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46)화 (46/120)

045화 나 네 비밀 하나 아는데.

사장과 부사장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이었다.

겉으로 체격 좋은 건 비슷했지만, 부사장의 인상은 한없이 날카로웠던 것에 반해, 사장은 누구나 호감 가질 만한 사람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둘 다 몇 마디 나눠 보면 만만치 않은 내공의 사람임이 드러나고,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건 똑같았다.

‘특히 조사하듯 빤히 살펴보는 그 눈빛.’

그들의 눈빛을 떠올린 도희는 작게 몸서리쳤다.

탐색 당하는 느낌이란 썩 좋진 않았다.

부사장은 힘을 감춘 야비한 하이에나 느낌이라면, 사장은 겁 없는 검은 재규어 느낌이랄까.

‘일단 문제는 부사장 쪽인데.’

부사장과는 이미 척을 진 상태라 곧 공격이 들어오는 건 예상된 수순이었다.

‘사장한테도 이 드러내는 양반인데 일개 팀장인 나한텐 오죽하겠어.’

문제는 사장 이무혁도 묘하게 믿음은 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물불 안 가릴 타입 같달까.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모였기에 결국 각자의 이득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내 살길은 내가 챙겨야겠네.’

두 마리의 육식동물 사이에서 도희의 포지션은 초식동물에 가까웠다.

‘한 부장도 문제야.’

감사부 한 부장과 부사장이 비리로 끈끈히 묶인 사이라면 한 부장도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아휴, 모르겠다. 일부터 하자.’

이런저런 생각 끝에 사무실에 다다른 도희를 맞이한 건 어수선한 분위기의 사무실이었다.

“팀장님 오셨어요.”

시작은 도하의 환한 미소였다.

“팀장님, 아까 말씀하신 거 수정해서 메일 보내드렸습니다.”

“휴게실 갈 건데 팀장님 커피 드실래요?”

도하에 이어 진명과 두산이 차례로 말을 이었다.

“메일은 지금 확인할게요. 커피는 괜찮습니다.”

대답하며 자리로 걸어가는 도희의 시야에 이상하리 깨끗한 소하의 책상이 들어왔다.

‘어째 느낌이…….’

“소하씨는요?”

“아, 그게…….”

진명이 머뭇거리자, 도희는 눈빛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퇴근한다고…….”

대답한 본인도 떨떠름한지 진명의 입가엔 어색한 미소가 걸려 있다.

“예?”

도희의 시선이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향한다.

오후 3시 30분.

퇴근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도희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소하의 조퇴 결재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하… 너무 제멋대로네.’

도희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눈을 감은 그녀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올라오는 울화를 억눌렀다.

‘확 그냥 성질대로 해? 당장 전화로 불러?!’

배려심 넓은 상사가 되려 했던 그녀였다.

이미 오늘 소하의 행동은 도희가 모르는 척 눈감고 넘어갈 선은 지나쳤다.

‘요즘 내가 착해 보였나 본데…….’

다른 세상을 알게 된 순간부터 좀 더 착하게 살자 마음먹은 것도 사실이다.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아진 것도 사실이고.

전 부서에서는 마 부장에게 대응하느라 이 구역의 미친X을 자처했던 도희였다.

‘살던 대로 살아야지. 괜한 착한 척하다가 화병 걸리겠네.’

당장 부르지 않는 것만 해도 도희는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그래. 오늘은 기분 풀고 놀게 두고, 내일 끝장을 보자.’

역시,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은 틀리지 않았다.

미친 사람도 더 미친 사람 앞에서는 몸을 사리는 법.

이젠 도희가 보여 줄 차례였다.

소하 덕분에(?) 도희의 충만한 똘끼가 다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     *     *

“후… 하… 으… 후… 으…….”

도하의 꽉 물린 이 사이로 일정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마를 타고 내려온 땀 한 방울은 그의 반듯한 일자 쇄골까지 흘러내렸다.

‘엄청 하얗네.’

목까지 꽉 채운 단정한 와이셔츠 차림만 봤기 때문인지, 헬스복에 살짝 드러난 도하의 속살이 어색한 도희였다.

“회원님 원래 헬스 하시던 분이죠?”

“아, 예. 조금 했습니다.”

“어쩐지! 딱 보기 좋습니다. 유지만 하셔도 좋을 거 같네요.”

트레이너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한 근육질의 도하였다.

“예.”

물을 벌컥벌컥 마신 도하는 다시 근력운동을 시작했다.

“후… 하… 으…….”

‘아오, 신경 쓰여.’

도희가 뛰고 있는 러닝머신 앞은 유리였는데, 유리에 반사되어 운동하는 도하의 모습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보지 말자, 신경 끄라고 강도희!’

퇴근할 때가 되자, 도하는 자신도 새 헬스장을 등록해야 한다며 도희를 따라왔다.

집도 5분 거리라며 같이 가자는 그를 다른 곳으로 가라고 등 떠밀 수도 없었다.

운동하는 내내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도희는 운동을 한 건지, 만 건지 정신만 혼미했다.

샤워 후 머리까지 말리고 나오는데 헬스장 입구에 도하가 서 있었다.

“아직 안 가셨어요?”

“기다렸습니다.”

‘아오, 쌩얼이라 일부러 늦게 나왔는데!’

“집 앞 골목이 많이 어둡던데 집 앞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저희 집 와보셨어요?”

“아, 그 실종 때… 혹시 기분 나쁘시면…….”

“아니, 아니에요. 기분 안 나빠요.”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

언제나 혼자였으니까.

