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그쪽이 더 위험해 보이는데.
소하의 입이 닫힐 때까지 도희는 내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하… 하…….”
자신의 소문에 관한 긴 이야기가 끝나자, 허탈하게 웃는 도희를 조용히 숨죽이고 지켜보는 팀원들이었다.
“하… 하하…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오네.”
“어, 팀장님 천천히… 천천히 드세요.”
순식간에 맥주 한 잔을 털어 버린 도희였다.
“하하… 하…….”
분명 머릴 쓸어 올리는 도희의 표정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왠지 모르게 살벌했지만.
“그러니까 지금 제가 소문으론 뭐, 조선 시대 장희빈, 장녹수급 되는 거네요?”
얼굴로 사장을 홀린 도희가 자신이 부사장의 자리를 차지하려 사장을 도와 부사장을 내칠 준비를 하고 있다며 소문이 자자하단다.
“마 부장 일도 내가 계획… 하! 그걸 내가 어떻게 계획하냐고!”
심지어 마 부장의 일까지 전부 계획된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단다.
“그리고 뭐? 남자가 한둘이 아니야? 내가 남자가 어디 있냐고, 남자가! 그 남자들 다 어디 있어요? 아오!”
비어 있는 자신의 잔을 확인한 도희의 손은 도하의 맥주잔으로 향했다.
“팀장님… 너무 급하게 마시는 거 아니신…….”
“크으, 내가 안 마셔서 그렇지. 저 술 잘 마셔요.”
입에 묻은 거품을 훔치는 도희의 손짓은 한두 번 마셔 본 동작이 아니었다.
“근데 그 소문을 정말 사람들이 믿는단 말이에요?”
“전 안 믿었어요!”
새초롬한 표정을 지은 소하는 귀여웠다.
“저도 뭐,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명씨 말은 일부는 믿었단 말이네요?”
“회사에서 목적 없이 개선부를 운영할 리는 없으니까요.”
‘역시 날카롭네.’
“두산씨 생각은 어때요? 정말 일반적인 생각이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전 별생각이 없어서. 하하.”
“도하… 음.”
도하에게 물으려던 도희는 다시 입을 닫았다.
왠지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든 상관없습니다.”
도희의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먼저 대답하는 도하였다.
그 대답은 애매하고도 이상했다.
‘참나, 믿었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흐음… 제 소문도 소문이지만 개선부 관련된 소문도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네요.”
개선부에 대해 말이 많을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이토록 구체적인 소문이 난 줄은 몰랐을 뿐.
그리고 개선부 관련 소문들은 도희가 들어도 꽤 그럴 듯해 보였다.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고.’
“그리고 전부 틀린 이야기는 아니에요.”
도희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네?”
“예?”
“…….”
도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개선부가 회사 내 잘못된 유착관계를 정리하려고 만든 부서는 맞아요. 뭐,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타겟이 정확히 부사장이라 소문난 것도 의외였다.
‘아닌가? 너무 당연한 걸 수도.’
“그리고 사실 특정된 타겟이 있는 건 아니에요. 누구나 부당 이득을 취하거나 사규를 어기고 있다면 타겟이 되겠죠.”
일차적 타겟은 신문고에 신고된 사람들이었다.
“지금 제 타겟은 부사장일 수도, 아닐 수도 있어요. 그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제가 꼬투리 잡을 순 없잖아요?”
도희의 입꼬리가 한껏 비틀리며 올라갔다.
그걸 포착한 두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 전 지금 그가 회사의 악의 축이라고 생각해요. 아, 그전에 저는 부사장 자리에 관심 없어요. 부장 달기 전에 퇴사하는 게 제 목표예요.”
도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팀원들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여튼! 전 지금 우리 회사의 뿌리가 썩었다고 생각해요. 너무 깊게 박혀 있어서 아무도 뽑을 생각을 못 하는데…….”
“팀장님은 뽑으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너무 당당한 도희의 대답에 당황한 진명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뿌리는 못 뽑아도 분갈이 정돈할 수 있을걸요?”
