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둘이 비밀 연애였대요.
“하아…….”
“그러게. 사장님답지 않게 밀어붙인다 싶었습니다.”
“전 상무.”
“예.”
“나 요즘 나이 들어 보이나?”
“여전히 동안이십니다.”
무혁이 원하는 대답이었다.
“보통 얼굴, 돈 둘 중 하나엔 넘어오던데.”
그의 푸념에 전 상무는 도희의 말을 떠올렸다.
“보통 사람이 아닌가 보죠.”
눈썹을 치켜세운 무혁이 전 상무를 흘겨보지만, 미동도 없는 그였다.
“뭐, 아까는 그렇게 당당하게 ‘원만한 비즈니스를 위해 잘해드린 건데, 오해하셨나 봅니다.’ 그러시더니.”
전 상무는 목소리까지 낮게 깔며 무혁을 흉내 냈다.
“…저 정도로 싫어할 줄 알았나.”
무혁이 힘 빠진 숨을 푹 내쉬었다.
“강 팀장에겐 그 성공한 남자의 퇴폐미가 안 먹히나 봅니다.”
한때 어디서 듣고 온 건지, 본인에게 성공한 남자의 노련한 퇴폐미가 느껴진다 했다며 하루에도 몇 번 거울만 쳐다보던 시절이 있었다.
“작전을 바꿔야겠어.”
“그 작전도 안 먹힐 거 같은데.”
전 상무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혁은 이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시는 건 어떨까요.”
“내가 마음먹고 못 하는 거 봤어?”
“그 마음도 안 먹었으면 좋겠는데.”
“넌 대체 누구 편이지?”
“그것부터 고민해보겠습니다.”
쏘아보는 무혁의 시선을 외면한 전 상무는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 * *
띠—
기계음이 울리자 러닝머신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더니 결국 멈춰 섰다.
“헉… 허… 헉…….”
가쁜 숨을 내쉬며 러닝머신에서 내려온 도희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오, 내가 원래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 아닌데.”
—땀 한 방울 나지 않거늘.
“제가 원래 땀이 안 나는 체질이거든요!”
—반 시진(*한 시간) 동안 뛰어 보거라. 땀이 안 날 리 있는가.
“와, 도사, 아니 할아버지. 내가 지금 약속 지키려고 소중한 점심시간을 30분이나 투자했는데!”
—약속은 무슨. 그놈의 돈 때문이겠지.
“에헤이, 또 무슨 말씀을 그렇게.”
—아직 반 시진을 채우지 못했네. 하루라도 못 지키면 약조는 없어지는 걸세.
오늘 저녁엔 개선부 회식이 잡혀 있었다.
“걱정도 팔자예요. 회식 가기 전에 그 30분 꼭 채울 거니까 걱정 마세요.”
입을 삐죽인 도희는 귀에 꽂힌 무선 이어폰을 빼고 샤워실로 향했다.
‘씻고 가려면 시간 빠듯하겠네.’
—그 회식이라는 약조 꼭 지켜야 하느냐? 금일 뭔가 느낌이 좋지 않으이.
‘도사님. 약속은 다 중요한 거예요. 도사님 약조만 중한가요.’
—…내 감이 좋지 않아. 감이.
* * *
지이이잉—
지이잉—
“네, 형사님.”
—도희씨, 출근 잘하셨어요?
“그럼요.”
도사의 도술로 여느 때보다 편하게 출근한 도희였다.
—대체 출근을 몇 시에 하시는 거예요?
“네?”
—도희씨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절 기다려요? 어디서요?”
—어디긴요. 당연히 도희씨 집 앞이죠.
“어머, 언제부터요?”
‘뭐야, 괜히 찝찝하게.’
—도희씨는 몇 시에 나가셨는데요?
“글쎄요. 오늘 일찍 일어나서 평소보다 서둘러 나오긴 했어요.”
거짓말하는 도희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내일은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저 진짜 괜찮아요. 그렇게 신경 안 써 주셔도 돼요.”
