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도사가 예쁘면 생기는 일 (49)화 (49/120)

048화 이게 울 일입니까?

야심한 밤.

집을 찾아온 도하의 모습은 새삼 낯설었다.

조각 같은 콧날은 더 높아 보이고 생기 넘치는 입술은 더 붉어 보였다.

낮보다 밤에 빛나 보이는 건 왜일까.

멀쩡한 도희 얼굴을 확인한 도하는 늦은 밤 찾아와 죄송하단 말 한마디만 남기고 그대로 돌아갔다.

그가 떠나고 도희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왠지 모를 아쉬움에.

*     *     *

—자 심호흡하거라.

“후, 하, 후.”

—더 천천히.

“후… 하아… 후…….”

—준비되었느냐.

도희가 손에 들린 가방 속을 들여다본다.

‘가방, 서책, 폰.’

그녀의 고개가 더 아래로 꺾였다.

‘신발도 신었고.’

“네, 완벽해요.”

—그럼 이제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하며 이동할 장소를 떠올려 보거라.

좁은 현관에 선 도희는 눈이 슬며시 감겼다.

‘4층 복도를 따라 쭉 들어가서 오른쪽, 바로 보이는 건 화장실 문 네 칸. 왼쪽엔 세면대.’

—소상히 그려 내야 한다. 그리고 네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 있어야 함이야.

‘난 이미 세면대 옆 구석진 작은 창고 칸이다! 난 이미 창고 칸에 도착했다!’

심혈을 기울여 선정한 장소였다.

4층 회의실을 이용하는 사람 말고는 갈 일 없는 복도 끝 화장실, 그리고 사내에서 보안 카메라가 없는 곳은 화장실뿐이었다.

‘세면대 옆 창고 칸, 구석진 창고 칸!’

도희가 캄캄한 머릿속에 창고 칸을 무수히 그려 냈음에도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왜 안 될까요. 도사니이임.”

힘이 빠져 현관문 바닥에 주저앉은 도희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왼손에 낀 은반지를 쳐다봤다.

—으그응… 쯧.

“이보다 어떻게 더 소. 상. 히 떠올리나요!”

나름 자신이 섬세하다 믿는 그녀였다.

—손을 대보거라.

“도술 쓰실 거예요?”

—내 친히 보여주겠네.

고이 펴진 도희의 양 손위로 서책이 내려앉았다.

촤라라락—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은 서책을 반쯤 펼쳤다.

그리고 그곳에 도희가 떠올리던 4층 구석진 화장실의 약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붓으로 그려내듯 굵고 검은 선들이 촘촘하게 그어졌다.

약도가 완성되자 서책에서 뿜어져 나온 새파란 빛이 도희를 감쌌고, 그 빛의 뭉치는 서서히 줄어들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     *     *

‘도사님이 그려 낸 조잡하고 굵은 선들보다 내가 더 자세히 떠올린 거 같은데…….’

—네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게지.

‘또 마음이 그곳에 가 있어야 한단 말씀 하시려구요? 제 마음은 이미 회사였다구요.’

결국 도사의 도술로 화장실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눈 한번 감았다 뜨는 걸로 지옥철을 벗어날 수 있다니.

현대인이 이보다 간절한 원할 도술이 또 있을까.

도희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쓸 수만 있다면 이게 진짜 요물인데.’

하얗고 가느다란 검지에 껴진 투박하고 납작한 은반지가 시야에 담겼다.

공간 이동 요물가락지도 제 기능을 못 하니 흔해 빠진 은반지에 불과했다.

조선 시대 제작된 은반지를 흔해 빠졌다고 할 만큼 감각이 남달라진 도희였다.

‘너무 심플하네. 예쁘긴 옥반지가 예뻤는데.’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 피부가 푸석해진 느낌이었다.

‘옥반지도 다시 껴야겠네.’

—언제는 쓸모없다더니.

