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45)화 (45/120)

044화 썸남 있어요. 곧 뜨거워질, 그런, 뭐, 다 아시죠?

“있어요!”

발끈한 말투였다.

“남자친구…….”

입가에 커피잔을 기울이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썸남 있어요. 곧 뜨거워질, 그런, 뭐, 다 아시죠?”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열심히 변명하는 도희였다.

그러자 문뜩 그녀의 머릿속엔 도하와 우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쳤어, 강도희!’

도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홍조 띤 도희를 보며 무혁은 다시 크게 웃어 보였다.

“아, 나 왜 덥지. 저만 더운가요?”

손으로 부채질하는 도희의 머리카락은 에어컨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런 도희를 보는 무혁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고, 전 상무는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아오, 젠장.’

“전 상무님, 하실 말씀은…….”

분위기 전환만을 위해 꺼낸 말은 아니었다.

뭐, 사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도와달란 도희의 눈빛에 전 상무가 나섰다.

“굿 뉴스, 베드 뉴스. 뭐부터 들으실래요?”

“당연히.”

고민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나쁜 거부터.”

도희를 바라보는 무혁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박현일이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뭐?!’

몰카범이 보석으로 풀려나 재판 전까지 거리를 활보한단 말이었다.

“진짜 벳 뉴스네요.”

재판 전까지 또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었다.

“저희가 손 쓴 겁니다.”

“예?”

도희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김 변말로는, 아, 김 변은 박현일 사건 맡은 우리 회사 변호사입니다.”

“그 자식 사건을 왜 회사 변호사가 맡죠?”

“재직 중인 사원은 본인이 원하면 회사 변호사 자문이 가능합니다. 뭐, 이 경우는 한 부장이 데려간 거지만요.”

“한 부장도 껴 있나요.”

‘이걸 의리남이라고 해줘야 해?’

“김 변말로는 박현일이 한 부장 협박하고 있다는데, 아마 회사 일인 거 같습니다.”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박현일이 한 부장 협박했고, 한 부장은 회사 김 변호사 데려다가 보석으로 풀려나게 했다?”

“한 부장은 아직 모르지만 김 변은 저희 사람입니다. 제가 김 변에게 보석 진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왜요?”

“박현일을 만나 회유할 생각입니다.”

“한 부장 뭘로 협박하는지 물어보실려구요?”

그놈이 잘도 말해 주겠다.

“예. 박현일 보석금에 모든 변호사 비용까지 한 부장이 부담한답니다. 한 부장에게 나온 돈은 아닐 거 같아서요.”

“누가 더 엮어 있다는 말씀 같네요. 예를 들어 부사장이라든가…….”

“뭐, 아시다시피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은 없는 상황이라.”

“박현일이 순순히 털어 놓을까요? 자기가 쥔 패를 쉽게 버리진 않을 텐데.”

그리고 협박받을 짓이라면 불법적인 일일 테고, 한 부장 혼자 처리했을 가능성은 적으니 박현일 본인도 엮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야겠죠?”

“설마…….”

“무죄 받아 주는 조건입니다.”

“와… 정치란 이런 세계구나.”

소파에 등을 기댄 도희는 천천히 다릴 꼬며 팔짱을 꼈다.

“무죄라…….”

그러더니 한참 동안 테이블을 내려다본다.

무혁은 대놓고 도희를 살피고, 그녀의 심각한 표정에 전 상무는 뒷말을 더 잇지 않았다.

“좋아요. 일단 다음 뉴스 좀 들어보죠.”

전 상무는 침을 꼴깍 삼키며 괜히 뜸을 들였다.

“만약 한 부장 엮어서 내보내게 된다면, 강 팀장에게 초고속.”

그는 강조하듯 한 박자 쉬어서 말했다.

“부장 승진 약속드리겠습니다.”

“왜요?”

“그야, 강 팀장이랑 오래 일하고 싶으니까?”

“네가 잡은 변태 무죄 줄 거니까 속상해하지 말고 부장 자리나 받아라. 이런 건 아니겠죠?”

“그런 보상이라기엔 좀 과하죠.”

“저에게 부장 자리가 과한 건 아시네요.”

도희의 말에 무혁과 전 상무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도희는 덤덤한 얼굴로 침묵을 유지했다.

“안 좋아하시네요?”

도희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요. 별로 기쁘지 않네요.”

그들의 얼굴엔 의아함이 서려 있다.

“제가 막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진 않은데.”

도희는 흘러내린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또 그렇게 정의로운 사람도 아닌데.”

‘도사님이 알면 노발대발하시겠지.’

“제 임시 양심이 허락할 수 없다네요.”

오늘 혼자인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도사가 잠시 흔들린 도희의 속내를 들었다면 잔소리가 하루로는 안 끝날 터.

“도희씨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럼 이렇게 하죠.”

그들의 시선이 다시 도희에게 모였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협박이 먹혔다는 건 증거가 있는 거 아닐까요. 단순 말만으로 협박이 먹히진 않을 테니까.”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박현일을 만나 회유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뭐든 제가 찾아낼게요.”

증거가 없다 해도 협박 내용만 알아낸다면 그들의 악행을 꼬리 잡을 순 있을 거다.

“도희씨가요?”

불신의 말투였다.

“아, 도희씨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혼자는 힘드실 겁니다.”

도희는 전 상무를 곧게 응시했다.

“한번 믿어 보시죠.”

“혼자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그건 제 영업비밀이니 결과로 봐주시죠.”

전 상무가 무혁을 쳐다보자, 무혁이 고개를 끄떡였다.

“예. 그럼 결과 보고 부장 승진 약속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부장 승진은 사양하겠습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전 상무는 입을 벌린 채 눈은 빠르게 꿈뻑였다.