—에이, 제가 도희씨 다른 남자 차타고 출근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나요.
“다른 남자요?”
—이도하씨가 말 안 해요?
“무슨 말요?”
—그럼 뭐, 저도 말 안 하죠.
아침에 지각한 도하가 떠오른 도희였다.
“혹시 도하씨도 오늘 저 기다렸어요? 저희 집 앞에서?”
—글쎄요. 전 모르겠는데.
‘나 기다리다가 지각한 거야? 허!’
“근데 아침에 왜 전화 안 하셨어요? 집 앞까지 오셔 놓고.”
—원래 서프라이즈가 감동이 두 배거든요.
‘아니… 고맙긴 한데…….’
그녀의 상황 때문인지 감동보다 당혹감이 밀려왔다.
“형사님, 신경 써 주시는 건 고마운데, 아침엔 무슨 일이 생기기도 힘들고, 출근까지 그러시는 건 좀 부담스럽네요.”
—고맙단 말은 받겠습니다. 부담은 알아서 버리시고. 이따 뵐게요, 도희씨.
갑자기 급하게 전화를 끊는 우주였다.
‘뭐야.’
챙겨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하, 내일은 기필코 반지로 출근하려고 했는데!’
애매하고 자그마한 찝찝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 * *
돌아온 도희의 눈에 보이는 건 한바탕 난리가 난 사무실이었다.
“팀장니이이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줍고 있던 소하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어떤 남자가 오더니 ‘이도하가 누구야!’ 그러면서 막 소리치고 물건 다 던지고…….”
‘신문고 글 때문인가.’
게시판 담당자가 도하로 되어 있었다.
“다른 팀원들은요?”
“보안 팀장님 오셔서 다 같이 나갔어요.”
바닥 곳곳에 흩뿌려진 키보드 자판들과 깨진 모니터 파편들을 보니 상황이 심각했던 모양이다.
“소하씨 다쳐요. 제가 할게요.”
급히 휴지를 뽑아 든 도희는 소하 손에 올려진 파편들을 받아들려고 했다.
“팀장님도 다치는 건 똑같아요,”
“전 괜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아요.”
기어코 다시 쭈그리고 앉아 파편들을 줍기 시작하는 소하였다.
“손으로 하면 다쳐요.”
소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자리에 앉힌 도희는 산산조각 난 도하의 모니터와 바닥의 잔해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아휴… 빗자루가 있으려나 모르겠네.”
선홍빛 제 입술을 꽉 깨문 도희였다.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와 달리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를 애써 눌러 담는 중이었다.
그때, 빗자루를 든 진명이 나타났다.
“아… 팀장님 오셨습니까. 그… 저…….”
“누굽니까.”
“…해외 영업팀 장 팀장이랍니다. 아침에 올라온 불륜 글 작성자 알려달라고…….”
그의 뒤로 도하가 들어섰다.
도희의 시선이 도하의 목으로 꽂혔다.
도하는 느슨해진 넥타이 사이로 단추가 떨어져, 풀어 헤쳐진 와이셔츠의 상태였다.
모두가 노타이지만 항상 홀로 넥타이까지 멘 채 단정함을 유지하던 도하였다.
“몸싸움까지 있었나요?”
날 선 도희의 목소리에 팀원 모두 움찔했다.
“별일 아닙니다.”
‘그럼 뭐가 별일인데.’
붉은 잔상이 남은 도하의 목은 방금의 소란을 짐작하기 충분했다.
“옷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도희의 시선이 불편한지 자리를 피한 그였다.
이어서 두산이 씩씩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선다.
“참나, 이렇게 경우 없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끝까지 사과 한마디를 안 하고 가네.”
두산은 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큰 덩치로 씩씩거리는 모습이 마치 화가 난 곰처럼 보였다.
띠리리리—
이 와중에도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전날까지 조용했던 전화가 울려대는 것을 보면 또 게시판 때문일 확률이 농후했다.