‘향기 나는 옥팔찌는 몰라도 피부 고와지는 반지는 팔면 살 사람들이 줄 설걸요?’

—또 팔 생각부터 하는 게냐.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말이.’

—자네가 조선 상놈이었다면 장사치로 큰 부를 이뤘을 걸세. 뭐든 팔 생각부터 허이.

‘또 놈이라고 하시네.’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두산씨, 좋은 아침.”

그때, 도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네, 도하씨.”

—팀장님, 출근하셨습니까.

“네, 사무실입니다.”

—예.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그로부터 도하가 사무실에 도착한 건 출근 시간이 지나고 5분 후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반듯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도하였다.

“괜찮습니다. 업무 보세요.”

그로부터 10분, 20분이 지나도 여전히 한 자리는 비어 있었다.

“크흠!”

진명과 두산은 신경 쓰이는지, 시계와 도희를 번갈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30분이 지났을 때.

“팀장님, 윤소하씨에게 전화해 볼까요?”

“두세요. 곧 오겠죠.”

“팀장님 벌써 글이 올라왔습니다.”

오늘은 신문고 게시판 오픈 일이었다.

“자, 이제 바빠지겠네요.”

마우스를 클릭하는 도희의 손이 빨라졌다.

“와, 뭐가 이렇게 많이 올라왔대요.”

대부분 익명으로 올라와 있었다.

“강제 회비 각출을 신고합니다. 거짓 연장 근무 부당 이득 신고합니다. 불륜 커플…….”

“팀장님 불륜 커플 게시글 조회수가…….”

“댓글도 난리 났는데요?”

그때, 도하 자리에 있는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개선부 이도하입니다.”

“죄송합니다. 글 삭제는 불가합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바쁘십니다.”

도하가 전화기를 내려놓자, 곧바로 도희의 사무실 전화가 울린다.

“여보세요. 개선부 강도희 팀장입니다.”

*     *     *

띠리리리—

사무실 전화가 또 한 번 울리자 도희는 전화선을 빼버렸다.

“일을 못 하겠네. 일을.”

과도하게 걸려오는 전화들로 팀원들 모두 업무도 제대로 못 하는 지경이었다.

“아오!”

입술을 꽉 깨문 도희가 긴 머릴 쓸어 올리자, 그녀의 샴푸 향이 도하에게 가 닿았다.

작게 미소 지은 도하는 도희를 힐끔 바라본다.

“진짜 사람들 너무 한 거 아닙니까.”

두산이 벌떡 일어서더니 소리쳤다.

“글 쓴 사람은 따로 있는데 욕은 왜 우리한테 하는 건지, 원.”

“그게 다 찔리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진명의 말을 들은 도희가 손가락을 튕겼다.

“헐!”

“왜 그러십니까. 팀장님.”

“그걸 이용합시다!”

도희와 도하가 시선을 교환했다.

“오히려 잘된 거 같습니다.”

“그쵸? 도하씨.”

“예?”

진명과 두산은 영문 모르겠단 표정이다.

도희는 서둘러 전화선들을 다시 연결 했다.

“전화 와서 또 글 지워달라, 내려달라 욕하면 해당 글에 부서, 이름 메모부터 하세요.”

“허… 따로 조사할 필요는 없겠네요.”

진명이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다른 곳도 같은 일은 없는지 전체 조사는 해야겠지만, 시정부서 찾을 필요는 줄겠죠.”

“팀장님, 그럼 정리 편하게 전화는 제가 다 받겠습니다.”

“좋네요. 두산씨가 고생 좀 해주세요. 다른 내선 전화도 전부 두산씨 전화로 돌릴게요.”

“그럼 전 바로 답변 가능한 글들 리스트 뽑아서 팀장님께 보고 올리겠습니다.”

“네, 도하씨. 조사 필요한 리스트는 진명씨가 정리해 주시겠어요?”

“예. 팀장님.”

