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분신술이라도 가르쳐주시던가!
“미쳤어요?”
“형사가 증인 보호하는 건데 미쳤다니요. 섭섭합니다.”
‘증인 보호는 얼어 죽을.’
능글맞게 웃는 우주가 얄미운 도희였다.
“틈만 나면 끼 부리시네요.”
“에이, 시작도 안 했는데.”
“시작은 하신 거 같은데.”
“티 나요? 저 도희씨한테 관심 있는 거.”
“티 안 나요? 저 벽치고 있는 거.”
“왜요? 제가 도희씨 스타일이 아닌가.”
우주는 그럴 리 없다는 단호한 눈빛으로 매력적인 눈웃음을 선보였다.
‘아니, 뭐. 내 스타일이긴 한데.’
“지금 주춤하는 거 다 봤어요, 나.”
장난스러운 우주의 두 손가락은 자신의 두 눈과 도희와 눈을 번갈아 가리켰다.
“오늘 감사했어요.”
“이거 빨리 가란 말이죠?”
“눈치는 빠르시네요.”
“도희씨는 없는 척하시는 거 같은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하는 도희의 얼굴 옆으로 우주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근처에서 잠복 중이니 무슨 일 생기시면 꼭 저한테 전화하세요.”
‘잠복?’
“아까 허우대만 멀쩡한 남자 말고 형사인 저한테 전화하셔야 합니다.”
‘경계하네. 풉, 수컷의 본능 뭐 그런 건가.’
“아무 일 없이 전화하시면 더 좋고.”
“근데 무슨 일이에요? 잠복이라니.”
도하랑 같이 나타난 것도 이상했다.
“아, 그게…….”
한층 가라앉은 눈빛의 우주는 자초지종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친놈이네요.”
이야길 다 들은 도희가 중얼거렸다.
“욕도 할 줄 아세요?”
“저 욕 잘해요.”
퉁명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는 도희였다.
“듣고 싶네요.”
“욕을요?”
“뭐든요.”
도희를 따라 하듯 어깨를 으쓱하는 우주의 얼굴에 한가득 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근데 그 사건이랑 도하씨랑 무슨 관계예요?”
“지금 그 남자 걱정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오… 변명을 하시네요.”
“제 팀원입니다. 전 이도하씨 부서 팀장이구요.”
“승진하셨네요?”
“뉴스까지 났는데 모르셨구나.”
회사의 의도대로 사표 던진 피해자를 팀장으로 복직시킨 회사라고 잠깐 떠들썩했었다.
“역시 멋있네요.”
“회사 복지가 좋은 거죠.”
“도희씨 말한 건데.”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도희씨는 존재 자체…….”
“아, 그만! 그런 멘트는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푸웁, 정색은 하지 마십시오.”
“정색할 멘트를 하지 마십시오.”
도희가 우주의 말투를 따라 하자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우주였다.
흘겨보는 도희의 시선에 그는 웃음은 겨우 멈췄다.
“이도하씨는 사건 후에 이사 온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래서 예의주시하던 상황이고요.”
—그 자의 용모파기를 묻게.
집 앞이라 도사에게도 들린 모양이었다.
“혹시 보안 카메라에 찍혔다는 범인 사진 볼 수 있을까요?”
짧은 찰나, 우주의 안광이 날카로이 번뜩였다.
“이겁니다.”
그가 내민 휴대전화 화면에는 모자에 마스크를 낀 평범한 체격의 남자가 정면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하나도 안 보이네요. 체격도 너무 평범하고.”
“와아, 예리한데. 도희씨, 형사 하실래요?”
영혼 없는 리액션이었다.
“놀리세요?”
“그리고 이건 그 남자가 벽에 남긴 겁니다.”
우주는 흘겨보는 도희를 무시하고 사진을 넘겼다.
새하얀 바탕에 검은색인지, 붉은색인지 오묘하고 기묘한 색으로 써진 한 문장.
“악에는 악…….”
도희의 천사 같은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보통 미친놈이 아니네요.”
“욕 잘하시네요.”
고갤 든 도희 앞에 우주의 얼굴이 코앞까지 와 있다.