“일단 담당자 제 이름으로 바꾸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전화는 더 이상 받지 마세요.”
냉랭한 표정의 도희가 입술을 짓이기며 사무실을 나섰다.
* * *
“…괜찮을까요?”
두산이 도희가 사라진 문을 보며 입을 열었다.
“팀장님 표정 못 봤어? 딱 엎으러 가는 표정이던데.”
어느새 싸움닭 이미지가 굳어진 도희였다.
“알아서 잘하실 겁니다.”
대화를 나누던 두산과 진명의 시선이 도하에게 향했다.
이내 도하를 바라보는 진명의 눈이 가늘게 늘어졌다.
“근데 도하씨, 팀장님이랑 무슨 사이입니까?”
“아무 사이 아닙니다.”
“에이, 그때 내가 두 사람 손잡고 있는 거 다 봤는데 뭘.”
진명의 말을 들은 두산과 소하가 의자를 끌며 진명에게 다가왔다.
“허얼.”
“예? 두 분이요?”
“어. 우리 발령 온 첫날 둘이 사무실에서 손잡고 있더라니까.”
놀란 두산과 소하의 표정에 신이 난 진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서류 건네다가 정전기 통한 겁니다. 그때도 오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도하는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오, 정전기이.”
“원래 정전기 통한 뒤에 눈 맞고 썸타고 그런 거 아니에요?”
진명 옆에 옹기종기 모인 팀원들은 들뜬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근데 강 팀장님 사내 연애는 안 한다던데.”
“왜요?”
“모르셨어요? 전 남친이 우리 회사였잖아요. 돈 많은 여자 만나서 바람났다던데.”
“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강 팀장 같은 미인을 두고…….”
“뭐… 그 남자도 한 외모하긴 해요. 아마 이름 말하면 누군지 다들 아실 걸요?”
“누군데요?”
‘역시, 이도하. 강 팀장에게 관심 있구나.’
자신이 시비를 걸든, 사과를 하든 무덤덤하던 남자가 유독 한 여자에게만 관심을 보인다니, 이유는 뻔했다.
“문지혁.”
“헐. 강 팀장 전 남친이 문지혁이라고요?”
“그 사람 퇴사하지 않았습니까?”
“재벌 여친 만나서 퇴사한단 소문이 파다하긴 했지.”
“그럼 강 팀장님 만나다가 재벌 집 여자랑 바람났단 말입니까? 대박.”
문지혁이 누군지 모르는 도하만 조용할 뿐이었다.
“글쎄 둘이 비밀 연애였대요. 친한 몇몇만 알고 있는. 뭐 헤어지고 나서 부서에 소문 다 나고 강 팀장님 몇 달 넋 나간 채로 다녔다던데.”
말을 끝낸 소하의 시선이 빠르게 도하를 스쳤다.
‘표정 하나 안 변하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 알 수 없는 남자다.
“소하씨는 강 팀장님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두산의 물음에 진명도 보탰다.
“저도 소문이라면 빠삭한데, 문지혁 얘긴 처음 들어봅니다.”
“훗, 조사 좀 했죠.”
“조사요?”
“하긴, 강 팀장 소문이야 워낙 많으니까.”
“어머, 그 소문 중에서도 가짜가 얼마나 많은데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그리고 소문이란 게 원래 그래요. 본인이 아니고서야 가짜, 진짜를 어떻게 다 구분하나.”
“맞아요… 요즘 강 팀장님 소문이 심각하긴 해요.”
“아, 저도 들었습니다. 아우… 말도 안 되는 소문이던데요.”
“진위 여부는 당사자밖에 모르는 거야. 그게 진짠지 어떻게 아나.”
“에이… 설마요.”
“어떤 소문입니까?”
잠자코 있던 도하의 입이 다시 열리자, 이번엔 재밋거리를 찾은 듯한 장난스러운 표정의 진명이 신이 나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