일사불란하게 할 일을 분담한 후 각자 업무에 돌입했다.

‘신문고에 올라오는 글만 조사해도 개선안 수십 개는 나오겠네.’

게시판에 글 올라오는 속도를 보니 당분간 다른 안건 실행은 미뤄야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시계가 11시를 가리켰을 때 사무실의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여러분 굿모닝!”

싱그러운 미소의 소하는 당당하게 걸어 들어와 본인 자리에 살포시 앉았다.

“어… 소하씨, 굿모닝.”

옆자리에 앉은 두산이 어색한 인사로 답했다.

황당하다 못해 당황한 도희의 눈이 더 없이 커졌고, 입을 먼저 연 것은 진명이었다.

“윤소하씨.”

“진명 대리님, 굿모닝.”

진명을 보는 그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굿모닝은 아니죠. 시간이 몇 신데.”

진명이 고갯짓으로 시계를 가리켰다.

“어제는 말도 없이 퇴근하더니, 오늘 지각까지 하셨네요. 적어도 팀장님께 설명은 드리는 게 도리 아닐까요.”

진명의 날카로운 음성에 소하의 표정이 급격히 굳는다.

“진명 대리님까지 왜 그러세요.”

그의 냉대에 소하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제가 그렇게 잘못한 거예요?”

어느새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은 눈물로 가득 고여 반짝였다.

“윤소하씨, 이게 울 일입니까?”

당황한 진명이 도희를 쳐다본다.

‘도와달라고?’

“하.”

도희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개판이네.’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래, 언제까지 참아. 오늘 끝장을 보자.’

“소하씨, 커피 한 잔 어때요.”

*     *     *

도희는 소하를 데리고 1층 카페를 찾았다.

텅 비어 있는 자리들을 둘러본 그녀는 제일 구석진 자리로 향했고, 그 뒤를 소하가 바짝 따랐다.

그리고 주문한 커피가 나올 때까지 두 여자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팀장님… 혹시 제가 잘못한 건가요……?”

소하의 글썽이는 눈망울이 괜히 안쓰러웠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소하씨, 어제 조퇴 결재도 안 올라왔던데.”

“팀장님 자리 비우셨길래…….”

사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운 도희였다.

“어차피 결재 못 하시니까 팀장님이 나중에 알아서 하실 거 같아서…….”

소하의 목소리는 힘없이 작아졌다.

“조퇴 결재는 본인이 올리는 겁니다. 남이 대신해 주는 게 아니라.”

도희는 회사 인생 최대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아… 앞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뭐야, 몰랐다는 듯한 저 말투는.’

도희의 미간에 작은 선이 생긴다.

“지각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지각 한 번 안 해본 사람 어디 있겠나.

“하지만 사정이 생겨서 늦게 된다면 적어도 저에게는 미리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도희가 소하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풀이 죽은 그녀는 도희의 눈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다.

“아, 네… 그렇게 할게요.”

우물쭈물 옅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는 소하였다.

도희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알고도 실수한 후 변명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마치 예전 인턴 교육할 때의 그 느낌이었다.

‘몰라서 잘못된 행동은 했지만, 이제는 따르겠다는 태도.’

둘은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흐르는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소하였다.

“팀장님, 제가 이상하시죠……?”

소하가 도희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저도 알아요.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거.”

소하의 뜻밖에 말에 도희는 새삼 놀랬다.

그녀의 눈치가 없는 줄 알았으니까.

“사실 저도 팀장님께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뭘?’

“편하게 말씀하세요.”

“…….”

고갤 숙인 소하는 우물 쭈물거리며 연신 제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소하씨, 전 부서랑 관련 있나요.”

소하의 고개가 들렸다.

“…네.”

소하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었다.

“소하씨, 무슨 일이에요?”

“말씀드릴게요.”

굳은 의지가 담긴 음성이었다.

“제가 어떤 일을 하다 왔는지.”

이어진 그녀의 한 마디.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