근데 아니었다.

강아는 그렇다 쳐도, 도하는 의외긴 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내가 사라졌을 때 날 애타게 찾은 이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근데 도하씨 저녁은 안 드세요?”

“예. 배가 안 고프네요.”

도희는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이제 와서 다이어트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고.’

도희는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는 도하를 겨우겨우 떼어 놓고 편의점에 들렸다.

죽어도 안 갈 것 같더니, 자꾸 그러면 부담스럽단 한마디에 발걸음을 획 돌린 도하였다.

‘풉. 좀 귀엽네.’

그렇게 미소 띤 도희는 검은 봉지를 휘저으며 사뿐한 걸음으로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섰다.

고요함이 내린 어둑한 골목.

바닥엔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져 있었다.

“보고 싶었어, 강도희.”

“헐.”

박현일의 비틀린 미소를 본 도희 얼굴엔 싸늘함이 깃들었다.

‘으, 소름 끼쳐.’

그의 행적을 알기 때문인지, 말투, 표정, 행동까지 모두 변태같이 느껴졌다.

“멘트 너무 진부한 거 아니야?”

“뭐?”

“복수하러 온 구시대 악당 대사 같잖아.”

“우리가 친했나? 왜 말 놓지?”

“네가 먼저 놨잖아?”

“안 무서운가 봐?”

“누구, 너?”

도희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나도 안 무서운데.”

박현일의 얼굴엔 같잖다는 무시의 미소가 떠올랐다.

“너 따위.”

“푸하하하.”

골목 가득 박현일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강도희, 너도 참 제정신은 아니야.”

“네가 할 말은 아니야.”

“에이, 겁먹은 척이라도 해주지.”

느릿한 동작의 박현일이 도희 곁으로 다가왔다.

“난 그런 게 더 좋던데.”

‘이 미친 변태 자식, 으!’

주먹 쥔 도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무서워서?

아니, 너무 화가 나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도희가 고갤 들었다.

3층 도희네 집 베란다에 둥 둥 떠 있는 서책이 보인다.

‘도사니이임!’

거리 때문인지, 도사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도사님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단 말이니 크게 위험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미 보험도 들고 있었고.

“이거 보이지?”

도희는 손을 들어 ‘통화 중’으로 떠 있는 화면의 휴대전화를 내보였다.

“남자친구가 집 근처에 살아. 아마 지금 경찰에 신고하고 여기로 뛰어오고 있을걸?”

“난 진짜 이야기하러 온 건데.”

“무슨 이야기?”

“전화는 끊지? 단둘이 할 말인데.”

“상관없어. 말해.”

“상관없지 않을 텐데.”

박현일의 얼굴이 한 뼘만큼 가까워졌다.

흠칫하는 도희의 귓가에 들리는 한 마디.

“나 네 비밀 하나 아는데.”

비열하게 뒤틀린 박현일의 미소에 도희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뭘 아는지 안 궁금해?”

애써 표정 관리를 한 도희가 대답했다.

“안 궁금한데?”

“뭐?”

“네가 뭘 알든 상관없다고.”

옅게 흔들리는 도희의 시선이 저 멀리 떠 있는 양피지 서책에게 닿았다.

‘설마… 아니겠지? 이걸 어떻게 알아?’

이 악물고 센 척하는 도희였지만 가슴 한 편 묘한 불안감은 이미 싹트고 있었다.

“네 남자친구가 들어도 되려나?”

“뭐르을!”

도희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박현일과 도희는 단 두 걸음의 거리였다.

“너랑 사장과의 관계 같은 거?”

“뭐어?”

“뭐, 지금까지 여자라는 걸 이용해 인생 쉽게 살았나 본데.”

더 가까이 다가오는 박현일을 피해 한 걸음 물러선 도희였다.

“난 그거 말고 다른 걸 원하는데.”

그의 기분 나쁜 콧김이 도희의 얼굴에 닿았다.

“개소리할 거면 그냥 꺼져.”

“에이, 모르는 척한다고 될 일인가, 이게.”

“풉. 나랑 사장이 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진 도희였다.

“역시 당당하네? 얼굴 참 두꺼워.”

도희의 손바닥이 박현일 어깨에 닿자 그가 밀려났다.

“네 얼굴이나 치워. 역겨우니까.”

“거친 여잔 싫은데.”

“응. 난 그냥 네가 싫으니까 꺼져.”

박현일의 시선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도도히 말하는 도희의 얼굴에 꽂혔다.

“예쁘긴 해. 성질이 개 같아서 문제지.”

“그래서 내 성질 긁으러 온 거야?”

“뭐, 사장이랑 너랑 어떻게 붙어먹던 그건 나랑 상관없고.”

‘아오, 괜히 쫄았네.’

사장과의 헛소문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니라고 해도 믿을 놈들은 믿을 테니까.

‘근데 얜 이게 뭔 비밀이라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진상 다 부렸으면 이제 그만 가 줄래?”

“시작도 안 했는데?”

“다시 감옥 갈래?”

“혼자는 못 가지.”

“그건 네 맘대로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뭘 더 아는지 알면 말이 달라질 텐데?”

“네가 뭘 알든 상관없다니까?”

“부사장이 너한테 백 실장 붙인 건 알지?”

‘박현일이 백 실장을 알아?’

박현일은 도희의 생각보다 부사장과 가까운 인물이었다.

“백 실장이 널 따라다니면서 뭘 좀 봤다는데.”

“뭐?”

“이제 좀 궁금해?”

도희의 표정이 굳자, 박현일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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