진명의 한쪽 눈썹이 씰룩거린다.
“당연히 그 전에 썩은 뿌리는 잘라 낼 거예요.”
도희의 말이 끝나자 소하가 살포시 손을 들었다.
“저기…….”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렸다.
“저희 이제 일 이야기 그만하고 놀면 어때요…….”
“풉, 맥주부터 더 시킬게요.”
“저희 게임해요. 게임!”
“여기서요?”
“여기서 우리가 제일 조용하게 논다구요!”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소하는 마치 장난감을 사달라고 투정 부리는 아이 같았다.
“그래요. 해요. 게임.”
“무슨 게임할까요.”
진명과 두산은 죽이 척척 맞았다.
“일단 친해지기 게임!”
“좋아요!”
도희까지 나서자,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었다.
* * *
인기 있는 곳임을 증명하듯 많은 남녀가 어우러져 소란스러운 술집.
그 중앙에 위치한 동그란 테이블엔 비장한 표정으로 둘러앉은 다섯 사람이 나란히 오른 손바닥을 올린 채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여기 관심 있는 사람이 있다, 접어.”
소하의 눈길이 양쪽에 앉은 도하와 도희의 손을 빠르게 오갔다.
“잠깐, 이런 질문은 서로 괜히…….”
“에이, 팀장님 너무 보수적이시다. 나이 속이신 거 아니시죠?”
진명과 도희는 동갑이었다.
“아니이, 나는 괜찮은데 혹시 다들 불편할까 봐 그러죠!”
“그럼 질문 바꿀게요! 여기서 쿨하지 못한 사람 접어.”
소하의 기습 질문에 손가락을 접기도, 펴기도 애매한 도희는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다음 제 차례입니다. 여기 관심 있는 사람 있다, 접어.”
짓궂은 진명이었다.
“아오.”
소주 한잔을 한입에 털어 넣고 잔을 내려놓던 도희는 우아한 동작으로 소주를 마시는 도하가 눈에 들어왔다.
‘한 잔도 안 마시더니.’
애매한 질문엔 소주 마시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 도희와는 달리 모든 걸 솔직하게 답하던 도하가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댔다.
“어? 두산씨 접었네?”
홀로 손가락을 접은 두산이었다.
진명이 말하지 않았다면 지나칠 일이었다.
“역시 두산씨 상남자! 크으!”
두산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던 진명은 눈치 보듯 도하와 도희를 힐끔거렸다.
“제 차례입니다.”
게임 내내 ‘전 패스입니다.’하며 자신의 차례를 건너뛴 도하였다.
도하의 입이 열리기 직전, 도희는 괜히 침을 꼴깍 삼켰다.
과연 그가 어떤 질문을 할지, 모두의 관심이 모인 순간!
“대리 이하 접어.”
예상치도 못한 공격이었다.
“와, 도하 대리님 너무해! 직급 공격이라니.”
“넵!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전 접겠습니다.”
여기서 사원은 소하와 두산이었다.
“이제 두산씨 차례예요.”
“전 원래 받은 대로 돌려드립니다. 대리 이상 접어!”
“나이쓰!”
발랄한 소하의 호응과 함께 나머지 세 사람의 손가락이 접혔다.
“와, 전 저 벌주 마시면 취할 거 같은데요.”
“저도요. 저걸 어떻게 마셔.”
“벌주 수준이 거의 연차감인데요.”
“으, 제발 나만 아니어라!”
도희 포함, 모두가 마지막 한 손가락만 펴진 상태였다.
“후, 그럼 이제 내 차례네요?”
벌주의 운명은 도희에게 맡겨졌다.
“누가 걸리든 벌주 안 마셔도 돼요. 강요 아닌 거 알죠? 대신 뭐 게임은 게임이니까 다른 소소한 벌칙으로 바꿀게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못 먹어도 고 아닙니까!”
“제가 흑장미하고 소원 받을 건데요?”
“오~ 흑장미!”