놀란 도희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근데 이런 사진 아무한테나 보여줘도 돼요? 아직 해결 안 된 사건이잖아요.”
“당연히 안 되죠.”
“그럼 형사님 큰일 났네요.”
“도희씨는 아무나 아닌데요?”
“으… 틈만 나면!”
“풉.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거 아닙니다.”
“네?”
웃음 터진 그의 모습에 도희는 눈만 깜빡였다.
“도희씨, 촉 좋으시잖아요. 범죄 관련 책도 많이 읽으시고.”
도희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혹시 무당이신가?”
“뭐, 제가 촉이 좋긴 하죠.”
대충 둘러대는 도희였다.
“도희씨에게 자문 드린 겁니다. 저희가 놓치거나 보지 못한 부분을 도희씨가 발견할 수도 있으니깐요.”
‘이 남자 촉도 장난 아니네.’
“한마디로 제 개인 자문의원이랄까요?”
“형사님 기대에 부응해야겠네요.”
“벌써 기대되네요.”
“기대는 하지 마시고.”
“그리고 이 미친놈이 동네에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항상 조심하세요.”
—이 자가 별 걱정을 다하는구나.
“도희씨는 예쁘니까 특히 더.”
“나타나면 우주씨는 감사해야 할걸요? 제가 때려잡을 테니까.”
—진정 네가 잡을 게냐?
‘도사님이 잡겠죠.’
“그러고 보니까…….”
우주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정말 이상하네요.”
“…뭐가요?”
불안함을 느낀 도희의 눈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아까 그 하얀 연기는 뭐죠?”
* * *
요즘 우주의 세상은 의문투성이였다.
‘이걸 믿어, 말아?’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는 우주의 입에서 난데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부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아무리 외진 골목이라고 한들 도심 한복판에 사람을 잠재우는 수상한 연기가 웬 말인가.
화학 테러가 따로 없었다.
도희는 우주에게 박현일의 짓인지, 하수구에서 나온 것인지 본인도 모르겠단 말만 늘어놓았다.
‘그게 하수구에서 나왔다고?’
박현일이 준비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일단 조서는 썼으니 의문의 연기는 담당 형사가 조사할 터.
“하…….”
‘1003호를 쫓아가기 시작한 건 오후 8시, 여기서 도희씨 집까진 5분, 내가 정신 차린 건 8시 10분.’
우주가 잠든 건 5분 남짓의 시간이었다.
‘혼자만 잠들지 않았다라…….’
딱 봐도 수상한 연기라 본인은 숨을 참았단다.
‘똑똑한 여자인지, 수상한 여자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정말 이상한 여자네.’
“선배 아까 급하게 어딜 뛰어가신 거예요.”
터덜터덜 걸어오는 우주에게 지 순경이 다가왔다.
“사건 조사.”
오피스텔 입구에서 잠복하고 있던 우주는 뛰쳐나가는 도하를 보고 급히 따라간 것이었다.
“1003호 뭐 있죠? 그죠?”
“어. 있긴 있네.”
“뭔데요?”
“사건과는 관련 없어.”
“에? 그게 무슨 말…….”
“넌 몰라도 돼.”
다정한 우주의 손이 막내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궁금한데.”
“남의 연애사는 관심 갖는 거 아니다.”
“예?! 연애요?”
우주를 보는 막내의 눈빛이 요상해진다.
“선배 혹시…….”
“너 인마 뭔 생각하는 거야, 이 자식이!”
우주가 막내에게 달려들자 막내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재빠르게 벗어났다.
“그럴 수도 있죠. 1003호 남자도 선배만큼 한 인물 하던데.”
막내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위아래로 가리켰다.
“별로던데.”
“잘생겼던데요?”
“나 여자 좋아해.”
“좋겠다. 여자들도 선배 좋아할 텐데.”
“안 좋아하던데.”
“누가요?”
“있어. 이 동네에.”
“하… 저는 잠복하느라 연애고 뭐고 다 강제 정리 당했는데, 누군 연애가 동네마다 따라오네요.”
막내가 투덜거리며 차에 오르자 우주도 뒤를 따랐다.