“다른 조건이 있어요.”

급히 정신을 되찾은 전 상무는 무혁에게 눈짓하며 대답을 넘겼다.

그룹 내 최연소 부장 승진을 거절하고 내건 조건이 무엇일지 상상도 가지 않는 그였다.

“연봉 인상, 즉각 반영.”

무혁의 눈에 서렸던 놀란 기색이 빠르게 사라졌다.

금세 미소로 무장한 무혁이 입을 열었다.

“역시, 강 팀장은 화끈해서 좋네요.”

‘이 양반 또 무슨 소릴 하려고.’ 하는 표정의 전 상무가 무혁을 쏘아본다.

사고치는 제 자식 단속하는 엄마 같았다.

“푸훕.”

갑작스런 웃음에 둘의 시선을 받은 도희가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해요.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셔서.”

“예?”

“큰일 날 소리.”

전 상무는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이었다.

“전 상무.”

무혁이 덤덤하게 전 상무를 불렀다.

“예, 사장님.”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난 좋은데.”

“예? 강 팀장 오해합니다.”

“오해할 게 뭐 있나, 우리 사이를.”

도희가 끼어들었다.

“근데 두 분 진짜 무슨 사이세요?”

사장과 전 상무를 같이 만난 적이 없던 도희는 둘이 그저 협력의 관계인 줄로만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 둘은 평범한 사내이사와 사장 사이로 보이진 않았다.

“아주 은밀한 사이?”

“비서입니다.”

무혁과 전 상무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예?”

야릇한 무혁의 음성에 전 상무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원래 제가 이무혁 사장님 비서입니다.”

“아…….”

슬며시 고갤 끄덕이는 도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지금도 뭐 말만 전 상무지, 전 비서나 다름없습니다.”

“김 비서는 밖에 있는 걸?”

“그럼 제가 맡고 있는 거 전부 김 비서에게 인계할까요?”

“또 무슨 말을 그리 섭하게.”

일반 비서와 사장의 사이보다도 더 가까워 보이는 둘이었다.

둘도 없는 친구랄까.

“근데… 그럼 전 상무님 월급 두 배로 받으시나요?”

“예?”

“푸하하하.”

도희의 말에 무혁이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전 상무도 따라 웃기 시작한다.

“아니이… 두 배로 일하시니까.”

도희는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전 상무, 강 팀장이 자네 자리 노리는 거 같은데?”

“하,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군요.”

장난스레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전 상무였다.

“아니에요. 전 정말 관심 없습니다.”

“관심 없단 말은 좀 섭한데.”

“사장님은 섭섭한 것도 참 많으시네요.”

“강 팀장 돈 필요해요?”

“돈 없이 사는 사람 있나요.”

“얼마나 필요해요?”

“주실 거예요?”

“남는 게 돈이라.”

“헐.”

살면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돈이 얼마나 있으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다릴 꼬아 앉은 고고한 무혁의 자태가 돈이 없어 보이진 않았다.

아무렴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대기업인 화정기획 사장인데 돈이야 많겠지.

“공짜 돈은 안 받습니다. 머리 까져요.”

“그런 미신 안 믿을 거 같은데.”

“그럼 이유 없는 돈은 안 받는다고 하죠.”

“왜죠?”

“어떤 대가가 따를지 모르니까?”

“아무 대가 없다면요?”

“그럴 리가.”

도희의 눈은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며 싱그러운 미소를 그려냈다.

세상엔 대가 없는 보상은 없다고 말하듯이.

그건 당신도 잘 알지 않냐고 묻는 듯이.

“하긴.”

무혁은 꼰 다리를 풀며 도희에게 바짝 다가왔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그의 시선이 도희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바라는 게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도희는 무혁의 시선과 말을 아랑곳 않고 커피 한 모금을 삼킨다.

황망한 눈빛의 전 상무는 제 얼굴을 쓸었다.

‘비상이다.’

무혁의 저 눈은 딱 그 눈빛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했을 때의 그 눈.’

*     *     *

도희가 사무실로 내려가고, 응접실엔 무혁과 전 상무 둘만 남아있다.

“전 상무.”

“예. 사장님.”

“나 지금 까인 거지?”

“예.”

서류를 훑는 전 상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정말 다이어트하는 건 아닐까?”

“요즘 몸 사리시더니 감 다 잃으셨나 봅니다.”

“보통 데이트 거절할 때 선약이 있다거나, 볼일이 있다거나 하지. 순간적인 핑계치고 다이어트는 너무 구체적이잖아?”

“잘 안 까이셔서 모르시나 본데, 다이어트만큼 좋은 핑계가 어디 있습니까.”

무혁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다른 약속 있다는 핑계는 매일 댈 수 없지만, 다이어트는 언제나 한 마디면 됩니다.”

“전 상무는 좋겠어. 많이 까여 봐서 그런 것도 알고.”

“예. 누구 때문에 너무 바빠서요.”

잦은 출장으로 약속 펑크내기 일쑤였다.

그 후 휴가를 받아도 여자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를 피했다.

“하…….”

‘그게 왜 나 때문이냐, 일벌레인 네 탓이지!’라며 반박 멘트가 날아올 줄 알았건만.

힘없이 풀썩 소파에 드러눕는 무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준나 멋있어.”

순간 전 상무는 구겨진 표정으로 무혁을 흘겼다.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왜.”

“…동안 외모에 감사하십시오. 젊은 여성분들 만날 땐 되도록 말씀은 삼가시고.”

“그런 넌 뭐라 말할 건데?”

“뭐를요?”

“아까 강 팀장.”

“음…….”

무혁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전 상무를 바라본다.

“…개쩐다?”

응접실에 더없이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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