“소원이요?”
소원이라고 하면 다들 거창한 걸 생각하기 마련이다.
“일 왕창 시킬 거야. 각오해, 아주!”
처음 보는 장난 그득한 말투의 도희였다.
“으! 그게 더 싫어요. 그냥 마실래.”
“저도 그냥 마시겠습니다.”
“저도 일보단 술이…….”
질문을 기다리는 팀원들의 시선이 도희의 분홍빛 입술로 모여들었다.
“제 질문은요.”
모두가 침을 꼴깍 삼키는 그 순간.
“내가 스파이다, 접어.”
강렬한 한마디가 모두의 귀를 파고들었다.
* * *
“으! 취한드아. 꺄르륵.”
넘어질 듯 말 듯, 갈지자로 휘청이는 여자를 남자는 마지못해 부여잡았다.
밤길을 밝히는 두 선남선녀의 걸음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2차 가요! 2차! 우리 2차 갑시다아!”
여자는 이미 3차까지 달린 상태였다.
“팀장님, 잠시 편의점 좀 들렀다 갈까요?”
도희에게 숙취 음료가 필요하다 생각한 도하였다.
“좋아요! 좋아! 편의점 좋아!”
핸드백을 든 도희의 손이 빙빙 돌아가기 시작한다.
“난 맥주! 오징어에 맥주!”
잔뜩 취한 거 같은데 용케 발음은 멀쩡한 그녀였다.
“푸후…….”
도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맥주에 오징어!”
편의점 간판을 찾은 그녀는 그대로 미친 듯 뛰어 들어갔다.
계산대에서 정말 맥주를 사려는 도희와 잠깐의 실랑이가 오갔는데, 고집이 어찌나 센지, 그녀를 말리지 못한 도하였다.
결국 그녀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 있다.
“우리 2차 안 가요? 2차?”
“도희씨 이미 많이 취했어요.”
도하는 항상 둘이 있을 땐 도희씨라고 불렀다.
“어?! 다들 어디 갔어요?”
“다들 집에 갔습니다.”
“흥, 그럼 나도 집에 갈래.”
비틀거려 도하에게 잡혀 있던 팔을 뿌리치고 걸어 나가는 그녀였다.
다시 도희 옆으로 다가온 도하는 위태롭게 걷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도희씨 그러다가 넘어져요.”
“난 넘어져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갑자기 흥얼거리기 시작한 그녀였다.
“도하씨, 그거 알아요? 난 지금 무적이라고요 무적!”
“예?”
“난 죽지 않아! 내가요, 폭포에서 떨어져도 안 죽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또 도하 손을 뿌리치고 앞서 걸어가는 도희였다.
그때, 발을 삐끗한 도희가 차도로 넘어질 듯 휘청였다.
“도희씨!”
도하는 도희가 넘어지기 직전, 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겨우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진짜 큰일 날 뻔했습니다! 도희씨, 괜찮아요?”
목청 높여 소리치는 그가 낯설었다.
처음 보는 도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취한 도희가 그걸 알 턱이 있나.
“왜에~ 왜! 소릴 질러요!”
앙탈 부리듯 칭얼거리는 도희를 보니 지금 그녀에게 잔소리하는 것은 소귀에 경 읽기와 다름없었다.
“하.”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는 도하였다.
“하하하.”
그가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한다.
이내 곧 그는 실컷 웃었는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소리쳐서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도희씨 다칠까 봐.”
“흥. 나 집에 갈 거예요.”
“크큭, 알았어요.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처음 보는 도희의 모습에 자꾸 웃음이 나는 도하였다.
그 순간.
“두 분 여기서 뭐 하시나요?”
도하는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라 생각하며 고갤 돌렸다.
잘생긴 형사였다.
“밤길이 위험해서요.”
우주의 시선이 향한 곳은 도희의 어깨에 닿은 도하의 손이었다.
“그쪽이 더 위험해 보이는데.”
맞닿은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은 주변공기까지 싸늘하게 만들었다.