“다들 어디 갔어?”
“아, 피해자 신분 나왔습니다.”
오래간만에 전해진 희소식이었다.
“근데 그게…….”
“왜 뭔데 뜸 들여.”
“서 팀장님 말씀대로 전과자입니다. 그것도 살인. 15년 만기 출소 한지 두 달도 안 됐답니다.”
* * *
—저 자가 잘도 믿겠다. 잘도.
소파에 누워 있는 도희의 눈이 쭉 찢어지며 갈색 항아리를 쏘아본다.
“믿는지 안 믿는지 도사님이 저 형사 손대서 확인이라도 하실래요?”
—왜 세상사람 모두 손대라고 하지 않고.
“또, 또. 비꼬신다.”
—쯔쯧,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하지. 손발이 맞아야.
“도둑질하실 거예요?”
—…내 편히 말도 못 하지. 말도 못 해.
“오늘은 도사님이랑 저랑 살짝 손발이 꼬이긴 했는데! 저 형사가 안 믿는다고 해도 자기가 뭐 어쩌겠어요.”
이러나저러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박현일이 연기가 뭔지 모른다고 해도 경찰이 그게 거짓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뭐 진짜 모르는 걸로 결론 나면 대충 하수구에서 나온 걸로 되겠죠.”
‘물론 믿을 진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그곳에 한 번 가 봐야겠구나.
“어디를요? 오션 오피스텔요?”
—그곳에 가면 뭐든 알아내겠지.
“도사님.”
단호한 표정의 도희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왜 그러느냐.
“저는 몸이 여러 개예요? 아님 분신술이라도 가르쳐 주시던가!”
—쯧, 순서가 그게 아니지.
항아리 속에 있던 서책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영약 재료부터 구하자꾸나.
“그 말은 분신술이 된단 말이에요?”
—가능은 하네. 지속 시간이 문제지.
‘그게 된다고?’
—네 상태로는 일각의 반의반도 유지 못할 게다.
‘일각이 15분이니까 반의반이면…….’
“3, 4분 정도 된단 말이네요.”
김빠진 도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뉘었다.
“도사님.”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던 도희가 입을 뗐다.
—모른다.
“와, 매정한 것 봐.”
요물 ‘침’에 대해 물어볼 작정이었다.
—자네 친우 아닌가, 나도 당연히 돕고 싶으이… 한데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걸 어쩌겠나.
“계룡산이랑 면왕산엔 없었고.”
—짐작 가는 곳이 두어 곳 더 있긴 하네.
“그럼 일단 국내에 있는 은신처부터 하나씩 돌아봅시다!”
‘또 고생 좀 하겠네.’
오를 때 도술을 써야 하나, 내려 올 때 써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숨이 턱 막혀왔다.
‘생각해 보면 새로 변할 수 있는 시간이 꽤 길었던 거 같은데.’
“도사님 매로 변해서 올랐다가 쉬면서 은신처 둘러보고, 내려올 때 또 매로 변해서 내려오는 건 불가능할까요?”
—…….
“면왕산 때도 매로 날아서 올랐으면 그 사람들이 쫓아오지도 못했고, 그럼 그 고생 안 했어도…….”
—앞으로 유지 시간도 말해 줌세.
“그걸 알 수 있단 말이에요?”
—자네 남은 기로 어림짐작하는 것뿐이네.
‘아오, 진작 말 좀 해주시지. 하여튼 도사님도 가끔 보면 멍… 멍이 한 마리, 멍멍이 두 마리.’
급히 생각을 돌렸지만, 도사는 천장으로 날아올라 도희 눈앞에 나타났다.
—세상에 완벽한 이는 없으이.
“암요, 암요.”
—편히 욕하거라. 욕도 못 하는 것이.
“제가 또 각 잡고 욕하면 도사님 충격 받아서 도망가신다니까?”
—네가 바라는 거 아니냐?
“에이, 약속은 지키고 가셔야죠.”
—걱정 말거라. 내 필히 네게 재물을 안겨 주고 갈 터이니.
“크큭, 피곤이 싹 가시네요.”
띵동— 띵동—
“엥……?”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