 족쇄야.’
그녀의 직함이 무겁게 와 닿았다.
영 불편해진 사무실 공기에 도희의 시선이 여전히 책상에 널브러진 소하에게 향했다.
‘지금 삐진 척하는 거야? 뭐 하자는 거야.’
연신 한숨만 푹푹 내쉬는 소하를 보니 도희 속이 더 끓어올랐다.
‘어차피 분위기 개판 난 거 확 질러?’
도희가 팀 분위기고 뭐고, 입이 삐뚤어져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냅다 입을 떼려는 순간!
지이이잉─
지이잉─
책상에 올려져 있던 도희의 휴대 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네, 전 상무님.”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 * *
사장의 비서로 보이는 여자는 친절했다.
누구의 비서와 다르게.
‘저번에 못 본 거 같은데.’
그녀는 잠시 기다리란 말과 함께 커피와 쿠키를 내왔다.
덕분에 응접실 안은 고소한 커피 향이 진동했다.
홀로 남게 된 도희는 전 상무와의 전화를 떠올렸다.
─팀장님 시간 괜찮으세요? 아주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 상무의 목소리가 유난히 기운 없었던 걸 보면,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닌 듯했다.
‘긴히 할 말이라…….’
복잡한 심경의 도희는 시선을 창밖 멀리 던졌다.
‘날씨 드럽게 좋네.’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살에 도희의 눈이 살며시 감긴다.
소파는 폭신하지, 배는 부르지.
낮잠 자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이곳이 사장실만 아니었다면.
똑똑.
노크 소리에 널따란 소파에 옆으로 슬며시 누우려던 도희의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전 상무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어두웠다.
“무슨 일 있나요?”
“네, 아주 심각한 일이요.”
가까이 다가온 전 상무는 우물쭈물하더니,
“팀장님, 혹시 남자친구 있으신가요? 아니, 없어도 있는 걸로 합시다. 아… 사장님이라면 별로 신경 안 쓰실 수도… 그럼 이렇…….”
“그게 내 얘긴 아니겠지, 전 상무.”
어느새, 밝은 남색 수트를 입은 깔끔한 인상의 사내가 출입문 앞에 서 있다.
“…빨리 오셨네요.”
“차가 안 막혀서.”
무혁은 긴 다리를 자랑하듯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노크라도 하시지.”
“내 사무실인데?”
어느덧 접객용 소파 앞에 다다른 무혁.
“거기 내 자린데.”
무혁이 도희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뭐지?’
그의 뒤에는 버젓이 상석으로 보이는 널찍하고 고급진 1인용 소파가 있었다.
그리고 양쪽으로 똑같이 생긴 널따란 소파에 내 자리, 네 자리를 구분하기란 어려웠다.
고갤 든 도희와 무혁의 눈이 마주쳤다.
“강 팀장님께.”
무혁이 나직이 웃는다.
“양보하겠습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상석에 앉은 무혁.
그 모습을 본 도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자리에 앉으실 줄 알고.”
오른손으로 앉은 자리 옆을 ‘톡톡’ 두드린 도희.
“여기 앉은 건데.”
미소 띤 도희와 무혁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실례일까요?”
무혁을 따라 하듯 천천히 끊어 말한 그녀였다.
그러자, 무혁의 입에서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웃어……?’
도희의 눈이 어색한 곡선을 만들며 전 상무에게 향했다.
그 행동은 마치 ‘뭐가 웃긴 거죠?’라고 묻는 듯했다.
전 상무는 고개를 저었는데, 아마 자기도 모른다는 뜻 같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 모습을 무혁은 놓치지 않았다.
“두 분 아주 친해지셨나 봐요.”
눈짓을 주고받던 도희와 전 상무의 시선이 다시 무혁에게 모아졌다.
그때, 비서가 커피를 내오면서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사장은 부사장과 은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묘하게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달까.
“질투 나네요. 벌써 전 상무랑 가까워졌다니. 나는 몇 년이나 걸렸는데… 그치, 전 상무?”
전 상무는 ‘또 시작이네.’하는 표정으로 제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제 남자친구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릴 하시네요.”
오바스럽게 말한 도희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커피잔을 들었다.
“없던데.”
“네?”
“남자친구.”
무혁의 말에 표정 관리를 못 한 도희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본 무혁은 다시 크게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